조선에서 본 일본의 력사(11)

▲ 중경시대의 대한민국림시정부[사진 : 필자 제공]
▲ 중경시대의 대한민국림시정부[사진 : 필자 제공]

1. 민족주의운동

1) 《부르조아민족주의》, 《민족자본》

3.1운동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주체는 부르조아민족운동으로부터 사회주의운동에로 전환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독립운동사의 중심과제의 하나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종래 좌익측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 않는 민족운동의 제조류를 《부르조아민족주의》라고 일괄해서 파악하고 그 계급적 기초를 《민족부르조아지(=민족자본)》라고 이해하여왔다. 그러한 이해는 재검토를 요하지 않을까.

《부르조아민족주의》라는 정치사 개념은 본래 1920년대초 레닌에 의하여 세계반제투쟁의 동맹군으로서의 식민지·피압박민족의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사회주의적인 민족운동의 제조류를 가리키고 쓴 것이다. 그 후 이 용어는 그 계급적 기초가 경제사적 범주(카테고리)로서의 《민족부르조아지》에 있다고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단정적인 규정을 하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20년대 전반까지는 민족부르조아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코민테른이 27년의 장개석의 샹하이 반공쿠데타에 의하여 그 기대가 배반당하자마자 갑자기 그를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 일반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민족자본》이라는 범주를 확립한 것은 1930년대말 연안에서의 모택동 등에 의해서였다. 여기서는 매판자본과 구별되는 《민족자본》이 《부르조아민족운동》의 담당자로서 파악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반식민지인 중국에서는 일정한 현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에 빼앗기지 않는 《민족자본》의 독자의 경제영역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그 까닭으로 《민족부르조아지지》는 항일전쟁하에서는 통일전선의 일익을 담당하는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2) 조선인부르조아지의 궤적

그러나 완전식민지의 조선에서는 이식식민지경제와 별개의 차원에서 조선인부르조아지의 경제체계가 《2중경제》적으로 성립하고 민족자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확보된다는 것은 도대체 있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부르조아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자본은 서로가 정치적 입장의 선택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그를 구분하는 일반기준을 찾아보기는 실제상 곤란하다. 즉 민족부르조아지, 예속(매판)부르조아지라는 범주구분이 적당하지 않는다.

실제 강제《병합》전부터 1910년대에 걸쳐 일본제국주의가 토착자본의 발전을 저지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부르조아지는 일본자본과 경합하여 일정한 민족적 저항의 자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20년대에 들어서고 일제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본격적으로 확립된 일본독점자본에 종속한 범위 내에서 토착자본의 발전이 허용되게 되자 《종속발전의 길》(정치적으로는 독립국가 포기)인가, 어디까지나 일국자본주의발전의 탈환(부르조아독립국가 수립)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여 결국 30년대에는 예속적인 자세를 더욱 강하게 하는 궤적을 걸어갔다. 완전식민지화의 상황에서는 토착자본이 자본으로서의 발전을 바라는 한 그것은 예속적으로 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당시의 대표적인 조선인자본가였던 호남재벌의 궤적을 예로 하여 본다면 1910년대에는 민족주의, 20년대에는 민족개량주의(=타협적 민족주의), 그리고 30년대 이후는 예속적인 자세를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래 《민족부르조아지》로 불리운 조선인 자본의 실제는 자영업의 범위를 너무 넘지 않는 단순재생산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하의 영세자본(=식민지적 小부르조아지)정도였다.

3) 민중적 민족주의

1920년대 이후 조선인부르조아지의 태반이 점차 체제내화하는 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비타협적민족주의운동의 기반은 실은 부르조아지가 아니라 영세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식민지민중에 있었다. 식민지적 소부르조아지는 그 독자적인 정치적 대표자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러한 민중에 합류하고 그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20년대 이후의 민족주의운동의 기반을 식민지민중에 두게 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주의적이지 않는 민족주의의 제조류의 전개를 전망할 수 있는 시점을 가질수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를 부르조아 민족주의와 구별하여 민중적 민족주의(저항적 민족주의)라고 부르자.

2.사회주의운동

1) 초기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인식

(1) 맑스주의의 보급

3.1운동 이후 인테리나 학생·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이념을 맑스-레닌주의에 찾게 된다. 조선에서의 맑스-레닌주의는 국외의 공산주의자그루빠(상해파, 이르크쯔크파, 북푹회=후의 일월회・북풍회)를 통해서 국내에 보급하였다. 각 그루빠는 경쟁하면서 국내와 연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22-23년 경에는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는 사상단체(서울파 ← 상해파, 화요파 ← 이르크쯔크파, 엠엘파 ← 북풍회 등)가 수많이 조직되었다.

조선에서의 맑스-레닌주의의 보급은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일제의 탄압의 가혹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 비하여 보급의 속도, 폭이 특출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토착자본이 빈약했던 조선에서는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기회주의나 수정주의 등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러한 기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의 창설(1925년)은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2, 3년 늦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통치하에서는 공식의 조직을 세우는 조건이 매우 제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운동은 잠재화한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 그 에네르기는 일본이나 중국보다 컸다.

▲ 여운형 [사진 : 필자 제공]
▲ 여운형 [사진 : 필자 제공]

가령 22년 1월에 코민테른이 주최한 《극동민족대회(또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가한 조선대표단은 실로 전체 참가자의 3분의 1을 넘어(144명중 52명)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많았다(주요참가자는 리동휘, 여운형, 김규식, 김단야 등, 여운형은 대회의장단에 선출). 또한 18년에 하바롭스크에서 재외활동가(리동휘 등)에 의하여 한인사회당이라는 최초의 사회주의조직이 창설되었는데 이 조직년차는 일본, 중국보다 빨랐다. 국내에서도 23년에 경성고무공장녀직공의 파업이나 24년에 전국적 규모의 조선노농총동맹의 조직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920년대 전반기의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질적 수준도 높았다.

(2) 분파주의의 문제

코민테른은 28년 7월의 제6차대회에 제하여 조선공산당에 지부로서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그 이유는 탄압에 의한 지도부의 붕괴(28년 10월까지 4차례에 걸친 공사당탄압)와 분파문제에 있다고 되어 같은 해의 조선문제에 관한 이른바 《12월테제》(《조선혁명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에서는 노농대중에 기초한 당재건을 지시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악물면서 《12월테제》에 충실하게 필사적으로 노동자나 농민들 속에 들어갔다. 조선국내에서는 10개 이상의 당재건의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통일전선의 신간회 운동이나 30년대 전반의 지역산발적인 적색노농조합운동의 시기에는 당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은 마지막까지 정식한 재승인을 주지 않았다.

당내외에 상당한 분파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복되여야할 것이기는 해도 당해산의 절대조건으로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종파는 도이췰란드와 소련에도 있었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고 국제당에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조선사람들만이 종파적 습성을 기질적으로 소유한 민족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조선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이 왜 종파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져야 하는가.

실제 28년 이후의 당재건운동의 시기가 조선공산당이 존재한 시기보다 오히려 운동의 질이나 활동가층의 부피가 두툼해졌다. 당은 작았고 단명으로 그쳤으나 그 후의 활동은 오히려 크고 끈기있게 지속되었다는 것이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특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코민테른의 태도는 조선문제경시의 고정관념에 의한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조선의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봄에 있어서 거기에 어떠한 나라에도 볼수 있는 그 역사적 제한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지금 전체로서의 민족해방투쟁사 가운데 정당하게 위치를 규정해나가는 것도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3.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대

1) 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자, 민족주의적인 사회주의자

민중적 민족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그들은 표면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투쟁현장에서는 다분히 공통된 과제를 걸고 있었다.

주목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20-30년대의 민족해방투쟁사를 돌이켜보면 민족주의운동은 민중의 생활현실에 기초한 제요구에 응하려고 하는 속에서 단순한 부르조아국가로서의 독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사회》를 희구하고 있었다. 한편 공산주의운동을 보면 이 시기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원칙에 의한 현중국당에로의 전당방침》을 받아 재외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과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의 사이에서 고뇌하였으나 35년 7월-8월의 제7차대회의 방침에 의하여 다시 조선혁명고유의 과제=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정면에서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을 비롯한 제3세계의 식민지나라들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단순한 이률배반이 아니었다. 일방은 민족성에 얼마간의 비중을 두고 타방은 계급성을 보다 많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실태에 맞게 말한다면 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자, 민족주의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 쏘련 하바롭스크근외의 야영지에서의 ≪국제련합군≫(조선,중국,쏘련) [사진 : 필자제공]
▲ 쏘련 하바롭스크근외의 야영지에서의 ≪국제련합군≫(조선,중국,쏘련) [사진 : 필자제공]

2)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대, 제3차 조선전쟁, 동북아시아전쟁

1930년대초 중국 동북지방 각지에 조중연합의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었다. 그 후 각지의 부대들에 대한 전일적인 지휘체계를 갖춘 34년 동북인민혁명군, 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되었다. 5월에는 김일성장군을 회장으로 하는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인 조국광복회가 조직되고 조선혁명의 성격과 과제를 명시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채택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은 만주와 함경도지역에 확대되어  산하에 수많은 합법, 비합법조직들이 조직되었다. 40년 이후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42년 여름에 조, 중, 소 세 나라의 무장력의 연합인 국제연합군을 편성하였다. 형식상 소련원동군 독립88여단으로 부르고 부대의 대외번호는 8461보병특별여단으로 하였다. 3개 지대중 제1지대는 조선지대였다.

▲ 한국광복군 [사진 : 필자 제공]
▲ 한국광복군 [사진 : 필자 제공]

당시 중국관내에 있던 민족주의운동은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파라고 하는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중경의 상해임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파라고 불리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무한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었다. 상해임정은 40년에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산하에 37년에 조직한 조선의용대를 가지고 있었다. 41년 최창익을 비롯한 대부분의 의용대는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는 연안지구로 북상하였으며 42년 5월 의용대의 일부 부대는 김원봉을 따라 중경에 가서 상해임정의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상해임정은 30년대에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에 따라 41년에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42년 10월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민족전선연맹측의 김원봉이 의원으로 선출되고 44년 4월에는 김규식이 임시정부의 부주석이 됨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이룩하였다. 임시정부는 연안(중국관내 화북지역)의 조선독립동맹측에 사람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 조선의용대(1938년) [사진 : 필자 제공]
▲ 조선의용대(1938년) [사진 : 필자 제공]

중국관내 화북지역에서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던 김무정 등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김무정은 중국의 홍군건설과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도 기여하였다. 그들은 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그해 7월에는 연안지구에 도착한 조선의용대를 받아들이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하였다. 42년 8월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새로 민족해방단체로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20만의 화북지역 조선인민을 반일투쟁에로 동원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무장력인 8로군에 소속되어  일본군병사들에 대한 반전사상의 선전과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조선인들에 대한 탈출을 선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전투들에도 일부 참가하였다. 독립동맹은 중국관내의 여러 지역에 지부를 두었으며 국내의 건국동맹과 중경의 임시정부와도 연계를 가지었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 일본의 패전을 예측하고 민족해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여운형이 중심이 되여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공장, 학교, 기업 등에서 대열확대의 조직화를 다그치고 내무・외무・재정부문과 지방별 위원을 두었다. 한편 상해임정, 조선독립동맹에 사람을 파견하였으며 연안과는 연계를 가지였다.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은 대립과 통합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렴되어간 그들의 건국구상은 토지개혁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기초로 양자가 넓게 결집한 민족통일전선적인 체제=인민민주주의혁명의 수행이었다. 조선독립운동사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대가 기본흐름이었다.

또한 조선독립운동은 제2차 세계개전 시기의 세계적인 반파쑈운동의 일익을 아세아에서 담당한 반일민족통일전선으로서 제3차 조선전쟁, 동북아시아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3)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 가지는 의미

국내외의 모든 반일애국역량과의 합작을 위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응당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일본이 너무나도 빨리 패망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것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그는 왜적의 항복이 자기에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준비를 한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갔다고 통탄하였으며 자기네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발언권이 약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반일애국역량과의 단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은 역사의 밑거름으로 되어 해방된 조국땅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밑으로부터의 자생적인 권력・인민위원회와 이를 위로부터 묶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의 선언, 또한 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및 남북지도자회의에 의한 《4.30공동성명》(①미소양군 철거 ②내전 방지 ③전 조선정치회의 소집과 전국선거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④남조선단독선거 반대)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세력의 합의를 기초로 하여 이룩되었다.

해방 직후의 남북과 좌우를 초월한 민족적인 결집은 그 이전시기부터의 반일통일전선운동의 계승이고 최고도달점이었다. 또한 이 경험은 72년 《7.4공동성명》, 그리고 2000년의 《6.15공동선언》, 2007년의 《10.4선언》, 나아가서2006년 《5.17총련, 민단공동성명》에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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