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의 시대에 진입하다 (9)

본문요지

종전 후 성립된 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가 금-달러를 연계시킨 고정환율제에 기초하였다면, 1980년대 이후 성립한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금 태환이 필요 없는 ‘세계화폐’ 창출과 관련이 있다. 그 핵심은 자국 내의 통화팽창과 재정적자 문제를 세계경제에 전가시킬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누가 갖느냐는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달러패권의 종식은 좁게는 미국패권의 종식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를 뜻한다.

6.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와 미국 패권의 종식(2)

1)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본질
2) 지구경제 일체화는 후퇴할 것인가?

(8회에 이어 계속)
‘다국적기업’은 이때부터 경제생활에 있어 보편적 현상이 되었으며, 또 국내시장과 국제시장을 통틀어 진정한 주체가 되었다. 필자가 앞에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생산관계의 변화’와 결부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단일한’ 지구적 시장이 이미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이 같은 지구적 경제일체화를 다시 해체하고 역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제대공업이 매뉴팩처(공장제수공업)를 대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확정 지은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오늘날의 지구화나 신자유주의는 ‘생산 국제화’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결코 금융(업)자본의 이해라는 협소한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계속해서 4.27시대연구원 손정목 연구원의 글을 인용하기로 하자. 앞으로 지구화가 후퇴할 것이라는 근거로 그는 미국의 대중국 봉쇄정책 강화와 미국 제일주의의 추구를 든다.

(초기 방역을 위해-인용자)“중국이 봉쇄와 격리로 국제 공급망(supply chain)으로서의 역할이 어렵게 되자 피터 나바로 미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위기 때에 동맹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에 있는 미국 기업은 본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겨야 한다’고 귀환을 촉구하였다. 이는 미국이 중국의 경제성장과 일대일로에 타격을 가하고, 미국 기업을 귀환시켜 중미 간 경제부문 연계의 분리(Decoupling)와 경제의 ‘아메리카 퍼스트’ 추진을 의미한다.”1)

사실 미국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중국을 봉쇄하고 경제적 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대중국 ‘거리두기’에 대해 미국 내 언론조차도 회의를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코로나 방역을 위해 당장 급한 의약품과 의료장비 공급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19일 ‘전시(戰時) 대통령’을 자처하며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했다. 그는 호기롭게 GM(제너럴모터스), 포드, 보잉사 등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기업들에게 당장 마스크를 생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0일 후에 그는 “GM은 멍청하게 방치한 공장을 당장 열어, 지금 인공호흡기를 제조하시오! 포드도 빨리 움직이시오!”라며 분노의 트윗을 쏟아냈다. 1주일 전인 3월22일 트윗에서 “포드, GM, 테슬라가 인공호흡기 등을 신속히 만들기로 했다. 잘해 보자”며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였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이들 제조사들이 인공호흡기를 제조했거나 생산 일정을 밝힌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이에 대해, “트럼프의 문제 인식도 늦었지만, 인공호흡기의 복잡한 부품 공급라인에 대한 이해도 없이 ‘단호하게’ 국방물자생산법을 말한 것부터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장비에 들어가는 700~1500개 부품은 모두 12개국에서 오는데, 이 공급 라인을 누가 조율할지, 총 몇 대가 필요한지, 자금은 어느 부처에서 얼마나 제공할지 등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기존 인공호흡기 제조사 공장은 아일랜드·중국·스위스에 있다.2)

이처럼 ‘탈중국 공급망 다변화’ 전략은 일부 정치엘리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가 않다. 다변화된 공급망 구축은 막대한 비용 증가를 부른다. 예컨대 자동차업계에 부품을 공급하는 영국 기업 유니파트의 CEO 존‧닐은 새 부품 공급처를 찾는 건 “이베이에서 물건을 검색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동차업체에 납품할 연료탱크 공급 업체를 새로 발굴해 규격을 확정하고 품질을 확인하는 데까지만 해도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이 걸린다. 하물며 첨단기술 제품의 공급망 다변화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막대한 투자비가 들 뿐 아니라, 극소수 기업만 개발·생산 능력을 갖춘 ‘기술적 독점’ 체제가 강하기 때문이다.3)

<파이낸셜 타임스>도 코로나19처럼 세계적 유행병이 다시 돌면 전 세계 공장이 모두 멈춰서면서 공급망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논평했다. 원료부터 최종 제품까지 전체를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인데,4) 그것은 지금과 같이 서로 얽히고설킨 국제 분업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도 지금의 지구경제 일체화 추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 10대 항구 중 일곱 개가 중국에 있고, 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간 구축된 중국의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지금 없기 때문에 “중국은 계속 세계의 공장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5)

3) 다극화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질서

그렇다면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 이후 수립되게 될 신국제질서는 어떠한 모습일까?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여 패권을 행사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은 지금의 국제 역관계 상 패권국가가 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지구화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패권국가는 전 지구적 영향력을 보유한 유일(唯一) 국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는 중국은 이 기준에 한참 미달한다.

예컨대, 2차 대전 종전 직후 미국처럼 세계 전체 공업생산량의 50%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경제적 역량이 없을뿐더러,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배타적인 ‘이념적 동맹체계’도 구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이 ‘1개 중심, 두 개 날개’라고 하는 개혁개방 노선 속에서 ‘4개 원칙’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4개 원칙’이란 다름 아닌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독재, 맑스레닌주의, 공산당 영도의 견지를 말하는데, 지금처럼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나라가 이러한 중국과 배타적인 ‘이념적 동맹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6)

결국 미국패권으로 상징되는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대체하게 되는 것은 다극화에 기초한 ‘민주적 신국제질서’ 일수밖에 없다. 지금의 패권주의 질서의 일차적 피해자인 개발도상국들이 그 추진 주체이며, 브릭스 5개국(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름 아닌 그 진영을 대표한다. 그 때문에 이러한 질서는 기존의 제국주의 패권질서의 ‘대립물’로서 민주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다극화에 기초한 신국제질서가 수립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류의 이상적인 최종목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패권질서를 부정하고 민주적 원칙을 옹호한다손 치더라도, 아직 그것은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시기 국제영역의 주요모순이 현대제국주의와 개발도상국 간의 모순이며, 국제 진보역량의 일차적 과제가 현대제국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민주적 신국제질서’의 수립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 전략을 통해서 현대제국주의와 패권주의는 국제 진보세력의 공통의 적이 될 것이며, 이 역사적 반동역량이 무너지는 순간 인류 전체의 해방을 위한 유리한 국면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본문 주석]

1) 손정목, “코로나19의 정치경제학(1)”, 민플러스.
(
https://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53)

2) “전시법 발동에도 'GM·포드 인공호흡기' 왜 안 나오나”, 조선일보, 2020년3월31일. 의약품관련해서는 다음 기사 내용을 참조할만하다. “인도산업협회(CII)와 미국 컨설팅업체 KMPG가 지난 4월 벌인 공동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처방되는 의약품의 90%가 복제약이며, 미국인들이 복용하는 알약의 3분의 1가량이 인도의 복제약 제조업체 제품이다. 그런데 인도는 API의 약 68%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중국이 의약품 수출을 제한하면 인도도 약품 생산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 약품 수급 ‘탈중국’ 꾀하지만…인도와도 관계 끊어야 가능”, 연합뉴스, 2020년5월18일)

3) 이와 관련하여,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미국 정부가 반도체업체 인텔, 대만반도체(TSMC) 등과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위탁생산 시설(파운드리)을 건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다. 반도체 생산을 동아시아에 의존해서는 안보가 위협받으니 ‘반도체 자급자족’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텍사스 오스틴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의 미국 내 시설 확장을 도울 용의도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미국이 자국 업체인 인텔뿐 아니라 삼성전자나 대만반도체와도 협력을 모색(사실은 정치적 압력!)하는 것은 현재까지 세 업체 외에는 첨단 반도체를 대량생산할 능력이 없으며, 이들만 통제하면 중국 반도체산업과 야심찬 ‘중국제조 2025’ 전략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줘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 문제는 기술적 어려움이 크다는 데 있다. 예컨대 애플은 2015년 내놓은 아이폰6S에 삼성전자와 대만반도체가 각각 생산한 두 가지 중앙처리장치 칩(A9)을 썼는데, 두 제품은 정밀도와 크기가 서로 다르고 전력 소모량 등 성능도 차이가 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런 차이에 따른 품질 관리와 제조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변화를 시도하는 건 비용에 민감한 기업들로선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닌 것이다.(“미국의 ‘탈중국 공급망 다변화’ 성공할까”, 한겨레신문, 2020년5월12일 참조)

4) 위 기사.

5) “美 ‘중국서 기업 빼겠다’… 글로벌 공장 中위상 흔들기”, 조선일보, 2020년5월6일. 지난 3월 실시된 주중(駐中) 미 상공회의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기업의 70% 이상이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중국 외부로 공장을 이전할 계획이 없다고 답하였다.(위 기사) 이 조사 결과는 객관적 현실과 일부 정치가의 주관적 열망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6)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오히려 중국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패권질서’ 보다는 민주적인 국제질서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제 그간의 역사적 행보를 보면, 중국은 사실상 개발도상국 진영 내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독점과 반패권주의 입장을 분명히 해온 국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국가가 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자기 발전의 길을 갈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 자본주의진영의 '단결의 핵'인 현대제국주의 세력을 무력화시켜야 하는데, 그 핵심은 후자가 주도하는 패권적 국제질서를 '민주적'인 것으로 개조하는 길밖에 없다. 중국이 제창하는 일대일로는 주권존중, 내정불간섭 등 ‘평화공존 5원칙’을 자신의 기본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는데, 각국이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의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발전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신 국제질서 구축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 때문에 지금 시기 제반 자본주의국가와 현대제국주의의 가장 큰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인 사회주의 중국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있어 그 한 가운데에 설 수밖에 없으며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과 '패권'에 대해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김정호, “국제관계 민주화와 지구화로 가는 다극화”, 민플러스, 2019년12월16일)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