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식민지 시절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폄하하여, 하나로 크게 뭉치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분열을 좋아하는 특성을 가졌다는 지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사람 둘이 모이면 그 힘이 두 배가 되고, 세 사람이 모이면 세배, 다섯 사람이 모이면 다섯 배가 된다고 했다. 반대로 조선인들은, 두 명이 모이면 그 힘이 두 배가 되기는커녕, 한사람이 쓸 수 있는 힘마저 두 쪽으로 갈라져서 그 힘이 절반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조선인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 힘이 세분화되어 오히려 약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국가(國歌)는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모래알이 모여서 바위가 되고)’이다.
한국 사람들의 나라 사랑 노래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다.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와 동해 물이 말라버리고 백두산이 닳아져 없어져 버린다는 것과는 그 정신적 발상 차원이 전혀 다르다.
8·15해방 후 국토의 강제 분단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고 민족이 좌와 우로 갈라졌다.
이 분열에의 댓가는 실로 엄청난 전쟁 참극을 불렀다. 아직도 역사의 굴레가 되어, 인류의 숙제로 민족의 무거운 짐이 되어 분단(휴전)선으로 현존한다.
분열과 흩어짐에 대한 징벌은 우리에게 무서운 재앙이 되어 다시 찾아온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가 부른 분열과 흩어짐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하물며 우리 스스로가 부른 분열과 흩어짐일 경우, 이를 말해서 무엇하랴.
지금 우리 사회는 수준 낮은 정치 잡배들에 의해서 사분오열이 되었다.

남북이 강제로 갈라진 것도 원통한데, 남이 들려준 총칼 들고 좌우 대리 싸움질한 것도 원통한데, 또다시 지역감정을 부추겨 동과 서로 나누어 증오를 불렸었다.
그것은 일제의 괴뢰인 만군(滿軍) 출신 군사 도당들이 미제 탱크를 몰고 나와 저지른 망동(妄動)이라고 치자.
요즘 대선판의 저질적인 정치 집단과 권력욕에 눈이 붉은 정치 잡배들의 사회적 분열 조장 행위는, 도를 넘어 실로 망국을 재촉하는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반민족 사대 매국 재벌언론들이 이를 부추기는 보도 만행은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다.
언필칭 꼰대니, 청년이니를 들먹거리고, 2030(이십대 삼십대), 4050, 육십대 칠십대를 세대별로 나누어 서로 대립각을 세우게 한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에 무슨 큰 넘지 못할 장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발을 불어낸다.
직장생활에서도 선임사원과 신입사원, 팀장 과장과 평사원 사이의 불화와 차별을 크게 부각하고 문제로 삼는다.
각 정당들은 직장의 일자리를 늘리고 근무 연한을 올려서, 정년을 연장할 방책을 세우질 않고, 나이 든 선임자 이른바 꼰대들 때문에 청년 실업자가 많은 것처럼 터무니없는 갈등을 부추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일반인 서로 편을 가르고, 젠더 갈등을 들고나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느니 마느니, 성소수자, 동성애자, 또 이리저리 선을 그어 갈라놓는다.
고래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그 능력의 차이 신분적 차별이 아닌, 기능과 특성에 따른 일종의 자연 현상적인 구별이었다.
남과 여는 위계에 의한 구분이 아니고, 조화의 원리 음양지화합(陰陽之化合), 양성합혼(兩性合婚) 본능에 의한 각각 역할 명칭일 따름이었다.
남자 남성이기 이전에 아버지이고 아들이었다.
여성 여자이기 이전에 어머니와 딸이었고. 아내와 누이였다.
남성은 오빠이고 지아비였다. 생물학적으로도 암 수는 평등이었다. ‘사내’와 ‘계집’은 특질 특성 그 기능이 다를 뿐 서로 ‘고임’을 주고받는 한 인간으로서의 평등윤리였다.
개체 인간, 인간체(人間體)의 완성은 어쩌면 남과 여의 합일체를 말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청춘들이 좋아하는 상대를 반쪽이라 부르는 것이다. 괜스레 굳이 페미니즘을 내세우고, 이에 맞불을 놓아 ‘이대남’들의 청춘 불만 청년 울분을 충동질할 일은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파렴치한 무뢰배들의 벼슬 쟁탈전으로 변질된 정치판이 되어버렸다.
4, 5년 단위로 우리 사회는 선거 때문에 아주 호된 홍역을 앓는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저 잘났다고 나와서 되지도 않은 감언이설로 민중을 속여 먹는다. 그들이 거짓으로 쏟아낸 선거공약은 거개가 다 실천 실행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아예 처음부터 실행 실천도 의지도 없으면서 유권자들을 속이기 위한 헛소리 흰소릴 마구 쏟아내 놓는 것이다.
원대한 꿈을 펼쳐나갈 대륙길이 38선으로 막혔으니, 시원시원하고 배포 큰 역사적 선거공약이 나올 리도 없고, 민족의 앞날 이상(理想)을 선도할 재목이 나올 리도 없는 형편이다.
그저 외세에 빌붙어 한자리해 먹고 돈 한 뭉치 꾸려 들고나오면 그만인 것이다.
나라 민족의 영광, 인류공영, 사람다운 삶 따윈 우리네 남녘땅 정치판에선 영 궁합이 안 맞는 항목이다. 우물 안 개구리들의 썩은 시궁창 내 풍기는 속 빈 맹꽁이 타령이 한창이다.
세대 간의 갈등이란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명 성장 활동의 한 현상이다. 그것은 어떤 문제로 불거진 사건이 아니다.
먼저 싹을 틔운 나무는 나중 움트고 나온 나무보다 키가 더 클 수밖에 없고,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밖에 없다.
나중 나온 나무는 앞서 나온 나무의 그늘에 가리움을 당하고, 가지와 잎을 마음대로 펼치자니 자리가 너무 비좁다.
앞서 나온 나무들의 장애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숲과 나무는 조화를 이루어 자란다.
공자(孔子) 시대에도 젊은이는 버릇없고 노인네는 잔소리가 많다고 서로 간 불협화음이 일었다.
생각의 차이 사상 간의 대립도 그렇다.
인간은 천층만층 구만 층이란 말이 있다.
어찌 생각(思考)을 가진 인간이 똑같은 사고를 하고 똑같은 사상으로 획일화 단일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 사고 사상이란 물건(?) 자체가 그렇게 동일하게 규격화 정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생각, 사고 사상일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이론이나 사상도, 정신적인 고귀한 소산이라고, 존중받거나 두고두고 후세까지 높이 평가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유사 이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종속 지배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종속지배정책의 가장 쉬운 방법으로 식민지 백성들의 내부 분열을 꾀했다.
하나로 크게 뭉쳐서 저항할 수 없도록, 하나를 둘로, 둘을 넷으로 갈갈이 찢어서 저희끼리 싸우도록 분열과 갈등을 조장해 놓는 술책이다.
내부 분열은 강대국의 덫이다.
여기 속아 놀아난 민족은 자격 수준 미달의 미개한 종족으로 당해 세계사의 무대에서 예외 없이 도태되고 말았다.
이것이 냉혹한 인류사의 현실이고 역사법칙이었다.
우리는 지금 오천 년래의 큰 시련 앞에 서 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천오백여 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언어를 쓰고 흰옷 민족으로 살아왔다.
조선조 오백 년 내내 남인 북인 노론 소론 파당을 짓고, 양반 상놈, 씨족 다툼으로 갈라져 힘이 다 빠진 상태에 있었다.
그 결과 이십 세기 들어 해일처럼 밀려오는 서양 물결에 편승한 칼잡이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십일 세기 새천년 2022년 오늘 우리는 나라 땅 반쪽을 속수무책으로 미국 코쟁이들한테 강점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분열상은 어느새 강자의 억압과 지배에 익숙해져 버린 종속사회의 식민지 병이 계속 도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파리 대가리만 한 남녘땅, 저들의 선배 사대매국 군사 도당들은 서와 동을 나누고 갈라서 꿀맛 같은 권력 맛을 즐겼었다.
그들의 손자뻘이 되는 요즘 반민족 반통일 정치 잡배들은, 가는데 마다 인연 연고를 들먹거리며, 남녘 일천오백 리 강산을 다 헤집고 지역 분열에 눈이 붉었다.
출생지, 마누라 친정, 근무지 연고, 선조의 산소, 선친의 처가(외가), 사돈네 8촌까지 별의별 연고 인연을 내세워 편을 가르고 아첨을 떤다.
땅이건 사람이건 나눌 수 있는 데까지 나누고, 찢어발길 수 있으면 찢어발길 수 있는 데까지 또 더 찢어발기는 게 이들의 목표이고 사명이다.
책 한권 제대로 읽지 않는 것 같은 텅텅 빈 머리통에, 곰팡이가 덕지덕지 낀 사고방식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들, 참으로 나라의 앞날 민족의 진로가 걱정스럽고 난감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