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용의 한마디] 4.19혁명 전사들을 생각하며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고려가요 ‘정과정’의 한 구절이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우리 강산 삼천리에 붉은 진달래가 피어난다.

4293(1960)년 그날 피의 화요일 경무대 앞에서 총 맞아 죽은 4월전사들의 피의 절규가, 두견이 울음이 되어 북한산록 수유리 산자락으로 울려 퍼진다.

벌써 62년 세월이 갔다.

그동안 수많은 계절이 봄을 실어 나르고 어느새 예순두 번째의 봄을 실어 온 것이다.

그때의 젊은 사자들은 80대의 노인이 되었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 재수생이고 실업자인 청장년들, 그리고 또 구두닦이 신문팔이, 넝마주이 부랑아 거리의 소년들….

양동이에 물을 퍼 들고나와 데모대에 물을 퍼주던 아주머니들, ‘이승망이 물러가라!’고 외치던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아저씨….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웠던 그 수많은 모든 사람들, 민중의 물결….

이들은 하나 한 덩어리가 되어 백색 독재 반공 정권 친미 분단 정부를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때려 부수고, 사대 매국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쫓아내는 데 성공,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였다.

일본인들이 쫓겨가고 해방이 되었다는데, 실제론 양키 털발들이 강제 점령한 남녘땅은 종의 멍에를 둘러쓴 식민지가 되었다.

38선을 없애고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수많은 애국전사들이 해방공간 무장투쟁에 떨쳐나섰다.

6·25전쟁이 터지기 전 5년 동안 남녘땅은 치열한 유격 전쟁으로 피범벅이 되었다.

그 후 3년여에 걸친 참혹한 국제적 대형전쟁이 잠시 총성을 멈추고 채 7년이 지나지 않아서 4·19혁명이 터졌다.

조국의 해방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선배전사들의 뒤를 이어 ‘한글세대’ 새로 자란 민족의 새싹들이, 이 땅의 민중민주 제단에 생때같은 젊음을 통째로 내 던졌다.

아직 채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 무한한 꿈과 이상을 다 접어두고 오색 무지갯빛 젊은 날의 희원을 안고 저 푸른 조국의 하늘을 향해 날개 달린 천사가 되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도 했다.

미처 피어나지 못한 어린 생명들의 희생을 두고 시중의 언론들은 <지난밤 비바람에 허술히 진 낙화 그 수 얼만가!>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자유당과 이승만 백색 독재의 총부리 앞에 맨주먹으로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던 어린 넋들을 조상(弔喪)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이승만이 항복 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은 신문들은 ‘제2의 해방’이란 제목을 특대 활자로 대서특필한 호외(號外)를 다투어 발행했다.

서울 장안 거리거리는 온통 사람 사람의 숨결로 홍수를 이루었다.

역사의 파장과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4·19정신 계승은 헌법전문에 명시되었고, 5천 년 역사상 유일하게 “혁명”으로 공인 기록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일당과 군부 세력의 30여 년에 걸친 끊임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폄하될 대로 폄하되고 그 역사에 끼친바 공적과 빛나는 영예를 훼손할 대로 훼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본래의 4월혁명의 위대성과 민족 역사 진운(進運)의 한 중대한 고비가 되었음을 간과, 평가절하하고, 혁명의 의의(意義) 혁명정신을 축소 은폐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민족혼 민중의 혁명성을 부정 말살하려는 끈질기고도 악랄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원대한 역사의 안목에서 보면, 민족세력과 반민족세력, 사대매국세력과 자주애국세력, 외세의존 반통일세력과 외세배격 통일지향세력간의 집요한 싸움의 연속인 것이다.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대학생들은 곧장 민중혁명의 근저에 숨어 있는 주제를 찾아내고, 혁명 혼을 형상화하여 구호로 표현한 것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였다.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을 염원하고 부르짖은 것이다.

가자 북으로! 는 제2의 해방을 맞았던 4월혁명공간 해방 분위기, 민중 염원의 흐름을 집약 표현한 것이다.

62년 전 4월혁명공간은 가자 북으로!의 구호가 말해주듯, 그만큼 민족 염원인 통일 기운 통일 열기가 최고조로 상승했었다.

오늘 우리네 현실은 그때의 시대 분위기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것이다.

4월영령들께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도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앙천지(俯仰天地) 땅을 칠 일이다.

나라의 통일, 겨레 하나 되는 일을 이렇게나 등한시하고 나 몰라라 하고 내던져 버릴 수 있는가 말이다.

도대체가 민족 양심이 통곡할 일인 것이다.

62년 세월이 흘렀으면 그때의 통일 기운 통일에 대한 열망이 62배는 더 상승했어야 한다.

생살을 찢듯이 갈라놓은 부모형제, 국토분단 민족 분열인데, 어찌 이렇게 담담하고 아파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정녕 분단의 아픔, 분단의 고통이 없다는 말인가?

해방공간, 6·25전쟁 지리산에서 죽은 민족전사들을 어찌 잊으려 하는 것일까.

그들의 죽음은 왜 외면하고 헛되게 하려는 것일까.

그들의 조국통일 자주통일 정신을 되살리고 이어받기 위해서 분연히 일떠선 것이 4월 민중봉기, 4·19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사적 맥락에서 4·19혁명의 역사성을 높이 평가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연면히 이어오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강도적 수법에 의한 국토분단을 감행한 외세와 그 앞잡이들에 대한 저항이었다.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전쟁을 국제전으로 확대하고 살육을 감행, 이를 계기로 분단의 기정사실화, 이를 긍정하고 인정하게 하려는 강압적 시도를 결단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에 맞서 애국전사들은 붉은 피를 흘렸다.

4월전사들은, 이런 선배 애국전사들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사대 매국 친미 이승만 정권을 때려 부순 것이다.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6·25 거대전쟁, 큰 난리를 겪은 후 혼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허덕이던 우리들의 조국 황막한 폐허의 대지 위에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정부를 세우려는 거족적인 몸부림이 곧 4·19혁명이었다.

외세에 주눅이 들고 왜소해진 5천 년 민족혼을 깨워내는 자주의 용틀림이었다.

서두에 인용한 ‘내 님을 그리사와’는 ‘짐이 곧 국가’이던 시절의 노래이다.

임금이 곧 하늘이고 국가이었다.

임금 사랑은 나라 사랑이고 임금에 대한 충절은 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고려 때 동래(東來)사람 정서(鄭敍)는 자신의 나라(임금)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충심을 산에서 우는 접동새에 비유하였다.

봄이 깊을수록 접동새 울음소리는 쉰목소리 무겁게 내려앉아서 피를 토하듯 사람의 가슴을 후벼 저미는 것이다.

해마다 4월이 오면 눈에 무쇠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처참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해 3월 15일 ‘부정선거 다시하라!’ 절규하던 마산의 어린 중고등학생들의 시위대열이 또다시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피의 화요일, 서울은 사람의 바다였다.

반공회관 서울신문이 검붉은 화염에 휩싸이고 효자동 종점 경무대 어귀에선 쉴 새 없이 총성이 우짖었다.

서울의 하늘은 낮게 드리운 검은 하늘이었다.

그 하늘 아래로는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가 귀를 찢는 듯 울려대고 휜 광목에 싸인 시체들이 세종로 태평로 쪽으로 흘러내렸다.

전사들의 주검을 감싼 흰 광목 위로는 선홍빛 핏자국이 번져 나고 있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데 어찌하여 우리 역사는 피를 먹고도 자라질 못하는 것일까.

38선, 백마고지, 피의 능선, 지리산에서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렸는데, 이 땅 분단의 역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4월의 젊은 사자(獅子), 4월 전사들은 그 선홍빛 붉은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그들의 염원 겨레의 소원인 민족자주통일은 오늘도 어찌하여 까마득하기만 한 것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해마다 4월이 오면 산 접동새 타령만 부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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