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그린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 [사진 : 인터넷 캡처]
▲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도에 그린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 [사진 : 인터넷 캡처]

  이날 밤 안국광 대위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시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영하7,8도의 꽤 추운 날씨였다. 찬바람을 막기 위해 귀마개를 한 새파랗게 젊은 부부가 발을 동동거리며 판넬 그림을 팔고 있었다. 간단한 풍경화에서 풍속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의 그림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캐리커처 형식에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판화도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어쩐지 발길이 걸렸다.
  강욱철은 시대감각이 느린데다가 촌에서 자라서 그림이니 음악이니 하는 장르에는 여간 무식한 편이었다. 또 우선 살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 분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잠시 발을 멈추고 보았더니 얼른 보아도 판넬 모양도 앙증맞고 그림이 촌티를 벗은 것 같았다. 값비싼 그림이야 언감생심 하늘의 별 쳐다보기이지만, 손바닥만한 것 하나 사다가 판잣벽에 걸어두고픈 생각이 들어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밤길에 몇 번 시청 앞을 지나가다 바람이 따뜻한 날 밤 자세하게 천천히 그림들을 뜯어 볼 시간을 갖게 되었었다. 
  자세하고 천천히 그림을 보았더니, 대부분의 그림들이 유명화가의 작품을 모사(模寫)한 그림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한국 사람들이 감격해하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모사그림도 있었다. 이 대작을 축소모사가 아니고 대작의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그려놓은 것이다. 그림에 무식한 강욱철이 보아도 윤창현의 모사는 번뜩이는 데가 있었다. 이것은 모사가 아니고 일종의 창작이었다.
  이중섭의 가난이 찍찍 흐르는 담배갑 은박지 그림들은 외려 확대 모사였다.
  모사라고 해도 사진 찍듯이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어느 한 부분에 가벼운 변형을 주거나 원작의 의도(意圖)를 더욱 짙게 혹은 더 어둡게 또는 더 밝게 ‘돋을 그림’을 그렸다.
  조선전쟁을 테마로 한 피카소의 ‘코리아의 학살’은 한 부분을 떼어내고 또 다른 부분을 도려내어 그것을 합성하는 깃법이었다. 
  이렇게 윤창현은 모사 아닌 창작을 선보이고 있었다.
  판화로 널리 알려진 휘슬러, 브나르, 뭉크, 고갱의 작품도 있었다.
  강욱철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칸딘스키, 놀테의 판화도 있었다.
  이런 건 다 강욱철의 관심 밖이었는데. 이름 없는 조선 환쟁이들의 민화 민속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이보다도 강욱철이 놀란 것은 윤창현의 손에서 민화나 민속그림이 민중화 민족화의 자리로 끌어 올려지고 있었다.

  넝마주이 출신 길거리 화가 윤창현은 조선이 해방되던 해에 세상에 나왔다.
  윤창현은 제가 스스로 세상에 나오고 싶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부모님의 망극한 은혜를 입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하필이면 넓은 육지도 아니고 비좁은 섬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 섬이 바로 제주도였다.
  졸지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고 보니 가난하고 못 사는 집 아들이 되었다. 한라산 밑 어승생오름 바늘오름 어중간쯤에 있는 산비탈 마을이었다. 
  제주도가 속한 나라 조선은 그동안 대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 갓 해방이 되었다고 했다.
  그가 조선 나이로 네 살이 되었을 때 오십(5월10일) 선거가 있었다. 그 해 8월에 대한민국이 선포되었다.
  나라가 서기는 섰는데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문제가 있었다.
  1897년 고종임금이 王에서 皇帝가 되고 조선은 대한제국 (大韓帝國)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뒤 3.1 봉기가 있었고 해외 망명인사가 중심이 되어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대한帝國의 帝짜를 民짜로 바꾸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했다.
  한국이라는 韓은 원래가 마한, 진한, 변한의 ‘한’이고 순수한 우리말 ‘한’이었다. 중국 글짜를 쓰다 보니 밝고 크다는 뜻을 가진 韓짜를 차용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우리를 얕잡아서 우리 땅을 삼한(三韓)이라 부르고 우리민족을 韓人이라 불렀었다. 三韓이나 韓人은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단군왕검의 조선(朝鮮)이나 고구려(高句麗)처럼 대륙국가가 아닌 저 먼 한강 이남의 변두리 소국(小國) 오랑캐 국가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외세 의존 사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은 이씨왕조가 대조선제국(大朝鮮帝國)이라고도 못하고 韓짜앞에 大짜를 붙여서 대한제국이라 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大짜는 大英帝國, 大日本帝國이라 하니까 이것을 본따서 붙인 것이다.
  大짜는 명사가 아니고 수식어로 붙인 것이다.
  이름부터가 이러하니 이놈의 나라가 제대로 곧추서서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나라에 태어난 윤창현이 조선나이 네 살 때에 4.3사껀이라고 하는 제주도의 큰 난리를 겪은 것이다.

▲ 4.3 제주학살 [사진 :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캡처 사진 필터 처리]
▲ 4.3 제주학살 [사진 :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캡처 사진 필터 처리]

  4.3 사껀 그 이전 이미 지난해 3.1절 기념식 때 제주도엔 큰 난리가 일어났었다.
  당시 제주도민이 27만 명이었는데 3만여 명이 이 기념식에 참석했었다. 식이 끝나고 이들은 가두시위에 들어갔었다.
  행렬에서 애국가와 3.1절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시위대는 ‘3.1 혁명 정신으로 조선통일 독립을 쟁취하자! 미국은 남한에서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응답은 미군정청의 명령에 의한 경찰의 총격이었다.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나이 어린 소년 1명을 포함하여 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시작한 제주도민의 투쟁은 이듬해 4월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4월 3일 새벽2시 탕! 하는 한 발의 총성이 어둠에 잠긴 한라산 자락을 뒤흔들었다. 이것을 신호로 한라산의 모든 산봉우리 크고 작은 모든 오름들엔 싯뻘건 봉화가 타올랐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민중의 원한, 맺히고 맺힌 민족의 한(恨)이 폭발을 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하고 민족은 자주통일 독립국가를 향유해야 한다. 우리 제주도민은 인민 생활의 억압과 우리 조국의 식민 지배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미국군대는 즉시 철수하라!’
  ‘망국적 단독정부수립을 결사반대한다!’
  ‘감옥에 갇힌 애국자들을 무조껀 즉시 석방하라!’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공무원은 직장을 수호하고 용감하게 투쟁하라!’
  ‘장병들은 조국과 민중을 유린하는 외적을 내쫓는 투쟁에 앞장서라!’
  ‘애국자를 학살하는 반역자를 타도하라!’
  ‘유엔 한국위원단은 즉각 철수하라!’
  ‘조선통일 독립 만세!’

  이렇게 부르짖으며 제주도민들은 투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이 4.3 투쟁 봉기 결과는 참혹했다.
  인명피해가 8만 6천여 명이나 되었다. 1만 5천여 호의 가옥이 불에 탔다. 농우 7만  8천 두와 2만2천여 필의 말이 도살되었다.
  제주도민이 먹고 살아야 할 식량13만4천 식, 구황식량인 고구마 4백20만 관,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할 면화 9만7천 관이 소각되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섬 제주도, 비상계엄령하의 무법천지였던 이 외떨어진 섬사람들의 피해를 어찌 다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섬에서 윤창현은 흙을 먹고 살았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으면 마당귀에 기어나가 흙가루를 파먹고 찬물을 마셨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주도는 따뜻하다고 한다.
  한라산 꼭대기엔 하얀 눈이 한 여름이 다 되도록 하얗게 덮혀 있었다. 제주도도 겨울은 겨울이다. 집은 불타버리고 입을 옷도 없었다.
  밤이면 흙구덩이 고구마구덩이에 들었고 날이 밝으면 양지 바른 밭 둔덕에서 몸을 떨었다.
  윤창현의 다섯 여섯 살은 너무도 춥고 시린 배고픈 세월이었다.
  윤창현은 위로 형이 셋 누나 둘, 손아래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아래 남동생은 젖배를 곯아서 뼈와 가죽만 남아 고개를 이길 힘도 없었다.
  해빛이 맑은 어느 날 실성을 한 모친이 집을 나갔었다. 배가 고파 울다가 마당귀에 기어나가 흙가루를 집어먹다가 목이 매어 숨을 못 쉬고 죽었다. 윤창현도 같이 흙가루를 집어 먹었는데 부엌으로 기어가 찬물 바가지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용케도 살아남았다.
  윤창현은 지금도 그때 동생에게 물을 먹이지 못한 죄의식이 가슴에 있다. 윤창현 자신도 물바가지를 뒤집어 쓴 다음 곧장 정신을 잃고 말았었다.
  아버지와 형 둘 누나들은 모두 토벌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는 이북 말을 쓰는 청년들의 칼에 목이 잘려 나갔었다. 형들 둘은 총을 들고 산으로 갔었다. 이덕구 사령관이 죽던 날 총 맞아 죽었다.
 이덕구 사령관의 시신은 나무에 매달아 관덕정 앞에 효시(梟示)하였는데, 댓창으로 찌르고 칼로 난도질하여 갈기갈기 찢어 놓았었다. 윤창현의 형들도 갈기갈기 찢어서 들판에 내버렸었다.
  큰 누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는데 키가 좀 커 보였었다.
  총을 든 사람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윤간을 감행했다. 그렇다고 살려주지도 않았다. 집에 불을 지르고 불 속에 던져버렸다.
  열세 살짜리 작은 누나마저 덮치려 하자 어머니가 대신 그 사람들의 팔목을 끌고 집 뒷켠으로 갔었다.
  불속으로 던진 큰 누나의 비명소리에 작은 누나도 맞 비명을 지르며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누나들을 향해서 기관단총을 난사해 비명소리를 잠재웠다.
  셋째형님 하나가 어떻게 살아서 일본으로 가는 밀선을 탔었던 모양이었다. 4.3이 지나고 5년 만에 일본에서 소식이 왔었다. 이미 그 때는 모친이 실성을 하여 동네를 헤매다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어 죽은 지 4년이나 지난 뒤였었다. 윤창현이 표선 외가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큰 외삼촌은 일제 때 일본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다.
  서귀포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윤창현이 고등학교 시절 이것저것 책을 가까이 하게 된 것도 큰 외삼촌의 영향이 컸었다.
  일본에서 연락을 보낸 셋째형은 대학공부를 꼭 해야 한다고 윤창현에게 학비 걱정을 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윤창현이 대학진학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학진학은 일종의 사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창현 자신도 이제 뼈가 굵은 청년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그는 바로 고향 제주 섬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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