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9

  오늘은 불암산 등산이 약속된 날이다.
  윤창현 동지와 고충석 동지가 가까운 몇 사람께 파발을 띄워서 오늘 불암산 회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강욱철이 며칠 전 안산 바위 밑 물건들을 확인하고 곧바로 오대영을 만났었다.
  오대영은 현역으로 있을 때 멋지게 총질 한 번 못하고 옷을 벗은 걸 후회했다. 대신 그는 제가 맡은 일에 충실했다.
  강욱철이 확인한 물건 중에서 수류탄과 소총탄 모두는 오대영을 통해서 확보한 것이었다. 칼빈 두 자루는 4.19 때 우이동 숲 속 바위틈에 버려두었던 것이다. 그해 5월 기억을 더듬어 찾아 왔었던 것이다.
  바위 밑 맨 안쪽에 상자채로 넣어 있는 가래떡(T.N.T)은 이한숙이의 양키물건 보따리에 싸여 온 것이다.
  그가 가장 아끼는 엠완총은 부산 총포창 3년 근무 기념품이었다.
  우이동 숲속에서 항복, 하산을 결심했을 때 다시는 이렇게 허망하게 백기를 들진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만약 그날 무장데모대원이 30명만 되었드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백기를 들진 않았을 것이다.
  원래 유격대 토벌작전은 10대 1의 압도적인 병력이 아니면 승산이 없는 것이다. 무장 30명만 되었어도 3백 명 이상의 적과 싸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고기 값은 하고 죽는 것이다.

  지금 미국은 어떻게 하든지 남한을 일본에 붙여서 한 묶음으로 만들려는 계획인 것이다. 자기들은 이들 뒤에서 남한을 총알받이로 하여 쏘련과 중공을 견제 또는 공격을 하겠다는 속셈이다.
  만약 조선반도가 통일이 되어 하나가 되면 국력이 지금의 두 배 세배로 커지는데 이런 강력한 국가가 자신들의 편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외려 북조선이 주도권을 잡고 쏘련이나 중공 쪽에 설 공산이 훨씬 큰 것이다. 남한 지도자들은 제대로 인격을 갖추거나 국가관이나 동포애 같은 것도 정치신조도 없는 것들이다. 백성들 역시 친일 친미파가 많아서 전쟁이 터지면 일본이나 미국으로 도망칠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공화국의 지도자나 인민들은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의식으로 독립심이 넘치고 외세에 대한 백절불굴의 주체적 투쟁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고 보면 한국의 데이비스캠프나 용산기지, 오산이나 군산 대구 비행장에 유도탄이나 원자폭탄을 갖다놓고 꼼짝 못하게 식민통치를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절대로 통일을 못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잘못하다간 극동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쫓겨날 확률이 큰 것이다. 필리핀 오끼나와 태평양에서 물러서면 하와이 이서(以西) 아메리카 본토까지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선 맹목적 숭미(崇米) 친일에 충성을 다하는 박정희 같은 인물이 최상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아, 조선 사람이 그것도 젊디나 젊은 머슴아가 간도 쓸개도 없이 일본 천왕에게 혈서를 써서 바친 걸 보아라.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대단한 인격자인 것이다. 더구나 그의 조카사위가 염통 떨어진 간물 김종필이가 아닌가. 일본과 미국이 공통으로 울궈먹을 최적의 인격체들인 것이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창 살판이 난 것이다.
  제 분수도 모르고 까불다가 미국한테 원자폭탄 두 개를 얻어맞았다. 
 이제 다 죽었다 싶었는데. 맥아더 어른께서 대일본제국 최고의 게이샤 몇 명을 밤마다 바꾸어 맛을 보시고는 대 은전을 베푸신 것이다.
  일본의 은인으로 추앙이 될 만큼 일본 전후 재건에 그야말로 후한 인심을 베풀었던 것이다.
  특히나 6.25 조선전쟁을 유발하여 일본열도가 후방 군수창 역할을 하도록 배려를 했다. 죽기는 조선 사람이 죽고 피는 조선인이 흘렸는데 이를 기회로 일본은 돈을 벌었다. 나라 땅덩어리는 조선나라가 찢어지고 갈라졌는데 바다 건너 일본은 전쟁불구경 잘하고 군수품을 팔아서 딸라를 긁어모았다.
  경제동물이란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딸라를 갈퀴로 긁듯 부를 축적한 것이다.
  왜인들이 메이지 유신이후 하늘처럼 선망을 하고 그들의 근대화 군국화의 롤모델이었던 대영제국(大英帝國)을 젖히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일본인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기적에 기적을 연출해 낸 것이다.
  딸라벌이로 넙치사시미에 우나기(뱀장어)구이로 뱃가죽에 기름이 올랐다.
  자연 계집 생각에 관광놀이가 선호되었다.
  때마침 남조선에는 친일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일본인의 남조선 방문을 쌍수를 들어 대환영이었다. GI를 상대로 쌕쓰산업에서 재미를 본 일본자본이 물밀 듯이 남조선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지금 남조선에선 ‘현지처’(現地妻)라는 말이 유행이다.
  일인 사업가들이 남조선 여자를 첩으로 두고 현해탄을 오가며 즐기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치욕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치욕이었다.
  강욱철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왜놈들은 아랫도리옷이 없었다. 훈도시(걸레)하나를 차고 다녔다.
  강욱철은 일제강점기 걸레쪽 하나를 찬 왜놈들의 그림을 보고 구역질이 났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이었다. 옛날 옛적 삼한시대부터 왜구가 훈도시 하나만 차고 노략질을 일삼았었다. 키 작은 때도둑, 왜구라는 말이 이에서 유래한다. 살인 방화 분탕질은 기본이고 유부녀 겁탈이 성행했었다. 이 버릇은 임진왜란 때에도 성행을 해서 남쪽 바닷가 사투리엔 씹겁했다는 말이 있다. 아주 혼이 났다는 뜻이다. 임진년 이후 유행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때에도 7년 동안이나 그렇게 당했었다.

▲ 불암산
▲ 불암산

  “자아- 오늘 내가 풍덩풍덩하게 인심 써부렀응께, 허리끈 풀어놓고들 잡수시더라고잉!”
  성격이 불같은 고충석동지, 구레나룻이 꼭 산적을 닮았다.
  “어매 고동지, 참말로 고맙구만잉! 믄 돈이 그렇코 많아서 이렇코 텀턱시럽게 돈을 써부렀을까이?”
  “아니 그렁께 말이여 으디서 눈 먼 돈 한 뭉치 건졌는 갑이여...”
   담력 빼버리면 시체가 되는 곽세정 동지, 팔뚝만한 닭다리를 번쩍 뜯어 들고 좌중을 웃겼다. 그의 머리는 빡빡 깎은 중머리였다.
  이에 뒤질세라 키가 머쓱하게 큰 김중기 동지가 한 마디 거들었다.
  “허헛, 사람들... 걱정도 팔자구망! 많이 먹으락해도 시비가 많구마잉!”
  “참 사람도, 으리읎네이. 내가 고동지 걱정 안허믄 누가 헐 것이여?”
  역시 곽세정 동지다.
  농담은 질펀하게 해도 빡빡 깎은 머리하며 단단한 체구에 어딘가 모르게 그 특유의 담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허허잇 참. 내가 누구여 응? 이 천하의 고충석이가 내가 내 돈 쓰겄능가? 어저께 밤에 윤창현 동지께서 눈 먼 봉을 만나서 한 그물 떴었당께 그러네... 새벽부터 이 닭 삶느라고 수고 많이 하신 윤 동지 사모님께 우리 박수 한 번 치더라고...“
  과연 고충석은 고충석이었다.
  화끈하고 시원스런 머슴아다.
  그는 스스로 지리산 유격대의 맹장 ‘맹봉사령’(猛鋒司令)의 사촌 처남이라고 우스개를 했었다.
  그는 윤창현 동지와 함께 손발이 척척 맞았다.
  오늘 스물일곱명의 동지들이 약속한 시간 지정된 장소에 이렇게 모인 것도 그의 신속정확을 기하는 일습관의 결과였던 것이다.
  불암산 서북쪽 해발 4백여 미터 지점 인적이 드물었다.
  산 아래로는 별내천 구릉지를 따라 촌락과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농촌 사람들이라 산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방으로 시야가 터진 자리에 앉아 외고 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천하 세상 돌아가는 것은 익히 다 아는 바였다.
  강욱철이 중점을 두고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활동 강도를 높이는데 대한 행동요령이었다.
  이 논의는 앞서 김승국 동지와 충분하게 협의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운동단계 활동으로는 현 시국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못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바 있었다. 상황은 대변혁 일대 사변을 요구하는데 미온적인 운동단계의 수단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단계의 파장이나 충격으로는 현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때려 부수겠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뒤집어엎겠다는 사람들이 취할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찻잔을 뒤집어엎어서 뙈기질을 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깨부수는 것이다. 뒤집어엎는 일 말이다.
  오늘 자리를 같이한 성원들은 대부분이 강철파여서 강욱철보다도 어느 의미에서 강도가 더 높았다. 
  고충석이나 윤창현 곽세정 김중기 동지들은 그 중에서도 초 강철파에 속했다.
  오늘 유일하게 꼬장꼬장한 논조로 강도를 조절 성원들의 목소리를 낮추게 한 사람은 하백만 동지였다.
  하백만 동지는 다음 모임을 위해서 사월패쪽에서 일부러 참석을 부탁했었다. 일을 할려면 무엇보다 동지애가 있어야 하고 서로 애정과 친화가 중요했다. 사월패, 불암당의 넝마병단, 딲어병단 사이의 친화를 위해도 하백만 동지의 참석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하백만은 여러 가지로 시달리는 중에도 고등고시에 응시 1차 2차에 모두 합격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원조회에서 부적격자로 판정이나 실업자가 되었다. 마침 그는 제2외국어를 영어 다음 독일어를 택했었는데 종로에 있는 학원에서 독일어 강사로 몇 푼씩 용돈을 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여러 동지들로부터 위로의 박수를 받았다.
  재주를 두고도 썩는데 대한 보상의 박수였던 것이다.
  스물일곱 명의 동지들,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하고 미더웠지만 일 내용을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다 떠벌릴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창현, 고충석, 곽세정과는 따로 자리를 했었다. 이들은 일이 시작되면 제1차로 행동에 들어갈 사람들이다.
  윤창현은 어느 일을 맡겨도 완벽하게 책임을 완수할 능력이 있다.
 대학물은 먹지 않았지만 읽은 것이 많아서 눈과 도량이 있었다.
  사물을 객관화할 수 있고 분석이 빨랐다. 자갈밭에 내놓아도 그는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어젯밤에도 시청 앞 인도 씨멘트 바닥에서 ‘판넬그림’을 팔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고향이 같은 제주여자로 남편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순발력이 있는 여자였다.
  윤창현은 강욱철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해주는 동지였다.
  형제애를 갖고 있었다.
  그와 강욱철이 만난 것은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다.
  윤창현을 만나던 날 밤 강욱철은 안암골 호랑이 대학 학군단출신 안국광과 만나고 있었다. 안국광 대위 역시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 맹활약을 한 청솔동지회 회원이었다.
  그때 멤버들은 모두 대학을 떠났는데, 졸업 후에도 그대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청솔동지회란 이름은 그대로 재학생들에게 주고,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老松會’ 란 이름을 쓰고 있었다. 푸른 솔이 늙었으니 老松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난 끼가 묻어 있는데도 그대로 불렸었다. 
  한일협정 반대, 한일협정 무효화 투쟁시절 안국광과는 이따금 만나 막걸리로 갈증을 풀었었다.
  명동 뒷골목에 공사정지가 된 삘딩이 있었다.
  씨멘트 골조가 도깨집처럼 엉성하게 서 있었다. 그 건물 지하에는 정리가 안 된 씨멘트 덩어리가 바닥에 붙어 있고 브로크 조각이 흩어져 딩굴고 있었다.
  그 술집의 이름은 ‘아방궁’ 이었다.
  어떤 머리 좋은 장사꾼이 아주 역설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게 효과가 있었던지, 밤이 되면 손님이 바글바글 끓었다. 술값이 쌌기 때문에 주로 하루벌이 노동자, 돈 없는 학생 찌꺼기들이 모여들었다.
  먼지인지 담배연기인지 구별이 안 되게 지하실이 온통 뿌연 안개 속에 덮여 있었다. 
  술꾼들의 잡담소리에 옆 사람과의 말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막걸리 한됫병에 된장 한 접시, 반뼘 짜리 오이 한토막이 일금 50원이었다. 요금은 일체 선금 지불이었다.
  강욱철과 안국광이 한일회담반대데모 때 이따금 갈증을 풀던 곳이다.
  그동안 세월이 갔었고 주인이 바뀌었는지, 아방궁이 ‘아리랑’으로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바닥이 깨끗해지고 제법 청소정리가 되어 있었다.
  지난 번 휴가 때 만나고 오랜만에 만났던 것이다.
  강욱철이 장난 삼아서 안국광 대위에게 별호 하나를 지어 주었다. 안국광 대위의 모교인 고려대학의 상징은 호랑이였다. 이 대학에는 반정부 써클 호골회(虎骨會)가 있었는데 안국광 대위는 재학시절 이 써클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호를 수컷호랑이(雄虎)라 지었는데 그것이 점잖지 못하다 하여 사내호랑이 호랑(虎郞)으로 확정을 했었다. 장군이 되었을 때는 다시 웅호장군으로 바꾸어 부른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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