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8
“반찬이 많이 모자라구 젓가락도 더 필요해.”
“그렇지 모자라구 말구, 지금 준비 중이야. 대광리 포천 소매상에서 물건 대금 올라올 때가 되었는데 말야.”
국수장수 오대영은 육군중위 출신이다.
R.O.T.C 1기인데 장기복무를 그만 두고 중위로 옷을 벗었다.
학군단 출신이어서 어지간한데 취직이 가능했지만 그냥 자유롭게 살기로 작정을 했었다. 사람들이 오고가고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살 비비고 땀 냄새 풍기는 시장바닥이 더 살맛이 나는 것이다.
그는 산골도 산골 사람 살기 어려운 곳에서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무작정 상경한 산골 촌놈이었다.
그렇지만 죽으라는 운수는 아니어서 운이 좋게 야간 고등학교에 적을 둘 수 있었다. 타고난 암기력으로 대학은 장학생 졸업이었다.
여자복도 남달라서 국수가게 건물주의 딸이 그의 아내다. 홍은동 시장 십여 개의 점포가 그의 장인영감 소유인 것이다.
유명대학을 나온 장교 출신이지만 웃통을 벗어젖히고 시장바닥 장사에 맨주먹으로 도전장을 냈었다. 성실과 투지가 대단했다. 대개 암기력 좋은 수재들의 체력이 허약하고 심기도 허약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대영의 경우 달랐다. 단단하게 생긴 체구에 동작이 빠르고 쫙 벌어진 어깨와 팔뚝에는 힘이 있었다.
이런 오대영을 보고 자수성가한 장인영감이 감동을 먹은 것이다. 일등 사윗감으로 점을 찍었던 것이다.
오대영은 국수장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김장철에는 김장 무 배추 장사도 크게 벌인다. 여름철에는 수박장사도 차떼기로 싸구려를 부르는 것이다. 시장 건물 밖 통로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손님을 부른다. 박리다매가 그의 장사신조다. 장사꾼은 우선 돈을 돌려야한다는 것이다.
제 팔 다리에 힘이 있을 제, 다른 사람 한번 뛸 때 자기는 두 번 뛰면 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오대영은 용두동 땅굴 거지대장 유대원 동지의 이웃 땅굴 출신이었다.
경상도에서 함양산청하면, 함경도의 삼수갑산 무산철산에 비유되었다.
산청에서도 지리산 최상봉 천왕봉 바로 앞에 써래봉이 있고 그 아랜 무재치폭포가 있다. 이 골짜기야말로 산골중의 산골이었다.
이 깊고 깊은 골짜기에 옛날 지리산 포수가 하룻밤 쉬고 가는 한밭골 안장당 마을이 있었다. 육군 중위출신 오대영의 고향마을이었다.
지리산 호랭이 넋이 환생을 했는지 산골 멧돼지 생활로는 소년 오대영에겐 성에 차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멧돼지 생활을 하던 오대영은 열 다섯살되던 해 봄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집에서 키우던 씨암탉 한 마리를 안고 나와 산청읍내 장터에서 종이돈 몇 닢과 바꾸었다.
시골서 서울로 식모살이 가는 촌 아지매들 치맛자락을 헤집고 의자 밑에 숨거나 변소 똥통에 앉아 똥을 싸는 척 검표원을 따돌리고 서울역에 내렸다.
운 좋게도 신문팔이 왕초한테 걸려들어 신문팔이가 되었다.
“신문이요, 신문! 내일 아침 경향신문 있어요!”
이렇게 외쳐대며 신나게 뛰어다니며 신문을 팔았다.
그는 마음 좋은 왕초를 만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중학과정을 대강 강의록(通信講義錄) 몇 권으로 때우고 3년 동안 푼돈을 모아 야간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말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유명대학 특대 장학생으로 선발이 되자, 용두동 땅굴동네에선 땅굴에서 용 났다고 모두 탄성을 질렀었다. 이땐 그는 이미 신문팔이 왕초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학교를 마치고 ROTC장교로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용두동 땅굴생활을 그대로 했었다.
![▲ 박정희가 6·3한일회담반대 운동을 비롯한 국민의 반대 속에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필터처리]](/news/photo/202012/11171_23294_1243.png)
그는 전역 후 유대원의 안내로 청솔동지회 회원이 되었었다.
유대원 동지와 함께 강욱철이 기대하는 튼실한 기둥이었었다.
“요즘 쪽발이들 기생관광이 도를 넘었어. 관광이 아니고 순전히 매춘무역이야. 이놈들이 우리 농촌처녀들을 제국시대 정신대로 아는 모양이야... 마구 싸구려로 성(性)을 팔아먹는단 말야.”
“그러니까 유럽에선 왜놈들을 쌕쓰에너멜이란다잖아. 순 아버지 할배뻘 되는 왜놈 농사꾼들한테 열여덟, 열아홉, 스무살짜리 우리 처녀들을 붙여 준다는 거야. 스물 두 살만 되어도 늙었다고 퇴짜를 놓는 판이라는 거야.”
“이 새끼들을 어째야 좋아?”
아까 이들이 서두에 의논하던 ‘반찬’ 과 ‘젓가락’은 총알과 소총을 가리킨다. 국수 소매상들이 있는 지명은 오대영이 현역으로 있을 때의 근무지였다. 거기 연고지에 부탁한 물건들이 곧 올라올 것 같다는 말인 것이다.
대화속의 이놈들이나 이 새끼들은 박정희 일당을 말한다.
박정희 군사도당은 경제개발이니,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니를 계속 떠벌리고, 조국근대화니, 경제재건이니, 중진국이니, 하는 선전 나발을 불어 댄다.
매국적 굴욕외교로 3억딸라의 ‘독립축하금’ 명목의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왔다. 36년 국권강탈, 강제점령, 징용징병 강제동원 자원수탈 등에 대한 청구권 배상이 아니었다. 경제발전기금 경제협력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아온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전승국 자격으로 배상금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조선 독립군으로 대표되는 독립투쟁유격대를 비롯 수많은 독립투사, 독립전사,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간도지방의 양민학살을 비롯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죽이고, 고문 투옥에 대한 배상은 무시되었다.
해양주권선(평화선)이 폐지되고 40해리 어로전관수역이 12해리로 축소되었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주권과 차별대우 문제는 일본의 처분에 맡기고 말았다. 수많은 수탈문화재가 모두 일본 소유로 넘어가 버렸다.
이런 매국적 협약의 댓가로 받아온 더러운 돈으로 언 발에 오줌 싸기식 처방을 하였으나 국민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독도 문제를 위시한 해양영토를 헐값에 팔고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 겨레 혼을 망각한 치욕적인 매국협약을 맺었다.
물론 군사정권에 대한 종주국 미국의 거센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나라의 장래 자손만대의 미래를 위해 할 일이 있고 안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영토문제나 주권문제는 함부로 외교 문서에 도장을 찍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두고두고 민족역사에 매국역적으로 영원토록 회자(膾炙)될 것이다.
이런 무서운 역사범죄를 저지르고도 모자라 자라나는 농촌 소녀들의 정조를 미끼로 일본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반도의 전쟁특수로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넘쳐나는 딸라로 지난 64년 동경 올림픽을 치르고 전쟁피해국의 위치를 완전히 탈피한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넘쳐나는 딸라로 일본인들은 경제부국을 구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엔화(円貨) 몇 장을 들고 남조선 숫처녀 사냥을 나선 것이다.
왜인들의 남조선 숫처녀 매춘관광은 도를 넘어 남녘 전국토를 헤집고 다니며 무차별 성 착취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도심은 말할 것도 없고 남조선 천지가 호텔과 여관이었다. 대도시의 번화가엔 거대한 호텔들이 자리 잡고 시가지의 골목골목엔 여관들이 성업 중이었다. 호텔과 여관 주변의 식당 음식점들은 쎅쓰관광으로 허기진 일인들의 배를 채워 주는 음식영업이 번창 일로에 있었다.
시커먼 왜놈 무지랭이 농사꾼들이 살판이 났다.
엔화 몇 푼을 뿌리면 열여덟 열아홉 꽃다운 남조선 처녀들이 줄을 섰다. 목욕을 시켜주고 발을 씻어주는 황제대우에 갓 피어나는 열여덟 열아홉의 처녀 몸이 제공되는 것이다.
꿈같은 밤이 지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고급 죠오센 요리가 그들을 기다린다.
이것은 관광이 아니었다.
국제 매춘이었다. 민족 혼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박정희는 경제 불황을 타개하려고 버둥거렸다. 이것은 그들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은폐하고 흥청망청 써대는 불법 정치자금과 그들의 고급요정에 뿌리는 유흥비를 조달하기 위한 음모이고 야비한 술수였다.
이런 ‘기생관광’ 의 원조는 저들 일본이었다.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일본 경제는 황폐화 되고 일본인들은 도탄에 빠져 거리를 유랑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가 은혜를 베풀어 일본 여성들의 밑천을 팔아 딸라를 벌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GI들의 외출 외박 휴가를 대량으로 허가했다.
이거 기회로라. 배가 고픈 일본 여성들이 GI에게 추파를 보내며 기모노 자락을 훌렁훌렁 걷어 올렸다.
일본 정부는 이런 매춘딸라 덕택에 한시름 놓았었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터지기 전 몇 년 동안 일본 경제의 주 외화 수입원이 바로 GI를 상대로 한 일본 여성들의 밑천팔기였던 것이다.
이 선험적 특수 전략을 일본외상 오히라가 김종필에게 전수했다.
이 경험을 전수받은 김종필은 일본 외상 오히라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의 염을 금치 못했다.
귀국 즉시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이 전략을 보고했고, 박정희는 무릎을 치고 탄성을 질렀다. 역시 일본 어른들은 자기를 살리는 은인이고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기쁨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후 남조선의 일본인 상대 기생관광은 중앙정보부의 주도하에 적극 추진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해내야 할 터인데...”
“오동지의 일이 막중하지. 되도록 침착하게...”
오대영의 분노는 강욱철보다 더 했다.
“오동지가 장기복무를 했으면 문제가 좀 달라졌겠지.”
“글쎄 말이야, 그땐 유대원 동지가 그런 차원까진 말을 않더라고...”
“아마 그땐 지금처럼 절박하게 느끼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나도 그땐 망서림이 많았고 또 사회 환경도 침체해 있었거든. 계엄령, 위수령, 계속 때리니까 정신을 가다듬기가 힘들었었지...”
“나 역시 현역 땐 옆이나 위를 보기 힘들더라고. 그렇게 핑핑 돌아가게 만들어. 그러고 또... 해방 후 너무 쎄게 짓밟혔잖아? 그런데다 코쟁이까지 몰려든 대량전쟁으로 너무 정신없이 당해서 모두 겁을 먹었을 것 같애.”
“현역 말이 났으니 말인데. 육해공 사관학교 강의실에서 머슴아들 불알 다 까버리고, 반공 영양주사 한대씩 쑤셔서 전선에 내보내니 그것들이 뭘 하겠어? 대갈통이 흐리멍텅할 밖에...”
“...”
“해방공간 여순 봉기 밖에 더 있어? 어떻게 된 게 전쟁 후엔 다 얼이 빠졌어, 현역이 총 들고 기어 나온 게 한 껀도 없잖아. 닭이 천마리면 봉이 한마리라는데, 조선 머슴아 70만명이 모였는데... 장교라는 것들이 다 썩은 동태눈깔이야.”
“...”
오대영은 말이 없었다.
꼭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오대영은 신문팔이 신분으로 4.19를 맞았었다.
이미 왕초가 된 대학생의 몸이었지만 왕초도 신문팔이는 신문팔이였다.
신문사에서 조간이나 석간으로 우선 가판을 찍어 왕초인 오대영에게 뭉텅이로 넘겨준다. 이것을 몇 십 부씩 갈라서 뛸피리(신문팔이 소년)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오대영은 그의 본색이 신문팔이라는 걸 잊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4.19 때에도 대학생 대열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는 쑤세미 머리에 다 떨어진 헐렁한 작업복을 걸친 신문팔이 소년들과 같이 어울렸었다. 그들과 함께 뛰어다니고 돌멩이도 던지고, 소리소리 지르며 구호를 외쳤었다.
그는 신문팔이 소년들에게 섭섭함을 줄까봐 학교 뺏지를 달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서울역에 처음 내렸을 때 천지분간을 못하고 헤매이다가 왕초형님한테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신문을 팔았었는데 왕초형님이 그때 자신을 ‘뛸피리’ 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오대영은 언제나 자신의 본색이 변함없는 뛸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혁명의 거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가지 경찰과 맞서다가 총탄에 쓰러진 뛸피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전쟁고아 출신들이었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그는 수유리 혁명묘지 무명전사의 묘역을 찾는다. 부모도 형제도 연고자가 없는 이름 없는 혁명전사의 묘역.
열 서너 살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들의 삶이 애처롭다.
살아서도 제대로 차린 따뜻한 밥 한끼 얻어먹을 수 없었던 그들, 죽어서도 묘지 맨 뒷자리에 누어 있었다.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평등 세상은 없는 것인가?
인간들은 왜 이런 모순을 스스로 만드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부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렸는가.
오대영이 태어난 산청 삼장면은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의 고향이다.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지리산에서 죽었는가.
사월전사 강욱철은 오천년 래의 대혁명인 동학혁명 때에도 약 50만 명의 조선 젊은이가 토벌을 당했다고 원통해 했었다.
여름날 지리산 천왕봉에 소낙비 내리고 천둥번개가 불 칼을 휘둘러대면, 써래봉 릉선에서 전쟁 때 총 맞아죽은 빨치산들의 호곡성(號哭聲)이 산을 울린다.
차가운 겨울 날 임걸령 질매재에 눈보라치면 피아골에서 불무장등 릉선 넘어 촛대봉 잔돌핑이(세석평전)로 넘어오는 소리가 있었다.
남원 산내면 뱀사골 옛 주막 터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있었다.
의기의 청년장군 김지회장군 혈곡성(血哭聲)은 영원산 삼각산 릉선으로 달아올라 바람폭포, 한신폭포, 내린폭포. 일곱 개의 폭포소리 모두 아울러 단숨에 제석봉 천왕봉을 넘는다.
내 조국은 둘이 아니었노라고...
내 조국은 본래가 하나였노라고...
아 우뢰처럼 더 큰 소리가 지리산을 들고 다닌다. 더 큰 목소리가 땅을 흔들고 하늘을 흔든다. 지리산의 어깨뼈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아래 큰 숲 우거진 골짜기에서 이현상 선생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흔든다.
일본 놈도 가고 미국 놈도 가라고!
이 땅은 신성한 조선민족의 땅이니, 쪽발이도 가고 양키 털발들도 모두 나가라고! 안 나가면 당장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산청 삼장면은 곧 바로 이런 소리가 울려대는 고장이었다.
오대영이 어렸을 적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면 동족상잔의 상처들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서 누어서 죽은 시체들. 백골만 남은 그들의 눈에 조국의 하늘은 과연 무슨 빛깔이었을까.
오대영의 늙은 홀어머니는 숨이 멎는 순간까지 산으로 간 남편을 기달렸었다.
이현상부대가 안장당 마을 건너편 홍계리 웅석봉 아래 진을 쳤을 때 남편은 숨겨두었던 장총 한 자루를 찾아들고 집을 나섰다. 전쟁 전부터 연줄이 있는 키도 크고 성질이 호탕한 남부군 제3지대 박종하장군을 찾아간다는 말을 남겼었다.
“강동지 몸 추스려 일 생각 해야지...”
오대영은 가게 밖 캄캄한 골목길까지 따라 나섰다.
그리곤 뿌리치는 강욱철의 옷소매를 붙잡고 그의 옷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구겨진 지폐 몇 장이었다.
몸이 안좋아 보이는데 약이라도 사 먹으라는 것이다.
“오동지. 서둘러... 그리고 침착...”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