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7

  몸을 쉬어주기 위해 어제는 집에 있었다.
  오늘은 늦게 국수 빼는 집 오대영을 만날 계획이었다.
  국수를 삶아서 파는 집이 아니고 밀가루 반죽으로 국수를 빼서 다발다발 묶어서 도매로 파는 집이었다.
  그러니 낮에는 국수도 빼야 하고 국숫발을 치렁치렁 작수발에 널어 말리기도 해야 했다. 또 국수다발을 뭉텅이로 사러오는 손님들한테 도매나 소매를 해야했다.
  낮에는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오대영을 만나려면 오후 늦은 시간이나 밤시간이 좋은 것이다.
  해가 질 무렵 강욱철이 집을 나서려는데 동두천에서 이한숙이가 찾아왔다.
  강욱철이 반길 리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이한숙이는 강욱철의 그런 표정을 보며 콧등을 말아 올려 쓴 웃음을 웃고 마는 것이다.
   이한숙이는 강욱철의 국민학교 동기생이다.
   학교에서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장난질도 많이 쳤었다.
 6학년 졸업 후엔 강욱철은 고향을 멀리 떠나 도회지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강욱철과 다른 항구도시에서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1,2 학년 때 까진 방학이 되면 고향을 찾았었고 여중학교 교복을 입은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시골 아이답잖게 피부가 고운편이었다.
  국민학교 때는 싸움질도 많이 하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고무줄놀이를 훼방을 놓기도 했었다. 커다란 네모 칸에 작은 네모를 여러 개 그려 놓고 납작한 돌덩이를 까치발로 밀고 다니는 여자애들 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를 못하게 여자애들이 까치발로 밀고 다니는 납작 돌을 멀리 주어 던져버리기도 했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한숙이 쪽에서 먼저 내외를 했다. 여자애들이라 조숙해서 그러리라고 짐작을 했었다. 강욱철 역시 좀 멋쩍기도 하고 그래서 먼저 말을 걸기도 그랬었다.

  강욱철의 기억에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그녀 아버지가 경영하던 면소재지 도정공장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 후로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로버트는 본국 휴가야.”
  알고 싶지도 않고 묻고 싶지도 않은 말을 그녀가 혼잣말처럼 짓거렸다.
  로버트라는 녀석은 이한숙이보다 세 살이나 밑인 검둥이 미군상사를 말한다.
 그녀는 되도록 로버트란 이름을 쓰지 않고, 그애, 또는 먹대, 아니면 싸진 이라 불렀다. 그녀 말마따나 이번 먹대가 처음이 아니고 로버트를 만나기 전 코가 우랑우탄처럼 뭉툭하고 코끼리처럼 덩치가 큰 먹대(마이클)와도 살았었다.
  마이클과의 사이에는 얼굴색이 사정없이 전혀 한밤중인 딸아이가 있었는데, 홀트  시설에 맡겨야 했었다.
  마이클이 그녀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 고향 엘리바마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수술을 받았다.
  “나더러 어쩌라고?”
  강욱철의 표정이 그녀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그녀는 말과 달리 보통 표정이었다. 늘 살고 있는 일상처럼 행동도 그렇게 했다. 잠깐 시장 보러 나갔다온 여편네처럼...
  강욱철은 기가 막혔다.
  할 말이 없었다. 그녀와 이렇게 지낸 지가 일이년이 아니다. 그녀가 이렇게 왔다가 동두천으로 돌아갈 때까지 강욱철은 말 중치가 막혀 있었다.

  65년 5월 22일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로도 비준반대, 비준저지, 비준무효화 투쟁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데모주동 학생 검거선풍이 불었다. 강욱철은 재빠르게 영등포로 몸을 숨겨 저들의 검거망에 걸려들지 않았었다.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한다하는 농사꾼이 되어 김포공항으로 빠지는 염창들판에서 그해 여름을 보냈었다. 비상계엄령이 끝나고 시국이 조용해지기까지 인쇄소 이준범 사장의 처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 집 아들들이 키우는 젖양(젖염소) 사료 채집에 열심이었다.
  해가 바뀌고 대학들이 새 학기를 맞았지만 대학 캠퍼스는 여전히 불안하고 뒤숭숭했다. 
  사월혁명 뒷마당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의 민족자주통일 광장을 주도했었던 서울대학의 ‘민족통일연맹’의 혈맥은 연면했다. ‘민족자주사상연구회’가 계속 학생시위의 자양(慈養)을 공급했다.
  펄펄 끓는 민족혼이 불타오르는 안암골 호랑이대학 캠퍼스는 사월혁명 이후 대학생 시위의 발원지이고 활화산이었다. 군사팟쇼도당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바로 이 대학이었다. 
  5년 전 4월 18일, 머릿수건을 질끈질끈 동여매고 어깨동무로 스크람을 짜고 한달음에 내달려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했다.
  3천 고대생, 대학생 시위의 선봉을 달렸던 젊은 사자들이었다.
  위수령 계엄령이 내리면 맨 먼저 공수부대나 특수전부대가 땡크를 몰고 이 대학에 진주 대학 정문을 봉쇄한다.
  강욱철의 장안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군사정권과 외세의 경제침략에 대한 저항의식이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의식이 있는 젊은 지성들은 외세의 노골적인 신 식민지배 정책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장안대학에는 전국최고의 수재들이 모인 농축산대학이 있었다.
  등록금 전액 면제 기숙사제공 숙식이 무료였다. 피폐한 농촌 그 중에서도 낙농 분야가 가장 낙후되어 있었다. 인재양성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수재중의 수재를 선발 대학 졸업 후 낙농선진국인 스위스 덴마크 등에 유학을 주선하는 특혜를 주고 있었다.
  이 대학을 중심으로 장안대학 내에도 생각이 깬 학생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단히 반정부적이고 저항의식이 강했다.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본부 앞 잔디광장에선 ‘한일협정 비준무효’ 투쟁 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각 단과대학 강의실 복도엔 여기저기 삐라가 뿌려져 있었다.
  ‘군사팟쇼도당 물러가라!’
  ‘매판자본 몰아내자!’
  ‘정보정치 귀신 정치!’
  ‘미국은 한일 협정 간섭 말라!’
  ‘폭압정치 군사 꾸테타 정권 물러가라!’
  ‘학원에 정보원 출입을 반대한다!’
  수많은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이날 궐기대회에선 김종필이 주장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학생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궐기대회를 치른 다음 날 새벽이었다.
  문짝을 들입다 발로 차대는 소리에 강욱철은 잠이 깨었다.
  잠기지도 않은 문짝을 발로 마구 차대는 것은 상대를 위압하기 위한 이들의 숫법이었다.
  문짝 아래쪽 절반이 박살이 나면서 정보부요원들이 뛰어들었다.
  “잇쌔끼, 너 강욱철 맞지?”
  아직 꼭두새벽이라 방안이 어두웠다. 이들은 후랏쉬를 켜대며 강욱철의 얼굴과 그들이 들고 온 사진을 번갈아 들여다보곤 내의 바람의 강욱철을 마구 을러대는 것이었다.
  “잇쌔끼 이거. 내란 선동자야!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허구, 반정부 음모나 허구... 잇쌔끼. 너 오늘 남산 드라이브야!”
  옆자리에서 잠을 자던 자취동기생 민석구 녀석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녀석은 키가 워낙 작은데다가 얼굴이 둥글고 몸집이 땅땅하기 때문에 정보부 요원들은 금방 강욱철과 구별해 낼 수 있었다.
  학교 구내에 잠입해 있는 기관원들이나 밀정들을 통해 강욱철에 대한 정보, 신체적 특징까지를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강욱철은 그 길로 검정 찦차에 실려 남산행이었다.
  악명높은 남산6국, 강욱철은 일주일 동안 그 건물 지하에 있었다.
  체포영장도 없이 끌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가두어 놓고 제 놈들 입맛대로 사람을 완전히 떡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떡이 아니고 바삭바삭 부수고 짓이겨서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다.
  젊디나 젊은 몸이 두 달 동안 꼼짝을 못하고 누어 있었다. 병원에 갈 돈도 없었지만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여섯 동생들 상급학교 진학길 다 막아놓고 올려 보내는 돈으로 늦은 공부를 하는 주제에, 사실 부모님께 면목도 없었다.
  석 달 만에야 겨우 몸을 추스렸는데, 그동안 학교에서는 자신에게 교수형(敎授刑)이 내려져 있었다. 대학 내에까지 중앙정보부의 촉수가 뻗쳐 있어서 연약한 교수님들이 보이지 않는 눈과 손이 무서워 제자들에게 교수형(絞首刑)을 내리는 게 요즘 대학에서 유행하는 풍조이었다.

▲ 70년대 미국 기지촌 여성들 [사진 : 구와바라 시세이, 눈빛 아카이브 캡처 필터처리 ]
▲ 70년대 미국 기지촌 여성들 [사진 : 구와바라 시세이, 눈빛 아카이브 캡처 필터처리 ]

  강욱철은 분통이 터져 죽을 판이었다.
  이러는 판에 생각지도 않았던 전혀 잊어버리고 지냈던, 문제의 여자 이한숙이가 뜻밖에 꽃묶음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눈부시게 화사한 백합송이에 안개꽃 한 다발을 들고...
  이한숙이는 어렸을 때 얼굴이 너무 예뻤었다.
  입성도 매우 화사하고 단정했었는데, 도시 아이들이나 입는 예쁜 세라복을 자주 입고 있었다. 9백명이 넘는 전교생 중 단 두 사람 밖에 없는 란드셀을 메고 다녔다.
  그 애가 먼저 강욱철을 좋아했었다.
  강욱철은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는데 그 애가 먼저 눈깔사탕도 사주고 무지개색 아름다운 종이꽃도 사다 주었었다.
  한 번은 하얀 유리병에 담긴 노오란 소젖가루를 가져다주었다.
  강욱철은 처음 보는 것이고, 조선에 없는 아주 비싸고 귀한 것이라고 했다. 즈그 아버지 병을 치료하는데 먹는 약이라는 것이었다.
  이것까지는 괜찮았는데 4학년 1학기 때였다.
  구루무 냄새가 펄펄 풍기는 하얀 가제 손수건을 가져다 강욱철의 옷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며칠 있다가 또 편지를 써서 만화책 속에 넣어준 일이 있었다.
  이 편지 때문에 강욱철은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중을 듣고 혼이 난 적이 있었다.
  편지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고 어른스러워서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크게 야단을 쳤었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그만두고 문제가 된 부분은 대강 이렇다.
  밤이면 저 혼자서 공부방에서 잠을 자는데 강욱철과 만나서 같이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강욱철은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장난으로 알고 편지를 아무렇게나 앉은뱅이 책상서랍에 내동이 치듯 넣어두었던 것이다.
  이한숙이가 양공주일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강욱철이 ‘남산 드라이브’를 하고 몸이 다 부서진 상태에서 이제 겨우 죽 대신 밥을 먹고 있는 판이었다. 그날은 햇볕이 너무 좋아 마당귀에 걸어 나가 펌프로 물을 퍼서 얼굴을 씻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강욱철의 소식을 알았는지 국민학교 동창생 이한숙이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야한 옷을 입지도 않았었다. 여자들이 모두 바르는 구찌베니도 바르지 않은 입술이었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차림에 화장을 짙게 하지도 않았었다. 요즘 눈 화장이 유행이어서 젊은 여자들은 눈두덩에 아우세도우를 바르고 속눈섭을 붙이고 다녔었다. 그런 것도 없었다.
  강욱철은 감쪽같이 속은 것이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말이다.
  이한숙이가 처음 찾아온 날 강욱철은 국민학교 여자동창생 고향이 같은 노처녀 친구 이외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려서 마음에 두었던 남자동창생이니까 어떤 기회에 소식을 알게 되어 한번 찾아왔으리란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과년한 여자가 남자인 자신을 무작정 찾아온 것에 대해 좀 묘한 감정이긴 했다.
  강욱철은 지금 옆에 눈을 줄 여지가 없었다.
  명색이 뒤죽박죽된 세상을 한 번 바로잡겠다고 뛰어다니는 젊은이다.
  결혼이니 뭐니, 여자 나부랭이에 정신을 쏟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다. 또 그럴 계제도 아닌 것이다. 늙은 대학생이긴 해도 아직 학생 신분이 아닌가?
  한숙이가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매혹적이라고 해도, 인간에겐 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혼도 있고 얼 넋이 있고 정신 사상도 있다. 몸뚱이만 잘 맞고 정신 서로 생각하는 바가 비끌리면 서로가 비극이다. 물론 어려서 겪은 이한숙이는 성격이 못 됐거나 남자의 말을 어긋지게 거역할 여자는 아니었다. 이지적이진 않아도 심성이  맑고 순진했었다.
  그래도 그때 강욱철의 어머니는 이한숙이네를 몹시 못마땅해 했었다. 도정공장집 사내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얻어가지고 나온 왜녀(倭女)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한숙이 모친은 일제 땐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고 다녔었다는 것이다.
  어린 강욱철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한숙이는 조선아이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일제 때부터 면소재지 도정공장집 며느리가 일본 여자라는 소문이 면내에 쫙 퍼져 있었다. 해방되고는 조선옷을 입고 게다를 신지 않아선지 강욱철은 이한숙이 모친이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신발을 신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한숙이는 지금 보아도 썩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러나 강욱철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그녀를 데리고 살 생각이나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상파악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지난 일을 자세하게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강욱철 역시 꼬치꼬치 파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녀로선 그냥 오랜만에 강욱철을 만나게 된 것을 우선 반길 뿐이었다.
  지난 일 과거지사, 떳떳지도 못한데 시시콜콜이 밝히기가 그랬다.
  강욱철이 묻지도 않는데, 내가 양공주요 하고 자랑을 할 것인가.
  그녀는 생각하면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죽는 것 외에 강욱철 앞에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강욱철이 만약 그녀가 양갈보라는 걸 알게 되면 과연 그녀를 어떻게 대할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한숙이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강욱철에게 자신이 양갈보라는 걸 알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훨씬 편한 선택이었다.
  한숙이네가 도정공장을 처음 시작한 것은 그녀의 할아버지 때였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이태 전 그녀의 할아버지는 잠시 면장직에 있었다.
 크고 작은 산이 많은 지방이라 면 소재지에서 한시오리쯤 떨어진 곳에 금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광산 전문가 일본인 하세가와가 발견한 금광(金鑛)이었다.
  한숙이 할아버지는 면장을 하기 전 하세가와 광산에서 인부들을 부리는 십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광산사장 덕분에 단지 일본 말을 잘 한다는 명분 때문에 졸지에 면장 벼슬을 꾀어 찰 수가 있었다.
  그러나 원체 배운 것이 없어서 겨우 2년을 채우고 스스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새로 바다를 막아 광활한 간척지에서 엄청난 량의 미곡이 생산되고 있었다. 공출미(供出米)를 도정할 정부도정공이 필요했다. 국가 량곡 정미소여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모두가 다 일본인 광산주 하세가와 사장이 베푼 은혜였다.
  소재지 도정공장 집 외아들인 한숙이 부친은 몇 안 되는 동경유학생으로 군내에서 이름을 날렸다.
  허우대가 멀쩡하고 씀씀이가 손이 커서 일본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소문에 의하면 한숙이 모친도 일본 기녀(妓女)출신이라는 것이다.
  한숙이 아버지는 여자에 빠져서 학업을 중도폐지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도 여자 편력은 그대로 버릇이 되었다. 여자 편력이 너무 심해서 폐병까지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숙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도정공장 주인 영감이 세상을 떠났다.
  때를 만난 한숙이 아버지는 물방개처럼 생긴 자가용 (독일제 폴크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남은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돈다발이 노적처럼 쌓여 있어도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땅도 집도 공장도 모두 다 날아갔다.
  마지막 남은 재산을 수습하여 서울살이를 시작했는데 이것도 여의치 않아 의정부에 있다가 동두천까지 밀려난 것이었다.

  한숙이는 홀홀 단신이었다.
  그녀의 모친 일본인 기녀출신 기요꼬는 몇 년 전 남편 병 간호로 조선인 남편과 똑같은 지병을 얻어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한숙이가 이렇게 강욱철에게 집착하는 것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린 날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 알고 있어. 너무 재촉하지 마.”
  한숙이는 풀리지 않는 강욱철의 표정을 보며 혼자서 중얼걸이는 말이었다.
  그동안 강욱철을 만날 때마다 수도 없이 혼자서 짓거리는 말이었다. 강욱철의 풀리지 않는 표정에서 한숙이는 늘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어서 없어져야 한다는, 어서 세상을 그만 두고 가라는 암시이고 강요였다.
  한숙이는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강욱철이 홍은동 시장으로 오대영을 만나러 갈려고 집을 나서는데 불쑥 찾아온 한숙이, 그녀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잠깐 나가서 시장보고 들어온 여편네 같았다. 이웃집 마실이라도 갔다 온 여자 같았었다.
  그녀는 지금도 자기가 양갈보라고 털어놨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강욱철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대문에 있는 인쇄소에 밥자릴 얻어 봉원동 판잣집으로 집을 옮긴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한숙이는 남의 말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지난날을 털어놓았었다. 감정을 넣을 래야 넣을 감정도 없었지만 감정을 끼워 넣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고 감정을 넣지 않은 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한숙이의 지난 얘기를 듣고 있는 강욱철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강욱철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충격도 어지간해야 표정에 오르지, 이것은 충격이 아니었다. 감정이 멎고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증발을 해버린 것이다. 머릿통 속이 하얗게 바래 버렸는데 뭐가 움직일 건덕지가 없었다.
  그날 이후 한숙이도 그대로 살고 강욱철도 표정이 멎은 채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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