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7)

▲ '부정선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67년 6월 9일자 1면 기사 ⓒ 동아일보(왼쪽), 투개표 중의 부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자 기사(오른쪽)
▲ '부정선거'를 보도한 '동아일보' 67년 6월 9일자 1면 기사 ⓒ 동아일보(왼쪽), 투개표 중의 부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자 기사(오른쪽)

1. 6.8 막걸리, 고무신 선거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은 <6.8부정선거>, <막걸리, 고무신 선거>로 악명이 높았다. 이미 5월 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115만표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된 상태였다. 이제 장기집권을 위해서 3선개헌을 해야 했고, 공화당이 2/3 개헌선을 넘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선거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박정희를 필두로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개발을 약속하고 실질적 지원유세에 나섰다.
사실상 공화당 선거조직이었던 계나 친목회들은 1년 전부터 관광행사를 조직했고, 공화당 연락사무소에는 항상 막걸리통과 소주병이 놓여있었다. 경찰서장과 군수, 구청장은 직접 선거운동에 참여하여 동장과 경찰들에게 현금, 쌀, 밀가루를 나눠주며 살포를 지시했다.

선거 당일은 금권, 관권, 폭력선거가 난무했다. 부정선거에는 지방선거관리위원장까지 합세했다. 유권자들이 공화당 당원이나 공무원에게 여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보인 다음에야 투표함에 넣는 공개투표가 발각되기도 하고, 괴한이 투표소에 난입하여 야당 참관인을 몰아내고 투표함에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 더미를 쏟아붓기도 했다. 야당 참관인은 항의하다가 공화당원에게 폭행당하고 쫓겨났고, 개표시 야당 참관인 없이 진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경찰들은 구경만 했고, 개표과정에서는 야당표를 무효로 만들기 위한 피아노표*, 빈대표* 등도 무더기로 나왔다.

* 피아노표 : 이미 기표된 용지에 누가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반점을 찍어 무효로 만든 표
* 빈대표 : 기표된 붓 뚜껑의 동그라미를 문질러내어 무효로 만든 표

김종필이 100석도 어렵다고 예측한 선거에서 공화당 130석(지역구 103명, 전국구 27명), 신민당 44석(지역구 27명, 대중당 1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공화당이 74%를 장악하여 개헌선을 훌쩍 넘은 것이다.

엄청난 부정선거 결과에 공화당도 당황했다. 야당은 ‘3·15정부통령선거보다 더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선거무효’,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며 등원을 거부했고, 선거소송은 131개 선거구에서 266건이나 발생했다. 공화당은 "타락되고 혼탁한 분위기의 선거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고 인정하고, 화성 지역구 당선을 신민당으로 돌리고, 보성 등 8개 지역구 당선자와 7개 지구당 위원장을 당에서 제명하는 조치로 방어에 나섰다. 

▲ 6.8부정선거 규탄투쟁
▲ 6.8부정선거 규탄투쟁

그러나 학생들의 부정선거투쟁은 멈추지 않고 더욱 확대되어갔다. 베트남파병비판, 사카린밀수사건 성토투쟁, 학원자유화쟁취투쟁을 이어오던 학생들은 6.8부정선거를 놓고 투쟁의 강도를 더해갔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동백림사건·민비연 사건’(동백림=동베를린, 민지연=민족주의 비교연구회)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여 부정선거규탄투쟁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베를린 유학생들이 북한과 연계하여 간첩활동을 하고 학생시위를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학교당국과 정부는 휴업, 휴교조치, 조기방학으로 대응했으나 8월 개학 이후 투쟁은 다시 타올랐다. 
7대 국회는 1967년 11월 29일이 되어서야 야당이 등원하여 의원선서를 마쳤다.

▲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장면
▲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장면

2. 3선개헌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헌법 제69조 3항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를 고쳐야 했다. 암초는 오히려 내부에 있었다. 김종필과 그 지지세력이 반대해 나선 것이다. 박정희는 1968년 5월 김종필 측근 김용태 의원이 ‘국민복지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19781년 대선에 김종필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사건을 터뜨려 반대파를 먼저 제거했다.
개헌에는 백남억,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 4인방이 선봉에 나섰다. 1968년 12월17일 공화당 당의장 서리 윤치영이 개헌의 운을 떼고, 1979년 1월 당 사무총장 길재호가 신중검토중임을 밝힌 후, “‘조국근대화’를 위해서는 박정희 집권연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퍼뜨리며 개헌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1969년 5월경부터 김종필은 개헌을 동의하고 설득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곧바로 7월 25일 박정희는 개헌국민투표를 자신과 정부에 대한 신임여부로 묻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개헌안 발의를 지시했다. 공화당은 8월 7일 3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 제출 이후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8월 22일~23일 두 차례 정상회담을 열고 주한미군 계속주둔, 베트남전쟁 처리 협조 등을 합의하며 3선개헌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야당과 재야는 이미 4월초부터 ‘개헌저지 국민투쟁 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 지분싸움으로 본격적인 투쟁을 진행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3선개헌반대투쟁을 본격 시작한 것은 대학가였다. 사실 한국 대학의 68년은 조용했다. 유럽에서는 68혁명의 파고가 타올랐으나 한국대학은 동백림사건, 통혁당 사건의 여파로 조직활동이 위축되어 있었고, 한국정부의 베트남 파병 이후 1968년 1·21청와대습격사건, 울진삼척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냉전의 그늘이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1969년 개헌음모가 노골화되면서 학생들의 투쟁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6월 20일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에 대한 초산테러 사건은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6월 29일경부터는 시위는 거의 매일 전개되었고, 수백 수천의 학생들이 가두시위, 연좌시위에 나서고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대학생들의 투쟁이 휴교령으로 방해를 받자 이번에는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개학 이후에는 75시간 단식농성 투쟁 등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 1969년 9월 3선개헌을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는 신민당 의원들
▲ 1969년 9월 3선개헌을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는 신민당 의원들

그럼에도 1969년 9월 9일 국회본회의에 개헌안이 상정되었다. 국민투표법 자체가 반대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저항자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9월14일 일요일 새벽 2시 30분 본회의장이 아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은 날치기 통과되었다. 국회본관에서 농성에 참가했던 의원들은 계표가 끝난 다음에야 통고를 받았다. 10월 27일 국민투표가 진행되고 77.1%투표율, 65.1% 찬성으로 3선개헌안이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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