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8)

▲ 시국강연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 시국강연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1. 김대중과의 접전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원래는 지리멸럴한 양당을 상대로 박정희의 일방적인 승리가 점쳐졌다. 그런데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김대중 후보가 유권자의 관심을 모으며, 대선은 호각지세를 이루고 치열한 접전양상을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향토예비군폐지, 교련철폐’,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류’, ‘미·일·중·소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 실시’,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등 획기적인 공약을 제시하며 국민의 뜨거운 열기를 모아냈다. 특히 김대중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전까지 학생들은 학원을 병영화하려는 일주일 2시간 군사교육을 강제하는 ‘교련철폐’를 외치며 투쟁해 오고 있었으나 공명선거운동으로 전환했다. 한창 대선이 고양되던 4월 19일 재야민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청년학생들과 더불어 공명선거운동을 조직해 들어갔다. 학생과 재야는 6,139명의 선거참관인단을 각지에 파견했다.

선거결과 박정희 53.2%, 김대중 45.3% 득표로 90만표 차이로 박정희가 승리했다. 박정희는 선거막판에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는 논리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선거 후 민주수호 국민협의와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한달 후에 있을 ‘총선보이코트’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선에 뿌려진 정부여당측 선거자금은 700억이 넘었다. 부재자 투표에서는 박정희 몰표가 나왔고, 영남권에서는 70%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반면 김대중이 유리한 지역에서는 무효표 처리 사례가 많았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엄청난 부정선거 공작에도 큰 표차가 없는 결과를 낸 김대중 후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 휴교령이 떨어진 서울대 입구
▲ 휴교령이 떨어진 서울대 입구

 

2. 신민당의 신승과 국가비상사태법 날치기

5월 25일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은 진산파동, 중앙정보부의 개입, 관권선거 등의 조건 속에서도 신승을 거두었다.
공화당의 48.8%에 별로 뒤지지 않는 44.3%로 거의 격차없이 접전을 벌였고, 의석도 89석(지역구 65석, 전국구 24석)으로 늘어났다. 소선구제하에서 지역구 153석, 전국구 51석 중, 민주공화당은 113석(지역구 86석, 전국구 27석)을 얻어 과반을 넘겼으나 사실상 패배였다. 공화당은 28명의 현역의원들이 대거 낙선했고, 개헌선을 학보하지도 못했다. 
7대 대선과 8대 총선은 박정희정권이 더는 합법적 방식으로 재집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생들은 양대선거 이후 교련철폐투쟁, 부정선거규탄투쟁에 돌입하였다. 정부는 일시적 유화조치를 취하나 결국 10월 15일 ‘학원질서확립 특별법’을 발표하고 위수령을 발동한다. 이로 인해 일시에 1,889명의 학생이 연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11월 31일에는 서울대 내란예비음모사건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는 명목으로 서울대생 4명(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을 구속한다. 이어서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1일에는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한다. 마침내 12월 27일 공화당 111명과 무소속 2명은 새벽에 이 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그리고 1년 후 결국 8대 국회는 유신선포로 임기 중 강제해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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