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로 만난 윤석열과 한비자 (10)
한비자의 법치에 대한 현대 인권적 평가: 윤석열의 정치권력의 행사와 관련하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채형복 교수는 검찰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제왕을 꿈꾸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전국시대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자를 소환했다. 연재 ‘법치로 만난 윤석열과 한비자’를 14편으로 나누어 싣는다. 윤석열 검찰독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편집자]

법치주의는 근대 입헌국가의 정치원리로써 개인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회에서 만든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나라나 권력자가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지울 수 없다는 사상을 말한다. 법치주의는 공포되고 명확하게 규정된 법에 의해 국가권력을 제한·통제함으로써 자의적인 지배를 배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법치주의는 몇 가지 원칙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 법은 명확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원칙, 법은 정당한 절차에 따라 제정되고 집행되어야 한다는 원칙 등이다. 만일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고,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법치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국가권력을 견제·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법치주의도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사회구조가 세분화되고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를 규율하기 위한 법은 그 내용이 복잡할 뿐 아니라 개수도 늘어나고 있어 개인이 관련 법을 이해하기 어려워 법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둘째, 아무리 시대의 추세를 반영하여 법을 제정한다고 할지라도 법이 현실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를 막기 위한 장치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법치주의가 가진 한계다.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법을 위반하여 국가권력을 행사하거나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결국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법에 대한 이해와 법을 준수하려는 의지도 필요하지만 개인이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민주적 통제가 행사되어야 한다. 그 통제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입법부·사법부·행정부 간의 삼권분립이 이뤄져야 하며,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개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처럼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토대이지만 현실에서 법치주의를 제대로 운용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제도가 아니다. 또한 법치주의를 내세워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로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 침해되는 경우,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기도 하다.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자와 개인 서로가 자신의 권력 혹은 권리를 지키는 창과 방패의 역할을 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법치주의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춘추전국시대 법가의 사상에서 법치주의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하여 덕치주의를 배격하고 법률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다.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자는 상앙·신불해·신도가 주장한 법술세(法術勢)에 의거하여 국가통치의 기본 이론으로 법치주의를 주장하였다. 한비자는 법치주의를 통해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한비자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법은 국가의 최고 권력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법 앞에 평등’은 오늘날 민주국가의 법치주의가 말하는 의미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군주를 위한 것이며, 법은 군주의 통치와 지배를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군주는 법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권세에 의지하여 백성을 통제한다. ‘법 앞에 평등’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위계적 서열 중심의 신분제를 넘어설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법 앞에 평등’은 신분제의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결국 백성들은 ‘법 앞에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한비자는 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처벌은 엄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형벌로써 형벌을 없앤다”는 상앙의 이형거형을 법치주의의 근본으로 삼아 공과에 따라 신상필벌을 적용하였다. 한비자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여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엄격한 처벌을 통해 재범을 방지함으로써 결국 형벌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면 일시적으로는 범죄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범죄의 예방효과가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으며, 반대로 형벌이 너무 엄격하면 오히려 범죄를 조장하여 새로운 범죄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셋째, 한비자는 법치주의를 실시함으로써 국가의 통치를 위해 효율적인 관료제를 정비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제신술로 7술6미와 세 가지 치신술(3治)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술책을 쓰기 위하여 군주는 신하들 앞에서 감정의 호오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해야 한다. 인재의 등용에 대해서도 한비자는 유가와 묵가의 선비들을 다섯 마리 좀벌레를 뜻하는 오두라 부르며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군주가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신상필벌이다. 이 권한은 오로지 군주만이 사용할 수 있다. 군주는 이 권한을 이용하여 신상필벌을 신하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한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엄형주의 혹은 엄벌주의에 의거한 법률만능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의 주된 관심은 국가보다는 군주 1인에 대한 권력의 집중에 있었다. 오늘날 그의 법치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문제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비자의 법치주의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적 견해와는 달리 현대적 의미에서 그의 사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공자를 위시한 유가가 주나라의 종법을 중심으로 한 복고주의적 경향이 강한 반면, 법가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규범을 틀을 찾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한비자가 법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라고 보고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 한비자의 법치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현대법을 적용하여 재해석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전자의 입장에서 한비자의 법치주의를 비판적으로 본다. 아래에서는 특히 현대 인권의 관점에서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치주의의 문제점을 검토하기로 한다. 이에 비추어 윤석열이 행사하는 정치권력의 위험성과 그 한계를 평가한다.
1. 한비자의 법치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이다
법치주의는 법이 국가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규율하고, 국가 권력은 법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법은 법치주의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법치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법이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또한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법과 법치는 인간사회나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다.
법치주의는 영미법상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말한다. 문제는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가 자꾸 형식적 제도 내지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자들은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법치주의를 내세워 법의 지배가 아니라 rule by law, 즉 ‘법에 의한 지배’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가 공권력 행사의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법치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주된 이유이다.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는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법의 지배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 법에 의한 지배는 권력이 있는 자가 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다. 반면, 법에 의한 지배는 권력자의 자의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고, 누구나 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가 필요하다. 법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권력이 있는 자가 법을 자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치주의에 관한 기본 원칙에서 바라보면, 한비자의 법치는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이다. 그에게 법과 법치는 군주의 절대정치권력 확보를 위한 것이며, 신하와 백성을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다. 군주는 법을 소유하고, 법 위에 군림하여 법치를 적용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법치주의의 일반원칙에 따르면, 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아무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하지만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권력이 있는 자가 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가 말하는 법치주의는 법과 정의의 지배가 아니라 사람에 의한 자의적 지배를 의미하는 ‘인치주의(人治主義)와 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주의(政治主義) 또는 ‘권력정치(權力政治)를 말한다. 이처럼 한비자는 절대권력자의 자의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법에 의한 지배로 법치주의를 사용하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한비자의 법치주의에 대한 위의 비판은 윤석열 정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법학을 처음 대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법치주의는 ‘법이 지배’, 즉 ‘rule of law’가 되어야지 ‘법의 의한 지배’, 즉 ‘rule by law’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법치주의=법의 지배>라는 것은 법학도는 물론 법률가에게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서 법무부가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여간 우려스럽지 않다. 이는 마치 한비자가 국가통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법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과 다르지 않다. 한비자는 법과 법치를 확립하여 모든 권한을 군주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강력한 전제군주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실제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검사나 검찰 수사관 등 전·현직 검찰공무원이 136명이나 들어가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21>이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에서 입수한 자료를 보면, 2022년 5월 10일부터 2023년 3월 16일까지 전·현직 검사는 117명, 전·현직 검찰공무원은 19명이다. 이들이 윤석열 정부에서 맡은 역할을 분류해보면, 선출직과 임명직 공무원이 24명, 법무부 외 국가기관 파견이 57명, 법무부 파견이 55명이다. 이 중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권영세 통일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검사 출신이다. 가히 ‘검찰공화국’이란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22년 6월 8일 출근길 인터뷰에서 “검찰 출신 편중 인사가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석열은 “그게 법치주의국가 아니겠습니까?”라며 답변한다. 그에게는 법률가 중에서도 오직 ‘검사만’이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인재들이다. 한마디로 조직에 충성하는 능력 있는 검사 외에는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이 생각은 한비자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한비자에 따르면, 법적 판단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우연적 요소가 너무 강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
한비자는 학자, 유세객, 협객, 정객 및 상공인과 같은 다섯 가지 부류는 나라의 기둥을 좀먹는 두충과 같은 존재라며 ‘다섯 마리 좀벌레’라는 뜻에서 ‘오두(五蠹)’라 부른다. 이 다섯 가지 두충과 같은 자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냥 둬서는 나라와 조정이 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오두’에 속하는 집단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에게 ‘자유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음해하는 세력은 모두 좀벌레와 같은‘반국가세력’이다. 그 세력의 중심에 ‘현명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학자가 있다. 한비자에게 학자란 “선왕의 도를 칭송하며 입만 열면 인의를 떠벌이고, 용모나 복장을 융성하게 하고는 입으로 변설을 꾸며대고, 당대의 법을 의심케 만들어 군주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부류이다.”비록 유가의 선비를 비판했다고는 하나 학자에 대한 한비자의 비판은 독설에 가깝다.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학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소위 ‘교수 출신’ 장관들은 임명 과정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무리한 정책 추진으로 실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초대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된 서울대 교육학과 박순애 교수는 음주운전과 논문 중복 게재, 갑질 의혹 등 자질 논란 속에도 임명이 강행되었다. 하지만 만 5세 입학이라는 졸속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결국 장관 취임 한 달 만에 사임하였다.
박순애 교수의 후임으로 임명된 이주호 교육부장관도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출신이다. 그는 교과서 진화론을 삭제하고, 임용시험을 폐지하고 교대와 사대를 로스쿨식 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겠다며 논란을 일으켰으며, 장관 보좌관에 현직 검사를 임명하였다. 심지어 2023학년도 수능을 5개월 남겨놓고 대통령실의 소위 ‘킬러문항 배제’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김영호 통일부장관 후보자(2023.7.5. 기준)에 대한 시민단체의 비판도 거세다. 김영호는 ‘녹두서평 사건’의 당사자다. 1987년 3월 25일 발간된 사회과학전문 부정기 간행물인 『녹두서평』 1집에 제주 4.3사건을 다룬 이산하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이 게재된다. 검찰은 녹두출판사 발행인 김영호와 전무 신형직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각각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과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이후 김영호는 정치이념적으로 뉴라이트로 완전 변신한다.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 볼 수 없다며 북한체제를 파괴해야 한다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2018년 강제동원 징용판결을 내린 대법관들이 반일종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였다.
한비자가 보기에 백성은 실로 권세에 복종하고, 권세는 실로 사람을 복종시킨다. 또한 백성은 본래 권세에 복종하지만 의로움을 품고 따르는 사람은 적다. 공자와 노나라 애공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한비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의를 기준으로 했다면 공자는 노애공에게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세에 의지했기에 노애공도 공자를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공자는 노애공의 의(義)에 감복한 게 아니라 그의 권세에 복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한비자 오두 49:6). 이것이 공자가 신하가 되고, 노애공이 군주가 된 이유이다.
위 사례에서 보듯이 윤석열은 대통령이 가진 권세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교수들 가운데는 학자를 천직으로 여기지 않고 권력의 달콤한 맛을 탐닉하는 부류가 적지 않다. 몸은 연구실에 있어도 마음은 늘 대통령실을 향해 있다. 불나방처럼 자신의 몸이 타는 지도 모르고 교수들은 대통령이 손짓하면 한걸음에 달려가 ‘주권에 대한 절대 충성 서약’을 한다. 맹자는 사이비 지식인 학자인 ‘향원(鄕原)’을 ‘덕의 적(德賊)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맹자가 보기에 대인군자는 물론이고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같은 중간 부류의 지식인은 적어도 권세에 초연하거나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문제는 이들을 빼고 나면 향원밖에 남지 않는 현실에 있다.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자는 오직 향원이로다!”
이 나라 이 땅의 지식인들은 향원덕적(鄕原德賊)’이라는 맹자의 질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권력이 맛이 달콤한들 지식인 학자라면 ‘주인의 충직한 개’로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2. 한비자의 법치는 전제군주를 위한 것이다
한비자는 패왕(霸王)을 이상적인 군주로 본다. 패왕이란 패도(霸道)와 왕도(王道)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패왕은 법과 법치를 통해 확립한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능을 바탕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정치를 펴는가에 따라 패왕은 왕도를 실현하는 왕자(王者) 혹은 패도를 실현하는 패자(霸者)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비자가 꿈꾸는 사회는 종국적으로는 패자에 의한 전제주의 혹은 전체주의로 독재체제이다. 이 체제에서는 군주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백성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 군주는 폭력과 공포를 사용하여 모든 영역에서 백성의 삶을 통제하고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
한비자는 패왕이 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상필벌과 엄벌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도, 패왕이 강력한 통치 지배를 구축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한비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이기적인 인간의 악행을 막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위해 그는 군주에게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부여하여 법의 위반 여부에 따라 벌과 상이라는 대가(신상필벌)룰 확실하게 실시하면 된다고 보았다. 만일 제정된 법과 이를 추동할 수 있는 강력한 힘만 있으면 군주의 능력이나 도덕성 여부는 문제 삼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정치상황을 고려해 볼 때 패왕을 옹립하고 강력한 법과 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한비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 한비자의 법과 법치사상은 진시황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비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패왕은 독재자이며, 법에 의한 지배를 통한 법치주의는 백성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패왕으로서 진시황은 중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지만 진나라는 15년이란 짧은 기간 존속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비단 진나라의 사례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난 분명한 사실이 있다. 독재자는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그들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억압함으로써 결국 인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법을 어기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한비자의 법치사상은 오히려 법의 공정성을 해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권력 남용으로 법의 엄정한 집행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한비자가 법과 법치를 내세워 국가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다면, 묵자는 법의(法儀)를 주장한다. 법의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일을 할 때 본받을 표준 내지는 법도’를 말한다(묵자 제4편 법의). 묵자는, “선비가 장군이나 재상이 되어도 따라야 할 법도가 있고, 모든 공인이 일을 함에도 모두 본이 되는 법도가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공인들은 곱자가 있어 모를 만들고, 그림쇠가 있어 원을 만들며, 먹줄을 표준으로 곧게 하고, 매달린 추를 표준으로 수직을 세우며, 물을 표준으로 수평을 만든다.”(묵자 제4편 법의)
이렇게 다섯 가지 표준을 법도로 만들어 두면, 정교한 공인이나 미숙한 공인이나 할 것 없이 표준에 비슷하게나마 본떠서 일을 할 수 있어 법도를 표준으로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통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법도에 따라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면 서로 두루 사랑하는 정치를 베풀 수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다스리는 법도를 삼아야 옳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묵자는 어질지 못한 부모와 스승은 물론 군주도 법도로 삼지 말라며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묵자가 내세우는 반대의 이유는 분명하다. 만약 어질지 못한 군주를 법도로 삼는다면, 이 법도는 어질지 못할 것이니 어질지 못한 법도는 법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묵자는 어질지 못한 부모와 스승과 군주는 다스리는 법도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묵자 제4편 법의).
묵자의 이 말은 맹자의 폭군방법론(暴君放伐論)과 일맥상통한다. 맹자가 생각하는 왕도정치란 기본적으로 덕(德)을 갖춘 사람에 의해 정치가 행해지는 덕치(德治)이다. 이 때 덕(德)을 갖춘 사람이란 하늘과 백성의 승인을 받은 천자를 말한다. 천자는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하며, 또한 덕(德)과 의(義)에 의거한 도덕적 실천에 자발적으로 귀의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왕도정치를 하면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으나 반대로 왕도정치를 하지 않는 천자는 언제나 방벌(放伐)할 수 있다. 맹자가 제시한 왕도정치는 그 후 군주가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태도로 정치를 운영해 이상적 사회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유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왕도정치의 반대되는 개념이 패도정치(覇道政治)이다. 패도정치는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로 폭력과 정치적 기만을 수단한다. 따라서 무력을 바탕으로 인(仁)를 가장하는 것이 패도(覇道)이고, 덕(德)을 바탕으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왕도(王道)이다. 통치자는 이익(利)의 추구보다는 인의(仁義)의 실현에 힘써야 한다. 양자의 차이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힘으로 정치를 하면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을 패도정치가 하는데, 패도정치는 반드시 강대한 국력에 의지해야 하고, 덕(德)으로 인자한 정치를 펴는 것을 왕도정치라 하는데, 왕도정치는 강대한 국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맹자 공손추장구 상 3:3)
맹자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임금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맹자 양혜왕장구 상 1:6)고 하면서 “어진 사람에게는 천하에 적이 없다”(맹자 양혜왕장구 상 1:5)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주장하였다.
검사 출신답게 윤석열은 법과 법치를 활용하는데 능숙하다. 이 관점에서 그의 통치 스타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윤석열은 상대를 공격할 때 반드시 법을 앞세운다. 법치라는 이름으로 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다. 그가 보기에 특히 전 정부와 야당, 노동조합, 시민단체, 사교육계 등은 잠재적 범죄 집단이다. 압수수색으로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털고, 관련자를 소환하여 조사하고, 법원에서 기각되든 말든 일단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법이 가진 권위에 약한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법을 억압과 탄압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다.
둘째, 윤석열은 전 부처의 검찰화를 통해 사정 만능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검찰과 감사원, 국세청, 국가정보원 등 사정 및 정보기관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위대로 동원한다. 또한 한동훈 법무부장관을 비롯하여 정부부처에 검찰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여 대통령을 중심으로 검사동일체에 따른 상명하복식 ‘1인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사정·정보기관과 검찰조직이란 전위대의 보호를 받는 윤석열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반국가세력’이라고 공격하는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셋째, 윤석열은 자유를 말하면서도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대화와 소통에는 관심 없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길 때도 시민과의 대화와 소통을 그 이유로 내세웠다. 출근길질의응답(도어스테핑)도 동일한 이유로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잦은 실언으로 문제가 생기자 슬그머니 중단했다. 심지어 야당인 민주당 대표 이재명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남시장 재임 당시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고 있다. 윤석열에게 야당은 ‘국정 발목을 잡는 세력’에 지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실제 윤석열은 야당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얽히고설킨 국정을 풀어가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의 관심은 사정기관과 검찰조직의 확대를 통해 한국사회의 모든 적폐와 거악을 일소하는데 있다. 규제를 없앤다면서 새로운 규제를 만들고, 시행령으로 통치를 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법령을 선포한다. 집권 1년이 갓 지났을 뿐인데도 시민들은 벌써 지치고 피로감에 절어있다. 수시로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하니 사람들은 합법을 가장한 공포와 두려움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떨고 있다. 법과 법치의 이름 아래 ‘공포정치’가 짓누르고 있는 현재의 한국사회의 모습이 낯설기조차 하다. 일체의 대화와 소통 없이 모든 정책을 사건화하고 수사와 기소의 칼날을 들이대는 윤석열 정부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뭘 어찌하겠다는 말인가?” 그대들에게 노자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날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지며, 사람들이 기교를 부리면 부릴수록 사악한 일이 연속해 일어나고, 법령이 선포되면 될수록 도둑이 더욱 들끓는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했다. 내가 무위하면 백성은 스스로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며, 내가 일부러 행하지 않으면 백성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면 백성은 스스로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순박하게 된다.”(도덕경 제57장)
노자의 이 말을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통령은 무위의 정치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무위의 정치란 그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그 뜻을 무르게 하되 뼈는 단단하게 하는 다스림을 말한다. 이와 같은 통치 방식은 백성들이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도록 하며(無欲),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智者)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란 현실에서 잘나고 능력 있다고 뻐기고 뽐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욕심이 많고, 공명심이 높으며 남들과 다투고 경쟁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만일 대통령이 그들을 우대하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사람들은 욕심을 내어 남을 해쳐서라도 앞서려하게 된다.”(도덕경 제3장)
노자가 말하듯 절대권력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노자의 경고와는 달리 윤석열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정부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대통령실과 산하기관을 온통 욕심 많고, 공명심이 높고, 뻐기고 뽐내는 자들로 채우고 있다. 윤석열은 ‘검찰(사)독재’의 유혹에 빠져 대한민국을‘검찰공화국’으로 만들려는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법과 법치를 내세워 자신의 절대권력과 지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제왕이 되려는 야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위로써 할 수 있는가?”(도덕경 제10장)
이 질문에 대해 노자가 말한다.
“만약 임금이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그를 따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해서 달콤한 이슬이 내리듯이 백성들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제자리에 알맞게 살아간다.”(도덕경 제32장)
‘등 따습고 배부르면’ 백성들은 정치지도자가 누군지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정치지도자가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지도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며, 선정을 베풀어도 너무나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한비자의 법치는 엄벌주의 혹은 엄형주의이다
한비자는 법을 통해 사회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엄격한 형벌을 통해 범죄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자의 엄벌주의 혹은 엄형주의는 법은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되며, 범죄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비자는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법치주의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에 의한 통치와 지배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그의 엄벌주의는 상벌과 공죄(功罪)를 따져(刑名) 상벌을 내림(參同)를 내린다는 형명참동(刑名參同)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엄벌주의와 형명참동은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치주의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형명참동에 의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내리면, 군주는 절대적인 지배 권력을 확립하고 손쉽게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엄벌주의는 매우 혁신적인 생각이었지만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엄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실제 많은 국가에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엄격한 형벌을 사용하고 있다. 엄벌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에 따르면, 엄격한 형벌은 범죄를 예방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범죄자의 재범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벌주의는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제도로써 인권 침해의 우려가 상당히 높다. 또한 엄격한 형벌이 범죄를 예방하거나 범죄율을 낮추는 데 효과적이지 않으며, 범죄자를 사회에서 고립시킬 뿐 아니라 범죄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엄벌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로 사형제를 들 수 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사형제를 두고 라파엘, 변호사, 추기경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본다.
라파엘은 자신이 묘사하는 유토피아의 절도 처벌정책이 온건하고 실용적임을 설명하며, “형벌의 목적이 악덕을 타파하고, 사람을 구제하자는 것”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라파엘은 범죄자들로 하여금 정직의 필요성을 깨닫고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지은 죄를 보상하면서 살아가도록 대우하고자 한다. 유토피아의 이 형벌제도에 “순종하는 품행”을 가진 노예들은 사면을 받지만 반항하는 노예들은 채찍질을 당하거나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유토피아의 절도범 처벌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라파엘과 변호사, 그리고 추기경의 이어지는 대화에서 우리는 절도죄를 비롯하여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라파엘: 나는 이 제도가 채택될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고, 잉글랜드에서도 이런 제도를 채택하면 나의 법조계 적대자가 그토록 칭송했던 ‘정의’보다 훨씬 더 큰 이점이 있을 것이다.
변호사: 그러한 제도를 잉글랜드가 채택했다가는 나라 전체가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며 그는 입을 다문다.)
추기경: 아직까지는 아무도 이 안을 시도해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의 효과 여부를 추측하기는 어렵겠소. 그러나 어느 절도범에게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국왕이 사형수에게 비호권 없이 일정 기간 동안 집행을 유예해 줄 수도 있으니 그 기간을 이용해서 이 안을 시험해 봅시다. 효력이 있으면 국왕은 이를 법으로 제정하고, 없으면 그 사형수를 즉시 처형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진작 처형되지 않았던 것보다 더 불편할 것도 없고 불법적이지 않으면서도 이 시험으로 인한 피해는 전혀 없어요. 내 생각에는 유랑민들 문제도 이 방식으로 대처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소. 그 사람들에 관한 법도 많이 통과시켰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까.
추기경의 말 가운데 “국왕이 사형수에게 비호권 없이 일정 기간 동안 집행을 유예해”주는 방안은 이를테면, 사형제는 유지하되 실제로 사형집행은 유예함으로써 사형제 존속과 폐지의 영향을 평가해보자는 것이다. 이를 현대적 제도로 표현하면 사형제는 유지하되 사형 집행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는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한다. 2018년 말 기준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제를 법적으로 폐지한 국가는 106개국이고, 법적 또는 실질적 사형 폐지국은 142개국이다.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하는데,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게 사형을 집행한 이래 더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형제도 존폐론을 둘러싸고 여전히 논의는 진행 중이다.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사형제를 반대하고 있다.
① 인간의 생존권은 불가침의 것으로 국가가 인간의 귀중한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인도주의적 관점).
② 사형은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으로서 회복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판의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인정될 수 없다(오판의 가능성).
③ 사형은 극형이고 무거운 형벌이다. 따라서 사형에 처해진다는 공포심이 발생하고 이로써 범죄 억지력이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지 사실상 범죄 억지력이 있느냐 하는 점은 의문점이 많고, 확실한 증거도 없다(범죄 억지력 없음).
④ 국가의 가해자에 대한 사형집행이 피해자 가족에게 응보적인 감정적 만족을 줄지는 모르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의 가족 모두를 경제적 궁핍과 결손 가정에 빠지게 하여 범죄 원인을 양성케 하는 두 가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범죄인의 생명박탈에만 몰두하고 피해자 구제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피해보상 차원).
폐지론자들의 위 주장은 사형존치론자들이 내세우는 반대 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존치론자들이 사형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의 핵심은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 할지라도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형은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고 억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사형제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19년 6월 14일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1.7%가 사형집행에 찬성하고 있고, 37.95%는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7.8%는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로서는 사형집행 찬성 여론이 사형제도 폐지 또는 집행 반대 여론보다 오차 범위 내에서 앞서고 있는 셈이다.
사형제 존폐론의 핵심은 사형이 과연 범죄예방효과가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유정 전 남편 살해사건’을 비롯하여 최근에도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나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위 여론조사는 살인과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하고, 사형제를 없애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일반인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사형제를 폐지한 국가가 이미 106개국이며, 법적 또는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142개국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사형제에 관한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쿠미 나이두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안전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사형제는 결코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전 세계적 지지를 통해 우리는 사형제의 완전한 폐지를 이루어낼 수 있으며, 또한 이루어낼 것이다.”
사형제 존폐론에 관한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엄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엄벌주의를 범죄 예방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면 인권 침해의 가능성과 사회 통합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적용해야 한다.
지난 1년간 국정운영의 행태를 보면, 윤석열 정부는 확실하게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법치주의를 실시하겠다는 기조를 확고히 정립한 것 같다. 노동조합정책을 그 예로 들면, 윤석열 정부는 노동조합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을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집회와 시위에 경찰력을 동원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조합이 기업의 경쟁력을 제한하고, 파업이 사회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는 기본인식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5월 1일 노동절날 민주노총 건설노조 양회동 강원지부 3지대장이 분식하여 하루 만에 숨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양씨는 유서에서 “억울하고 창피하다.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찰 독재정치의 제물이 되어 지지율을 올리는 데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죄 없이 구속돼야 한다”며 “무고하게 구속된 분들 제발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윤석열 정부는 건설노동조합을 마치 불법행위를 일삼는 조폭으로 간주하고 ‘건폭’이라며 단속과 수사를 강화했다. 이 정부와 야당이 보기에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면, 노동자들의 삶이 향상되고, 사회가 안정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하다. 도대체 사회통합을 위해 앞장서 노력하고 헌신해야 할 대통령이 노조를 조폭에 비유하고는 범죄단체로 몰아가고, 공개적으로 노조 혐오 발언을 하는 현재의 한국사회의 상황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현실에서 시민들이 바라는 대통령상은 무엇일까? 대통령이‘선정을 베푸는 가장 훌륭한 단계의 정치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존재만을 겨우 아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친근감을 느끼고 그를 칭찬하며,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이라면 시민들은 그를 업신여긴다. 어디 이뿐인가? 거기에 더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시민들은 대통령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행을 신중히 하여 공을 이루고 일을 성취해도 시민들은 ”우리는 본래 이랬어“라고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 정치지도자에게 노자는 겸손하라며 이렇게 말한다.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백성 위에 있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말로써 자신을 낮춰야 하고, 백성들 앞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해야 한다. 이로써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들이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는다.”(도덕경 제66장)
한마디로 백성들이 통치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진실로 큰 위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억누르지 말 것이며, 그 삶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힘들게 하지 않아야 백성들이 통치자를 미워하지 않는다(도덕경 제72장).
노동조합을 시작으로 언론, 시민단체, 대학을 비롯하여 집회시위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가 개입하고 그들의 권리를 탄압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대통령이 시민들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민들이 이번에는 대통령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할까 불안해하는 형국이다. 제발 부탁하건대 윤석열 대통령은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억누르지 말 것이며, 그 삶을 힘들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순자는 말한다.
“전하는 말에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 하였는데,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순자 왕제 9:4)
군주민수(君舟民水)로 잘 알려진 이 말은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라는 뜻이다. 배를 띄우는 것은 물이지만 그 배를 뒤집어엎는 것도 물이다. 백성은 거대한 강물이나 거친 파도와 같으니 배와 같은 군주를 권좌에 세울 수도 있고, 반대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군주는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민본정치를 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