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로 만난 윤석열과 한비자 (3)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채형복 교수는 검찰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제왕을 꿈꾸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전국시대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자를 소환했다. 연재 ‘법치로 만난 윤석열과 한비자’를 14편으로 나누어 싣는다. 윤석열 검찰독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편집자]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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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세는 국가 통치의 근본이 되는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법은 국가의 통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법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하고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 술은 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주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이 법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세는 법과 술을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군주의 권위와 힘을 말한다. 한비자는 법술세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군주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법술세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군주만이 강력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신불해와 공손앙의 두 학파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나라에 더 긴요합니까?(한비자 정법 43:1)

이에 한비자가 대답했다.

(...)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윗자리에 앉은 채 이목이 가리게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아래에서 어지러워진다. 이는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모두 제왕이 갖춰야 할 도구이다.(한비자 정법 43:2)

한비자는 상앙의 법과 신불해의 술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신불해의 술은 아직 미진하고, 상앙의 법 역시 아직 완비되지 못했다”(한비자 정법 43:7)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는 다스리는 법도인 치도(治道)는, “사람들이 쉽게 행하여 싫어하는 형벌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한비자 내저설 상 30:25)과 “사람이 쉽게 피해 갈 수 있는 것을 피하도록 하고, 범하기 어려운 중죄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한비자 내저설 상 30:28)이라고 강조하였다. 한비자는 상앙의 법(法)과 신불해의 술(術)에 신도의 세(勢)를 더하여 법술세(法術勢)를 바탕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법과 법치이론을 수립하였다.

현대 인권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반인권적 내용을 담고 있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모든 사상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이념과 현실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는 현실에서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함으로써 그 문제점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법술세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상앙의 법(法)의 개념과 의미

한비자는 기본적으로 상앙(商鞅, 본명: 공손앙(公孫鞅), B.C.390~338)의 법(法)에 의거한 엄중한 법집행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상앙이 말하는 법은 백성(民)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이자 통치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기본 장치인 성문법을 지칭한다. 상앙은, 모든 성문법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무차별적인 성문법의 적용과 준수 및 극단적인 법치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이 “형벌로써 형벌을 없앨 수 있다”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다. 한비자는 말한다.

“형을 집행하면서 경범죄를 중죄로 다스리면 경범죄도 없게 되고, 중죄를 범하는 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형벌로 형벌을 물리치는 ‘이형거형’이라고 한다.”(한비자 내저설 상 30:29)

상앙은 자신이 내세우는 법을 “옛날 법(古法)을 고쳐 새롭게 시행한다”는 뜻에서 변법(變法)이라고 불렀다. 변법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정전제(井田制) 폐지하고 대대적인 개간을 통한 농업생산량을 증대한다. 이를 위해 토지를 농민에게 수여하는 수전제(授田制)를 실시하여 국가가 세금을 직접 징수한다.

② 귀족과 종실의 분봉제(分封制)와 세습제를 없애고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군공에 의해 직위와 상을 준다. 이를 통하여 포상과 처벌을 명확히 하여 백성의 이익은 오로지 경전(耕田)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한다.

③ 권력이 군주에게 집중되는 행정 제도인 군현제를 도입한다. 31개 현(縣), 향(鄕)과 읍(邑)을 십오편호제(什五編戶制)에 따라 편성한다. 이 제도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웃이 모든 책임을 함께 지는 연좌제이다. 즉, 십오연좌제(什五連坐制)를 실시하여 부정을 저지르면 참수보다 무거운 형벌인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腰斬)에 처한다.

④ 농업생산을 장려하고 공상업을 억제하는 중농경상(重農輕商) 또는 중농억상(重農抑商)정책을 실시한다. 이를 통하여 모든 백성이 오로지 경전에만 몰두하도록 유도한다.

⑤ 백성들의 전투의지를 높이기 위해 잦은 전쟁을 불사한다. 중농으로 백성을 배부르게 하고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여 강한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 이를 ‘농전사상(農戰思想)’이라 한다.

⑥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공포정치를 조성한다.

⑦ 대가족제도를 폐지하고 한 집안에 두 명 이상의 남성이 있는 경우 분가를 의무화하는 분가정책(分家政策)을 실시한다. 이 정책의 도입으로 호구세 증가를 통한 세수 증대와 군역 확보를 도모한다.

⑧ 법가 이외의 유가 등 인의도덕이나 박애 사상을 철저히 배척하고 오로지 법치만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다.

⑨ 통치에 대한 비판과 여론을 봉쇄하기 위하여 시서예악 등 전적을 전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민화 정책을 실시한다.

⑩ 유세와 언변이 나돌지 못하도록 학자의 여행이나 백성의 이주를 제한하여 사상을 통제한다.

⑪ 길이·부피·무게를 통일하는 도량형(度量衡)정책을 실시한다.

상앙의 변법이 가지는 특징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상앙에게 법이란 상(賞)을 줄 만한 업적이 있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고, 잘못이나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罰)을 줌으로써 상벌(賞罰)의 원칙을 분명히 하여 공정(公正)하고 정의로운 법질서를 확립하는 수단이다. 상앙은 법을 위반한 사람을 거열형이나 요참으로 처형하고, 범죄자의 구족(九族)을 모두 벌하는 멸문지화를 단행하였다.

신상필벌에 입각한 엄격한 법을 집행하기 위하여 상앙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혹은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에 의거하여 고발과 연좌제를 시행하였다. 오가작통법이란 다섯 가구(五家)를 묶어 하나의 통으로 편성한 전형적인 주민통제법이자 연좌제적 행정제도였다. 그 후 이 방식은 다섯 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는데 그치지 않고 5개의 통을 묶어 리(里)로, 3~4개의 리를 묶어 면(面)을 구성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제도를 통해 이웃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하고, 죄를 범하면 벌도 함께 지도록 하였다. 이처럼 변법을 실시하여 상앙은 백성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비자는 상앙의 변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상당히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

법은 관청에 명시돼 있는 법령으로 상벌이 백성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어 법을 잘 지켜 따르면 상을 내리고, 간사한 짓으로 이를 어기면 엄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하가 확실히 익혀 두어야만 한다.(한비자 정법 43:2)

이에 백성들은 쉬지 않고 힘써 일하고, 적을 쫓을 때는 위험에 빠져도 물러나지 않았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사가 강해진 이유다. 그러나 진나라 군주는 신하의 간사함을 알아내는 술이 없었다. 애써 이룬 부강이 신하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간 이유다.(한비자 정법 43:5)

상앙이 이웃을 서로 감시하고 위법행위를 고발하게 하는 강력한 백성통제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나라 신하들이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 까닭에 나라는 어지럽고 군대는 쇠약했으며, 군주의 권세 또한 미미했기 때문이다. 상앙은 진효공에게 법제를 바꾸고 풍속을 교정해 공도(公道)를 밝게 드러낼 것을 적극 권했다. 당시 진나라 백성들은 죄를 지어도 형벌을 피할 수 있고, 공이 없어도 높은 지위에 올라 존경받을 수 있는 예전의 풍속에 젖어 새 법을 가벼이 보고 위법을 저질렀다. 따라서 상앙은 법을 위반한 자에게는 반드시 중벌을 내리고, 그런 자를 고발한 자는 상을 후하게 내려 새 법을 믿게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변법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신상필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백성들은 새 법에 대해 믿지 않았다. 상앙은 새 법에 대한 규범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도성 함양의 남쪽 대문 앞에 세 길 높이의 나무(목패)를 세우고 그 옆에 방을 붙였다.

누구든지 이 목패를 북문 앞으로 옮기면 상금으로 금 열 돈을 주겠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믿지 않고 아무도 목패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상앙은 상금을 다섯 배인 금 50돈으로 올렸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목패를 북문 앞으로 옮기자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었다. 그러자 다른 어떤 사람이 목패를 다시 남문 앞으로 옮겼고, 상앙은 그에게 금 50돈의 상금을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라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상앙은 법을 지킨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지키지 않은 사람은 처벌하였다. 그 결과 간사한 행동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과정에서 처벌을 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한비자 간겁시신 14:4)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이다. 상앙의 변법은 너무 엄격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새 법의 폐단이 많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진효공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앙의 변법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효공이 판단하기에 진나라의 부국강병과 패업(覇業)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앙의 변법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효공의 통치력과 상앙의 변법의 성과에 대해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변법의 실시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는,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을 받고, 처벌받을 사적인 행동과 이를 범하는 간사한 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마침내 법을 어기지 않게 됐고, 형벌을 가할 일도 없게 됐다. 나라의 기강이 서고, 군사력이 강해졌다. 그 결과 영토도 사방으로 확장할 수 있었고, 군주 또한 존귀해졌다. 죄를 감추는 자에게 내려지는 벌이 엄중하고, 간사한 자를 고발한 포상이 후했던 덕분이다.(한비자 간겁시신 14:4)

한비자의 평가대로 상앙은 재상이 되어 20년 간 변법을 시행하여 개혁정치를 펴는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상앙의 개혁정책을 적극 후원하던 진효공이 죽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변법을 비판하는 반대파에게 탄핵당한 상앙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투에서 죽는다. 진 혜문왕의 명령으로 그의 시체는 거열형에 처해져 사지가 찢기는 수모를 겪는다. 그가 고안한 거열형에 자신의 몸이 찢기는 죽임을 당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상앙이 비록 10배의 노력을 기울여 법제를 바로잡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신하들은 도리어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만일 진효공의 치세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후 진나라 군주들은 강대국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제왕의 대업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법치술을 이용해 관원들을 바로잡는 법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데다 군주도 법치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데 따른 재앙이라며 혹평하고 있다.(한비자 정법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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