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패권에 의한 금융팽창과 금융종속(13)

미국은 “준 세계화폐”의 지위를 갖는 달러의 발행과 유통의 확대를 위해 국제기구나 제도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유로달러시장, 역외금융센터(조세 회피 지역) 등은 그러한 국제기구, 제도에 해당한다.

(1) 국제 통화 기금(IMF)

국제통화기금(IMF)은 브레턴 우즈 회의에서 설립이 결정된 핵심 기구로서 설립 당시 목적은 국제 수지 적자로 단기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국가를 지원하는 데 있었다. 그렇지만 국제통화기금은 꼭 설립 목적에 맞는 기능만을 수행한 것은 아니며, 미국의 필요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해 가면서 미국이 달러 유통을 확대해 나가고 구조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서 없어서는 안 될 기구 역할을 해왔다.

먼저 IMF 의결기구를 통해 이 기구가 미국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IMF는 총회와 이사회로 구성된다. 총회는 상징적 의미만 지니며 이사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일반적으로 국제기구는 1국 1표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IMF의 경우는 할당액(IMF Quatar)의 지분에 따라 표를 배분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할당액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국가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미국은 2021년 3월 기준으로 16.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표 1]. 그런데 IMF 안건 가운데에는 85% 이상 찬성해야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특별 사안이 많고, 미국은 이에 대해 단독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실질적 의사결정을 하는 기구인 이사회에는 24개 이사국만 참여가 가능하다. 24개 이사국은 미국, 일본, 중국 등 이미 정해져 있는 8개국과, 16개로 나뉜 그룹에서 그 그룹의 대표로 선출된 16개국으로 구성된다. 이사국이 아닌 나라의 의사는 소속 그룹을 대표하는 이사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여기에서 보듯 국제통화기금은 사실상 미국의 의사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러 나라들은 IMF 할당액의 재분배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에 귀를 별로 기울이지 않는 상황이다.

IMF는 미국의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기능해 왔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국제통화기금 정관 제1조의 iv)에 따르면 IMF 설립 목적은 회원국들 사이 경상거래 측면에서 다국적 지급체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제6조에 따르면 IMF는 회원국들의 자본이동을 통제할 수 있지만, 경상거래를 위한 지급을 제한하지는 못한다. 제30조에 따르면 서비스와 단기금융 및 신용서비스를 포함하여 무역과 그 밖의 경상거래를 다루는 지급은 국제통화기금의 권한에 속하지만, 자본을 이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급인 자본거래는 그렇지 않다. 곧, 국제통화기금은 국가들의 국제수지 가운데 경상계정 안에 나타나는 상품/서비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규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반에 이머징 마켓으로 향하는 민간자본의 흐름이 증가하면서 IMF는 목적에서 벗어난 활동들을 벌인다. 국제 은행들과 미 재무부는 민간자본의 흐름을 촉진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줄 것을 여러 나라 정부들에게 요구했는데, 국제통화기금도 여기에 힘을 보태는 활동들을 벌였다. 예컨대 1996년 9월 국제통화기금의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는 상무이사회에 국제통화기금의 협정문을 바꿔서 국제 자본흐름의 성장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1997년 4월 잠정위원회는 협정문 조항들을 수정해 국제통화기금이 “질서 있는 자본자유화 움직임”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쯤 잠정위원회는 회원국들의 금융시장에 대한 국가적 규제를 제거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이동과 모든 종류의 재정수단과 거래에 대한 제약 조건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했다.

사실 IMF는 처음부터 줄곧 국가적 경제정책에 대한 감독과 경제정책들에 대한 훈육적인 통제에 관심을 두어 왔다. 국제통화기금은 국가 사이 평등 개념 같은 것을 바탕으로 설립한 민주적 기구가 아니었다.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이 협력해 고안한 이 기구는 세계의 경제에 대한 단일 관점을 수립하려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이 기구가 워싱턴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미 재무부가 지배하는 의사결정 구조를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기구의 표결제도는 미국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데에 유리한 구조이고,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은 채택되지 않거나 아예 논의조차 될 수 없도록 짜여 있다(Richard Peet 2003).

(2) 국제 결제 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달러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하는 국제기구 가운데 국제 결제 은행을 빼놓을 수 없다. 국제 결제 은행은, 스위스 바젤에 자리 잡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금융 기구이다. 원래 이 기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1929년에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의 배상금 문제가 흐지부지 끝나자, 이를 계기로 1930년 5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국제 결제 은행의 처음 정관에 따르면 이 기구의 목적은 중앙은행 사이 협력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BIS는 일종의 친목단체인 셈이었는데, 다양한 이론 활동을 통해 여러 나라들의 금융정책을 조정하는 등 나름대로 역할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갔다.

사실 브레튼 우즈 협상 때는 국제 결제 은행의 해산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 기구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 기구의 해산 결의안은 노르웨이 정부가 제안한 것으로, 노르웨이 정부는 바젤에 기반을 둔 이 중앙 은행가들의 기구가 1930년대 말과 전시에 독일에 협력한 죄가 있다고 주장했다. 협상 때 해산 결의안을 강력히 지지했던 모겐소(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와 화이트(당시 브레턴 우즈 미국 쪽 대표)는 국제 결제 은행의 유지에 반대하면서, 국제 결제 은행의 폐지를 1931년 이전에 국제 금융 질서를 지배했던 국제 은행가들과 전쟁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Helleiner 1994).

▲ 국제결제은행(BIS)의 모습. [블로그 갈무리]
▲ 국제결제은행(BIS)의 모습. [블로그 갈무리]

여러 나라 은행가들은 당연히 해산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은행가들은, “가능한 한 이른 시점에” 국제 결제 은행을 폐지한다는, 브레턴우즈에서 통과된 결의의 실행을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뉴욕 은행가들도, 국제 결제 은행이 정통 통화 이론의 아성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중앙은행들 사이의 협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예상에서, 이 기구의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도 브레턴 우즈 협상 초반 분위기와는 달리, 달러를 기축 통화로 삼는 데에서 이 기구의 활용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해산 결의는 없던 것으로 유야무야 돼 버렸다.

1970년대 초가 되면서 국제 결제 은행의 역할이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여러 나라들이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고, 유로 달러가 증가하면서 국제 금융시장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로달러 시장에서 오일 달러를 받아서 개발도상국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국제 은행들의 활동 증가가 금융팽창을 이끌었다. 그러나 은행들의 공격적인 영업에 따른 금융의 팽창은 은행 파산의 가능성을 높였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부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은행 파산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국면에서 국제 결제 은행은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 문제에 끼어들었다.

1975년 2월에 국제 결제 은행은 은행들의 건전성 문제를 다룰 제1회 바젤위원회를 열었다. 바젤위원회에서는 BIS 규제로 알려진 여러 규제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은행들의 자기자본 규제 방안이 마련되었는데, 1988의 BIS 규제안, 1992년의 바젤 I 규제안, 2001년의 바젤 II 규제안, 그리고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2010년의 바젤 III 규제안으로 발전해 나간다. 구체적인 규제 내용을 보면 바젤 I는 자기자본 8% 이상 규제, 바젤 II는 더 강화한 자본적정성 규제(기본 자기자본비율 4% 유지, 보통주 비율을 2% 이상 유지), 바젤 III는 훨씬 엄격하게 자기자본을 규제(보통주 유지 비율 4.5%, 기본 자기자본 비율 6% 이상, 유동성과 레버리지 규제를 신규로 도입)하는 것이었다.

바젤위원회에서는 유동성 자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미국과 영국을 한 편으로 하고 나머지 나라들을 다른 편으로 하여 의견이 대립했다. 유동성이 높은 자산의 범위를 미국과 영국은 좁게 정의하자고 주장한 데 비해 거꾸로 다른 나라들은 넓게 정의하자고 주장했다. 만약 유동성의 범위를 좁게 정의한다면 국채와 중앙은행이 발행한 채권만 유동성 자산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이는 은행들이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채와 중앙은행 발행 채권만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을 기대하여 유동성을 좁게 정의할 것을 주장했다. 금융위기를 기회로 미국 국채 수요를 늘려보자는 것이 미국의 계산이었다. 결국 타협안으로 유동성의 범위를 미국과 영국이 주장했던 것보다 조금 넓히기로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의 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젤위원회에서 은행의 건전성 규제가 도입된 이후, 미국과 영국이 예상했던 대로 글로벌 수준의 금융 위기가 터질 때마다 여러 나라들의 은행들은 더 안전한 자산, 특히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달러 표시 자산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나섰다. 이는 달러 수요의 확대를 의미하며, 미국이 추가로 달러를 발행해도 시장에서 소화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국제 결제 은행 바젤위원회의 은행 건전성 규제는 달러 발행의 확대를 보장하는 또 다른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달러 표시 안전자산을 사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강요된 미국 국채 구입”이라 할 수 있다.

국제 결제 은행이 미국 연준의 이데올로기를 세계적으로 퍼트리는 기구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국제 결제 은행은 중앙은행들의 친목 단체이고 따라서 결의 내용이 강제성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 연준이나 잉글랜드 은행이 주도하여 이끌어낸 토의 결과를 다른 나라들이 뒤따르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국제 결제 은행은 사실상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고 있다. 국제 결제 은행은 금융세력의 이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생산된 이론들은 어렵지 않게 주변으로 퍼지며, 대부분은 주변국의 금융세력들에 의해 수용된다. 물론 이러한 이론들은 주류의 관점 속에서 전개된 것들이며 미국 달러 이해와 주변국 국내 금융세력의 이해에 유리하게 기능한다.

(3) 유로 달러 시장

유로 달러란 미국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달러를 말한다. 미국 바깥의 달러가 주로 유럽에 있는 은행들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유로 달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유로 달러가 거래되는 시장을 유로 달러 시장이라 한다. 유로 달러 시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금융 규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특징은 미국 달러의 발행과 유통을 확장시키는 데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유로 달러 시장의 팽창은 1980년대에 금융 세계화의 전개로 이어지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Eric Helleiner 1994).

처음 유로 달러 시장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냉전이었다. 냉전 초기에 소련이나 중국 등은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런던에 예치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 맡겨두면 미국이 그 자금을 몰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런던의 은행들은 이 자금을 다른 곳에 대출함으로써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유로 달러 시장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첫째, 달러의 미국 밖 유통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세계 시장에서 미국의 제조 기업들이 누리던 상대적인 생산성 우위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일본이나 독일의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의 생산성을 바짝 뒤쫓았다. 그 결과 미국의 경상수지가 점차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미국이 달러 지출을 늘려야 하는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나 베트남전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 이상의 달러를 유통시켰다. 둘째, 유로 달러 시장은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자율 규제, 지급준비율 규제 등 금융 규제를 받지 않았다. 미국은 1960년대에 대출 이자율을 규제하고 외국 투자에서 발생한 이자에 대해 세금을 매기기도 했다. 이러한 규제는 미국에서 유로 달러 시장으로 옮겨가는 달러의 양을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유로 달러 시장이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한다. 유로 달러 시장 규모는 1964년에 약 90억 달러에서 1971년에는 1,450억 달러로, 그리고 1981년에는 1조 4,000억 달러로 팽창한다(Ramaa Vasudevan 2008). 이와 함께 유로 채권 시장도 팽창하여 1960~70년 사이 그 규모가 8억 달러에서 53억 달러로 늘어난다. 유로 달러 시장을 결정적으로 팽창시킨 사건은 1970년대 오일 달러의 증가였다. 유가가 오르면서 산유국에는 달러가 쌓이지만 비산유 개발도상국에는 상품수지 적자가 쌓이는 비대칭적인 구조가 나타났다. 오일 달러는 유로달러 시장을 통해 비산유 개발도상국에 대출되었는데, 그 규모가 1970년대에 2,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미국은 오일 달러의 경험을 통해서 국제 유동성의 증가가 미국에 나쁘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달러 유통 경로를 만들어주는 유리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유로 달러 시장의 발전에서 특징적인 점은 영국과 미국 정부가 거기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유로달러 시장이 “국적 없는” 금융기관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국가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졌다(Eric Helleiner 1994). 먼저 영국을 보면, 영국 정부는 파운드 헤게모니를 잃은 이후에도 런던이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영국 금융당국은 유로달러 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금융거래에 적용되는 여러 규제를 면제해 주었으며, 유로채권 시장을 독려하는 조치들을 시행했다. 무엇보다 영국은 유로 시장이 런던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시티’라는 물질적인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미국이 유로 달러 시장을 지원한 이유는 달러의 유통 범위 확대와 관련이 있다. 헬라이너(Helleiner E.)는 유로 시장 덕분에 달러를 보유하려는 외국인들의 유인이 커졌다고 설명한다. 1960년대 후반에 달러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은 주변국 중앙은행들에 대해 달러 보유를 늘려 달라는 것과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은 사실상 금환 본위제가 아니라 달러 본위제를 받아달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미국의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특히 달러의 보유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미국은 이러한 어려움을 유로 시장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미국은 유로 시장의 발전이 주변국의 달러 보유를 촉진하여 미국의 금 유출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만약 외국인들이 달러를 유로 시장을 통해 보유한다면, 그만큼 달러의 유통 범위는 넓어지고 외국의 달러 보유량은 증가할 것이다. 유로 시장 지원을 위해 미국은 미국 은행들의 외국지점이 달러 대출을 할 때는 이자평형세를 면제해 주었다. 또한 연방준비제도와 재무부는 미국 은행들의 역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결과적으로 유로 시장은 달러 발행량 증가에 따른 모순을 완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나 영국 말고도 대규모 흑자를 내는 국가들도 유로 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흑자국들은 달러 유입 증가로 국내 신용팽창과 물가 상승을 걱정해야 했는데, 흑자 규모가 너무 클 때는 채권 발행을 통한 달러 흡수가 쉽지 않았다. 흑자국 중앙은행은 유로 시장에서 달러를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려 했다. 이러한 자금은 가끔 금융 투기꾼들의 손으로 들어가 강세가 예상되는 통화에 대한 투기 공격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중앙은행의 시름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한편 유로 시장은 민간 금융기관들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브레턴 우즈 체제는 금융자본에 대한 억압을 내포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 정부가 유로 시장을 지원하고 시장 참여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사실은 금융 억압이 그다지 철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당시 자본 통제가 존재하던 상황에서 유로 시장은 국제 민간 은행들에게 돈놀이를 할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Eric Helleiner 1994).

이렇게 본다면 유로 시장은 국제 통화 시스템이 브레턴 우즈 체제라는 공적 통제에서 민간 통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미국은 결국 민간 금융을 통해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미국이 압도적인 금융시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Eric Helleiner 1994).

*** 여기에서 민간 통제란 민간 금융기관들의 영향력이 증대해 가는 것, 그리고 국가 정책 수립에서 그들의 이해가 적극적으로 반영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달러의 유통과 관련하여 유로 달러 시장이 수행하는 역할은 모순적이다. 자본이동과 환율이 통제된 브레턴 우즈 체제에서 유로 달러 시장은 달러 유동성을 창출하여 전 세계에 공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달러 공급이 늘어났다는 바로 그 사실이 브레턴 우즈 체제의 약화를 이끌고 1980년대의 금융 세계화를 등장시키는 배경이었다. 어쨌든 유로 달러 시장은 브레턴 우즈 체제에서든 그 이후든 달러 유통을 확대하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4) 역외 금융 센터

역외 금융센터(Offshore Center)란 “비거주자 간의 금융거래에 대한 조세 및 외환·자본상거래의 계약을 예외적으로 면제 또는 축소해줌으로써 그들의 금융거래를 중개해주는 금융센터”를 말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이러한 역외 금융센터가 달러를 국제적인 규모로 유통시키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이유는 세계에 공급되는 달러의 많은 부분이 역외 금융센터에 일단 축적되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비거주자 보유의 달러 표시 자산 잔고의 지역별 분포가 카리브해 금융센터 41.1%, 영국 22.9%이었다(McGuire P.&N. Tarashev 2007). 미국이 공급하는 달러는 역외 금융센터와 영국에 집중된 다음 다시 여러 나라에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역외 금융센터의 발전은 달러의 유통 확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영국의 “시티”는 사실상 조세회피지역이다(Nicholas Shaxson 2011).

이 역외 금융센터는 조세회피지역을 포함하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9년에 추산한 바에 따르면 여기에 숨겨진 자산 규모가 1조 5,000억〜11조 5,000억 달러에 이른다. 또한 런던에 본부를 둔 조세정의네트워크는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세계 곳곳의 조세회피처로 흘러간 금융자산 누적액이 최소 21조 달러에서 최대 32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조세회피지역이 달러의 유통 확대에 기여한다는 점 때문에 미국은 일찍부터 정부 차원에서 조세회피지역의 금융거래를 지원하고 보호했다. 니컬러스 색슨(Nicholas Shaxson)은 『보물섬』에서 조세회피지역이 성장하는 데에, 미국 정부나 영국 정부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가를 설명한다(Nicholas Shaxson 2011).

***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조세회피지역 규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얼마나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참고 문헌]
Eric Helleiner(1994), States and the Reemergence of Global Finance, 정재환 역(2010), 『누가 금융 세계화를 만들었나』, 후마니타스.
Nicholas Shaxson(2011), Treasure Island: Tax Havens and the Men Who Stole the World, 이유영 옮김(2012), 『보물섬』, 부키.
Ramaa Vasudevan(2008), “The Borrower of Last Resort: International Adjustment and Liquidity in a Historical Perspective”, Journal of Economic Issues Vol 42. no4.
Richard Peet(2003), Unholy Trinity, 황성원, 박형준 옮김(2007), 『불경한 삼위일체』, 삼인.

원문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lec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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