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패권에 의한 금융팽창과 금융종속(12)
미국은 달러의 발행과 유통의 확대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 미국이 얻는 이익은 주변국들에게 이러저러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강요된 자본·금융시장 개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 때 세계시장에서 가장 높은 생산력과 가장 거대한 경제 규모를 자랑하던 미국 경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을 중심으로 상대적인 생산성이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후발국들에게 뒤지기 시작한다. 이를 반영하여 미국의 경상수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 적자로 돌아서고 1980년대 이후에는 거대한 규모로 늘어난다. 이때부터는 경상수지 적자 보전을 위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것이 미국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미국은 무엇보다도 국내 금융시장을 외국의 자본을 이끌어 들이는데 유리한 쪽으로 바꿔나갔다. 이와 아울러 주변국들에 대해서는 압박을 가해서 자본·금융시장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주변국들의 자본·금융시장 개방을 통해 미국이 달성하고 했던 것은 주변국의 금융시장을 키움으로써 달러의 발행과 유통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먼저 미국은 주변 선진국들의 자본·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1984년 5월에 미국과 일본의 “달러-엔 위원회”는 미국의 도날드 리건과 일본의 대장상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보고서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일본 금융시장 자유화, 외국 금융기관에 의한 일본 시장 참여 확대, 유로 시장 자유화에 대해 일본이 대응해야 하는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그리고 일본 국내의 금융 세력의 이해를 반영하여 일본은 금융 자유화와 시장개방을 추진했으며, 1986년에는 동경에 오프쇼어 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도 자본 자유화와 시장개방을 요구하여 관철시켜 나갔다.
1980년대 말 무렵부터 미국은 주변 개발도상국들에 대해서도 경제력에 걸맞은 금융자유화와 시장개방을 할 것을 요구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미국의 금융 자유화와 시장개방 요구가 더욱 거세지는데, 이때에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국제기구들(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국제결제은행 등)이 앞장서서 미국의 희망 사항들을 관철시켜 나간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미국과 협력하면서,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에 대해 국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본이동 규제 완화, 금융시장 개방, 금융시스템의 전환 등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국제통화기금은 금융시스템을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사실상 미국 방식의 표준)에 따라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렇게 본다면 여러 나라들의 자본·금융시장의 개방은 미국의 강요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주변국 안에도 금융과 자본시장 개방으로 이득을 얻는 계층이 존재하며 이들은 개방 정책의 지지 세력이다.
글로벌 과잉 화폐자본의 형성과 금융자산 팽창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글로벌 과잉 화폐자본의 형성과 금융자산 팽창으로 이어진다. 주변국이 미국에 수출을 하여 받은 대금은 미국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은행 계좌에 입금된다. 이리하여 미국 은행 대차대조표의 부채(예금)가 늘어나는데, 미국 은행들은 이를 바탕으로 대출이나 자산 매입을 늘려나갈 수 있게 된다. 미국 은행들은 미국 내 투자를 위한 자금도 빌려주지만 미국 밖의 투자를 위한 자금도 빌려준다.
미국 투자자들이 미국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서 주변국의 증권투자나 직접투자를 늘려나가면 세계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난다. 여러 나라 경제주체들이 발행하는 유가증권(주식, 국공채, 회사채 등), 금융시장에 편입된 부동산 등은 세계시장에 공급된 달러의 투자 대상이 된다. 한편 달러를 기반으로 한 자산 투자가 증가하면 자산 가격이 올라가는데, 이처럼 달러 공급의 증가는 세계적으로 금융자산을 팽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 증권투자든 직접투자든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에 투자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증권투자라 하더라도 지분율이 어느 수준(대체로 10%) 이상이어서 기업 경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직접투자로 분류한다.
화폐자본 가운데 유동적 형태로 금융·자본 시장에 머무르는 부분을 보통 유동성이라 하는데, 글로벌 수준의 유동성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반영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실물 경제에서 투자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투기적 동기를 갖는 유동성으로서 국제 금융시장을 흘러 다닌다. 만약 이러한 유동성이 과잉이라면 이는 인플레이션 과정을 통해 그 가치가 파괴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유동성이 국채, 사채, 주식과 같은 투자처를 찾아낸다면 그 유동성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된다.
미국이 재정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고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을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서 흘러나온 유동성이 떠받친다면 미국으로서는 국채 발행량을 낮은 이자를 지급하면서 늘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가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이 발달해야 하며, 금융·자본시장이 실물경제에서 자립하여 운동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여러 나라들의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부터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금융시장을 팽창시키는 요인이었다.
** 유가증권을 발행하는 시장을 1차 시장, 발행된 유가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을 2차 시장이라 한다.
금융시장의 팽창을 배경으로 미국이 다시 달러 발행을 늘려서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나가면 세계시장에는 유동성으로 표시되는 달러 발행량이 더욱 늘어난다. 이런 식으로 1980년대 이후에 금융자산의 규모가 미국뿐만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현실경제와 분리된 금융·자본 시장의 독자적인 팽창은 주변국의 금융시스템을 불안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꼭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외환 보유 비용 떠안기
미국이 달러 발행을 늘리는 바람에 달러가 주변국에 밀려들면 그만큼 주변국의 화폐량이 증가하므로 주변국의 중앙은행은 이른바 불태화 개입(sterilizing intervention) - 달러가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는 - 을 통해 이를 중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예컨대 주변국 중앙은행이 자국 화폐를 발행하여 달러를 사들이면 외환보유액이 증가하는데, 이 증가한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든다. 또한 달러 유입에 따라 주변국 화폐 발행량이 늘어나면 주변국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달러 가치 하락에서 비롯한 인플레이션의 부담을 주변국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달러를 발행하여 적자를 메울 수 있는 미국은 외환시장에서 자국 통화의 환율을 유지할 책임에서 자유롭다. 곧,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상대국이 외환 준비금으로 보유하게 할 수도 있고1), 환율보고서에 환율 조작국으로 올리거나 올린다는 위협을 하는 등 환율 압박을 통해 국제수지 불균형의 조정 책임을 상대국에 부담시킬 수도 있다.
***더욱이 미국이 금리를 1% 낮추면 주변국 중앙은행은 이 1% 금리의 미국 국채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야 한다(Michael Hudson 2003).
바수데반(Ramaa Vasudevan)은 경제적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최후의 대부자가 아니라 최후의 채무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패권국에게는 돈을 빌려줄 여유를 가지는 것보다 빚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경제적 패권국은 자국이 화폐 발행량을 늘려 그 가치가 흔들릴 때 거기에서 생기는 부담을 주변국에 떠넘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변국에 비용을 떠넘긴다는 것은, 예를 들어, 달러의 발행과 유통 메카니즘을 통해 주변국의 상대적인 화폐가치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이다.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주변국 기업들의 소유권
앞서 본 바와 같이 미국이 달러 발행을 늘려서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면 미국 금융기관들의 예금이 증가한다. 미국에 대한 수출국 기업들이 미국 금융기관에 하는 예금은 일종의 강제된 저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제 상품 거래 대금이 대부분 달러로 결제되기 때문에 기업들은 거래 준비금을 대부분 달러로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은행들은 늘어난 예금을 놀려둘 수 없기 때문에 대출이나 유가증권 운용으로 돌려야 한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이 예금을 대출받아 주변국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을 사들임으로써 주변국 기업들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수 있다. 반면 주변국의 중앙은행은 미국의 투자자들이 가지고 온 달러를 다시 주로 미국의 국채나 공공채권에 운용하게 되는데, 두 거래를 총괄하면 주변국은 자국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미국 투자자들에게 내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1%짜리 국채를 받아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Michael Hudson 2003).
[본문 주석]
1) 더욱이 미국이 금리를 1% 낮추면 주변국 중앙은행은 이 1% 금리의 미국 국채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야 한다(Michael Hudson 2003).
원문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leco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