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

11월 20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진행되었다.
1976년 2월 29일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에 맞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을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을 2019년 3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 후 43년 만에 발기 3인의 공개적 합동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작년은 코로나19 확산사태로 추석성묘만 하였으나 올해는 이재문 선생 40주기를 맞아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경북대학교 민주동문회, 남민전 동지회,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대구경북지역대학민주동문(우)회 협의회, 대구경북추모연대, 여정남기념사업회 주최로 민족민주운동단체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를 개최하였다.
이재문 선생은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바친 혁명가 이재문 열사’로 씌어진 묘비명과 같이 불꽃처럼 싸우다 고문에 의해 돌아가셨다.
이재문 선생은 남민전의 서기로 혁명 조직 운동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
모든 운동에 앞장서서 실천하고 조직하며 지도하여 후학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또한 우리운동의 비사를 많이 알고 있어 전술에 많이 응용하였다.
예비군훈련장 무기 획득과 학교,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 삐라살포 그리고 투쟁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상과 당시 민중 공분 대상 중 하나인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 강탈 등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은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반동의 음모에 희생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예이지만, 모든 가능한 위협에 대비해 철통같은 신변 보호와 보안 예방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 암살당한 것처럼 제국의 앞잡이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보안 허점을 찾고 실행을 옮기기 위해 계획도 세운 것으로 전해온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살인하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기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재문 선생과 남민전 투사 그리고 전사가 목숨을 던지는 투쟁을 한 것이다.

남민전을 발기했던 당시 세분 선생의 걸어온 길은 인혁당, 전략당, 통혁당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다.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이후 계속해서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중이었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 1968년 통일혁명당에 사건으로 구속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상태였다.
세분 선생은 비밀유지를 위해 1976년 2월 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여 목표를 분명히 한다.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척결대상이고 그 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된다. 그리고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적으로 한 전선운동이었다.
이재문 선생은 고문으로 적십자회병원에 나왔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옥사(사형집행 전 1981. 11. 22.)하고 신향식 선생은 사형집행(1982. 10. 8.) 당한다.
오늘 추모제가 거행된 마석모란공원에는 출소 이후 쉬지 않고 운동하다 병마로 각각 운명한 박석률, 이해경, 김희상, 김충희 선생이 있다.
그리고 벌써 돌아가신 분들이 김병권, 신향식, 안재구, 이재문, 이해경, 김남주, 김봉권, 김세원, 김충희, 김홍, 김희상, 나강수, 박문담, 박석률, 백정호, 서혜란, 이문희, 이호덕, 임동규, 임인영, 전수진, 조태범, 최강호 선생 등 모두 23분이 된다.
오늘은 서기인 이재문 선생의 40주기이나 모두 23분에 대한 합동추모제를 겸하고 있다.
추도사는 남민전동지회를 대표하여 최석진 선생과 조성우(6.15 남측위 상임대표), 석원호(여정남기념사회회 회장), 김찬수(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장) 등이 하였고 남민전동지회를 대표하여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인사를 하였다.
남민전 동지 김남주 시인의 이재문 선생 “전사 1” 마지막 구절로 추모의 결의를 대신한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 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