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해외측 故 곽동의 위원장 5주기 추모모임

6월 9일.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故 곽동의 위원장 5주기 추모모임’이 개최되었다.
6월 9일.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故 곽동의 위원장 5주기 추모모임’이 개최되었다.

4.19혁명은 해외 그중에서도 일본 교포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특히 변화의 대표적 인물로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의 곽동의 선생과 조용수 선생이 있다.

곽동의 선생은 193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948년 일본 리쓰메이칸대(立命館大学)에 유학을 하러 갔다. 그는 6·25전쟁 당시 재일학도의용군에 자원할 정도로 ‘우익청년’이었고 1950년대 이후 민단 대한청년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용수 선생은 1930년 진주에서 태어나 1951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 정경학부 2학년으로 편입하여 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으로 활동한다.

두 분 선생은 동갑으로 1954년경부터 민단에서 함께 활동하였으나, 4월혁명 공간의 자주·민주·통일운동의 영향으로 곽동의 선생은 민단을 ‘이승만 민단’으로부터 ‘민주 민단’으로 변화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조용수 선생은 국내에 귀국해 민족일보를 창간하며 사장이 된다.

민족일보는 4·19혁명으로 통일운동이 분출하던 시기인 1961년 2월 13일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을 사시(社是)로 창간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조용수 사장과 주요 간부들은 체포되고 5월 19일 계엄사령부로부터 폐간처분을 받아 92호 만에 폐간된다.

그리고는 혁검에 의해서 1961년 12월 21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한다.

곽동의 선생은 약소 민족 운운하며 미국의 식민지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승만 정권의 본질을 깨닫고, 재일한국청년동맹을 시작으로 ‘우익청년’에서 ‘민주청년’으로 민단의 민주화에 앞장선다.

이후 선생은 1973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의 전신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초대 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에 참여해 조직국장과 사무총장 등을 지낸다.

그 뒤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본에서 활발한 구명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한민통 조직국장 시절 ‘김정사 간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한통련은 1978년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그동안 귀국이 불허되었다.

다행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귀국이 허가되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또 귀국이 불허되었다.

한통련은 2011년 9월 23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왔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아직도 전면적 귀국은 허가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에도 귀국을 위한 여권 발급은 일부만 허용되었다. 그것도 ‘한통련의 완전한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회장 최병모)의 노력으로 겨우 일반여권만 발급되었을 뿐이다.

현재 한통련 손형근 의장의 여권 발급을 거부당하고 있다.

2014년 8월 서울고법 제1형사부는 한통련에 대해 "강령, 구성원, 활동 등에 의하면 한통련은 반국가단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재심 대상 판결에서 한통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였던 근거가 된 것은 김정사 사건의 판결이었는데, 김정사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김정사에게 무죄가 선고되어 확정되었다"라고 밝혔고, 이좌영 씨와 관련된 '울릉도 간첩 조작사건'이 무죄라는 이유를 들어 재심을 결정한 바 있다.

선생은 1989년 2월 출범한 한통련의 초대 의장으로 활동하며,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일본지역본부를 결성하고 그해 열린 1차 범민족대회에 해외동포참가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범민련 3자연대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한다.

특히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6·15공동위원회) 결성에도 누구보다 선생은 앞장섰다.

선생은 2010년 한 언론사와 서면 인터뷰에서 6·15공동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그 어떤 정세의 변화가 있어도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끝까지 고수 실천하겠다는 결사의 각오와 의지, 원칙적인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민족대단결의 기치 아래 남북공동선언을 지지, 이행하는 사람이라면 사상과 정견, 소속과 과거 여하를 불문하고 그 누구와도 폭넓게 손잡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운동을 보다 다양화, 대중화, 일상화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한통련은 2009년 수유리 4·19묘소 ‘4월혁명 49주년 합동참배식’에 참가하였다.

당초 4월혁명 정신의 계승을 손형근 한통련 의장이 기념사로 발표하기로 하였지만 18일 귀국하자마자 국정원의 압수수색으로 공항에 억류되어 박남인 한통련 중앙본부 조직국장이 대신해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당시 손 의장은 "4월혁명은 재일한국인 청년들을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각성시켰다…. 4월 혁명정신 계승을 다짐한 재일한국인 청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분단 이데올로기의 속박을 타파하고 조국의 자주통일을 지향하는 재일한국청년동맹, 한청을 결성하였다…. 저를 포함하여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한통련 대표단 성원 모두가 한청 출신자이며 한청의 현역 활동가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대표단 모두가 4월혁명 정신의 계승자"라고 밝혔다.

곽동의 선생과 한통련은 4월혁명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존경하는 자주‧민족‧통일운동의 큰별 곽동의 선생님!

영원한 한통련 의장, 곽동의 선생님!

살아 있는 우리들은 분단의 원흉 미국과 일본에 맞서

우리 어깨 위에 지워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과업을

우리는 결코 벗지 않고

통일된 그 날까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자주‧민족‧통일을 위해 걸어온 길을!

 

<곽동의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약력>

- 1930년 7월2 6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출생.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옴.

- 1960년 4월 재일한국청년동맹 결성. 초대 위원장.

- 1973년 8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 결성. 조직국장, 사무총장.

- 1989년 2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결성. 초대 의장 (~2004)

- 1992년 2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에 참여, 범민련 해외본부 부의장

- 2004년 10월 한통련 고국방문단으로 44년만에 고국인 한국 방문.

- 2005년 3월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결성에 참여,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공동위원장(현재까지),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 의장(~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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