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4월혁명 정신 계승과 노동문제 학자, 특히 일제강점하 노동자 강제 동원 연구 그리고 경희대 후진 양성에 활동해 오신 전기호 교수가 지난 6월 14일 오후 9시경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83세

경희총민주동문회, 민족문제연구소, 사월혁명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4·9통일평화재단은 6월 16일 동지와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이 참가한 가운데 경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민주화와 역사정의 실현의 선도자 고 괴산(槐山) 전기호 교수 추모의 밤>으로 거행하였다.

비록 전기호 선생은 학자였지만 4월혁명과 통일에 대한 신념 그리고 후학에 대한 사랑, 특히 가입한 단체에 대한 복무와 헌신 그리고 의리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분이다.

“전기호 선생”하면 <4월혁명>과 <노동문제 학자, 특히 일제강점하 노동자 강제 동원 연구> 그리고 <경희대 민주화와 후진 양성>으로 대변된다.

전기호 선생은 4월혁명 공간에서 영원한 동지 이수병 선생과 1960년 11월 12일에 경희대학 민족통일 연구회를 조직한다. 회장은 이수병 선생이 맡고 선생은 대의원회 의장을 한다.

당시 학생들의 의식 수준은 완전히 반공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어 급진적인 운동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60년 11월 25일 교내 소강당에서 통일문제 대강연회를 열었는데 열기가 대단하여 이후 교수강연회, 토론회 등 이런 사업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아쉽게도 4·19혁명은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4·19혁명 주동 세력이 주로 학생인 관계로 전반적으로 의식화·조직화를 이루지 못하고 선도적인 역할만 하다 보니 정국을 장악하지 못하고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

4·19혁명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인 자주·민주·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으로 전환되질 못하고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1972년 이수병 선생이 삼락일어학원을 개원하자 일어 강사로 참가하지만, 1974년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이수병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은 국가 살인을 당한다.

아마 동지들의 법정 투쟁과 교수라는 신분이 선생을 사건에 연루시키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선생은 한평생 멍에를 지고 살면서 4월혁명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살아간다.

선생은 이후 1988년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 창립에 참여하고 이사장을 역임하며 사월혁명회와는 떼 놓을 수 없는 조직으로 평생을 함께한다.

전기호 선생이 학문의 길로 가게 된 것은 4월혁명의 반동인 5·16군사쿠데타 때문이었다.

5·16혁검에 의한 체포가 아니었더라면 취업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운명적으로 선생을 학문의 길로 가게 했다.

그리고 노동문제를 주로 연구하며 1976년 4월에 한국노동경제학회 창립에 참여한다.

당시 노동상황은 ‘일은 시키는 대로, 품삯은 주는 대로’였다.

선생은 노동자를 위한 또는 민주화를 위한 논문을 잡지에, 대학 신문에 논문형식으로 발표한다. 그리고 1990년에 한국노동경제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선생은 절대로 살아있는 한은 자본가를 위해서 좁쌀만큼도 이론을 보태주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특히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될 때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과정과 노동조합 전국조직’을 발표하며 전노협은 좌익이 아니고 정당한 노동운동을 하는 단체라고 격려한다.

또한 1992년 여의도 법정, 시민 법정에 출연하여 파업에 대한 ‘무노동무임금’을 제일 처음 도입한 대우그룹에 대해 여의도 법정에서 선생은 검사로 고발을 한다.

뿐만 아니라 1995년 이후는 일제강점하 조선 노동자들의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를 하며 논문을 발표한다.

연구를 한 계기는 노동문제를 전공하였지만, 국내는 강제징용에 관련된 연구가 거의 없고, 일본 총련 계열 사람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 국내도 이론화, 체계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연구가 결실을 맺어, 선생은 2004년 2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일본을 설득하여 우선 강제동원으로 희생당한 분들의 유골송환 협상을 이뤄냈다. 이렇게 송환된 유골은 101위였으며, 현재 '망향의 동산'에 모셔져 있다.

전기호 선생은 경희대 민주화와 후진 양성에 그 누구보다도 헌신과 열성을 다하였다.

1967년 시간강사 시절 경희대 민족주의 계열의 정신을 이어받은 백단학회(전신 한민족부흥회)의 지도교수를 맡는다. 보통 전임이 아니면 지도교수를 사실 맡지 않지만, 선생은 4월혁명 공간의 민족통일연구회를 생각하고 1980년까지 지도교수를 한다.

1980년 경희대 학내민주화선언에 참가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경희대교수협의회 초대회장을 맡는다.

또한 1988년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 결성에 자문 교수로 참가, 1991년 경희대 졸업생들이 주축을 이룬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한다.

특히 경희대학교 전신인 신흥무관학교를 조명하기 위해 2011년 공동대표로 참여한다.

그야말로 경희대 민주화와 민족문제연구소,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후배 양성을 위해 헌신한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마 그것은 선생이 산내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아 거의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데, 대학을 포기한 제자를 아끼던 스승들이 어디든지 대학만 가면 우리가 학비를 대 주겠다고 용기를 준 것이 평생 선생이 이런 의리의 길로 가게 한지도 모른다.

선생은 이런 스승의 사랑과 배려를 기억하고 환갑 되던 1998년부터 매년 백만 원 정도 고향 학교에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존경하는 전기호 교수님!

조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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