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 소설

  지리산 골짜기 심심산골 구례 땅 토지면 삼식(三植)이네는 모진 목숨 그냥 앉아 죽을 수가 없었다. 젖먹이는 등에 업고 네 살짜리는 손을 잡고 서방 각씨는 이불 보따리 이고 지고 집을 나섰다.
  깔(꼴)담살이로 시작해서 남에 집살이(머슴살이) 십여 년에 땅 한 뙈기 없는 신세에 무슨 배짱에선지 새끼들을 퍼 내질러서 아들 둘이 더 있었다. 일곱 살배기 등에는 바가지 한 쪽 귀 떨어진 솥단지 하나, 열 살짜리는 중도 폐지한 책봇따리에 여섯 식구 옷가지 몇 벌을 둘러맸다. 해질녘에 구례구역을 출발하는 서울행 밤 열차를 타기 위한 것이다.
  다음 날 새벽 이들이 찾아든 곳은 서울 의주로변에 덕지덕지 늘어선 하꼬방촌이었다. 석 달 전에 먼저 올라와 자리 잡은 집안 재당숙네 월셋방이었다.
  복이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필이면 요즘 한창 당국의 도로변 판잣집 철거령이 내린 곳이었다. 의주로변은 도시의 중심지에 해당한다고 철거대상 제 1호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코딱지만 한 재당숙네 판잣집 월셋방에서 여섯 식구가 새우잠을 잔지 이틀 만에 청천벽력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판잣집이 강제 철거되었다.
  의주로변 판잣촌엔 일부 셋방살이를 포함해서 12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입주민 8백여명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왔던 곳이다.
  큰길가라 자동차 전차소리, 사람 오가는 소리 온갖 소음에 먼지바람, 도로변 하수구 시궁창 오물냄새 구석구석 연탄재와 쓰레기가 쌓여 썩고 있었다. 그래도 부부가 살을 비비고 어버이 자식이 얼굴 맞대고 구들장에 등을 누이는 삶의 보금자리였다. 뜨거운 여름이면 루핑 덮은 판잣지붕이 불을 담아 부어도, 구멍 난 판장벽 틈새로 살을 에는 동지섣달 칼바람이 새어들어도 하루살이 곤한 목숨들이 깃들이는 작은 둥지이었다.
  구례 땅 전라도 촌놈 삼식이네 여섯 식구는 오도 가도 못하고 거기 주저앉아 있었다.
  삼식이네 뿐만이 아니고 의주로변 철거민 8백여 명은 모두 거기 주저앉아 있었다. 날품팔이 지겟꾼, 팥죽장사, 떡장사. 빙수장사. 땅콩니아까. 청소차 똥푸이, 연탄배달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시내 중심지를 떠날 수가 없었다. 변두리 산 밑이나 허허벌판으로 쫓겨나는 것은 이들에겐 곧 그만 살고 죽으라는 것과 똑같았다.
  이렇게 생존권을 박탈당한 주민들 중에는 차장, 식당뽀이, 신문배달, 넝마주이, 껌팔이, 구두닦기, 외톨이 고아출신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 철거민들에게 베풀어지는 당국의 배려는 향후 10일 간의 구호양곡이 주어지는 것 외에는 물 한 모금도 더 주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서울 중심지에서 제1차 철거 대상 판잣집이 무려 8.752동에 이른다는 것이다. 1차 철거대상 꼬방동네  주거 인구는 63.264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 청계천 판자집촌
▲ 청계천 판자집촌

   사실은 서울시내 하꼬방 철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해 벌써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청계천변 일대의 판잣집 철거 일제단속이 있었다. 서울역  건너편 양동 일대 창녀촌 언저리의 하꼬방촌도 철거대상이었다.
  철거대상 주민들은 이번처럼 몇 백 명 단위가 아니고 구역별로 무더기 무더기 수천 명 단위였었다.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추럭에 실어 가좌동에서도 한참을 서쪽으로 내려가는 모래내 하구 습지대인 난지도 쪽에 버렸다. 구호식량이랍시고 며칠 분을 따질 것도 없이 강냉이 가루 몇 포대씩을 무더기 무더기 던져 주는 게 고작이었다.
  이천 명 삼천 명 너무 많은 숫자를 한군데 모아두면 큰 집단이 되어 저항을 하고 난리를 칠 것에 대비, 이곳저곳에 적당히 분산 배치되었다.
  뚝섬 채소밭 똥구덩이 황무지에 모래톱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몇 날 며칠에 걸쳐 철거민들을 추럭에 실어다 버렸다.
  이렇게 버려지는 빈민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뚝섬 똥구덩이 모래톱에는 제법 상당한 규모의 마을 하나씩이 생겼다.
  난지도쪽 물 젖은 땅에는 비교적 자리를 넓게 잡은 대여섯 개의 천막촌이 들어섰고, 뚝섬 똥구덩이 모랫톱에는 양쪽 구릉을 따라 천막촌이 생겼다. 천막을 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땅을 파고 움막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판잣쪽을 주어다가 얼기설기 세워놓은 하꼬방도 분에 넘치는 호화판 잠자리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배당된 강냉이 가루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계획에 의해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배당된 강냉이 가루마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또다시 먹을 것을 찾아서 옛 생활터전을 다시 찾아들 수밖에 없었다. 양동이나 한남동 산자락, 청계천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른들은 연탄불이라도 피워놓고 부둥켜안고 죽는다지만 저 눈 까막까막한 어린 것들은 어찌한담...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살기 싫어도 살아야 했다.
  한편 생각하면 악이 받쳤다. 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가? 대대로 잘사는 놈들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땅 한 뙈기 없는 촌 농민으로 태어나 땅부잣집 고공(雇工)살이 하다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려고 불원천리 서울 땅을 밟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서울역 광장에는 지게 지는 기술 하나만 믿고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이 무려 4백여 명이나 되었다.
  전쟁 통, 전쟁이 끝나고도 5,6년 동안 서울역에 모여든 지겟꾼들이 거짓말 빼고 1개 사단은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지겟꾼 사단은 서울역 뿐만이 아니고 청량리 영등포역을 비롯하여 전국의 각 도시의 기차역마다 넘쳐나는 현상이었다.
  땅 없는 농민들은 말할 것이 없고, 밭 몇 마지기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天水畓) 몇 다랭이 뿐인 영세농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살길이 없었다. 쌀밥은 아예 하늘에 계시는 옥황상제님이나 잡수시는 것이고, 잘 먹어야 꽁보리밥에 밀개떡, 보리죽에 쑥버무리, 고구마 아니면 송기죽이었다.
  모래내 하구 난지도 쪽에 버려진 바닥인생 중에 변산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부안출신 박광선이라는 환갑진갑 다 지난 노인이 있었다. 한물간 몸뚱아리라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는 형편이었다. 배운 것이라곤 지겟짐 지는 재주뿐이라 새벽 5시부터 자정 통금 싸이렌이 울릴 때까지 서울역에서 지겟짐을 나르고 있었다.
  운수가 터져서 잘 버는 날은 5,6백환 벌고 보통 하루 4,5백 환을 번다. 빈창자로 등짐을 질 수 없으니 백환짜리 백반 세끼에 3백환이 든다. 방이 비좁아 바로도 못 눕고 옆으로 비비틀어서 하룻밤 자는데 숙박비가 1백환, 쓴 담배 한 값에 50환이 들어간다. 밤늦게 짐을 기다리가 통금에 걸려 집에까지 갈수가 없는 것이다.
  재수가 등창이 나는 날은 백환짜리 백반 대신 50환 주고 꿀꿀이죽을 먹고 담배는 길거리에 버려진 꽁초를 주워 피워야 한다. 
  박 노인은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버렸는지 기가 막히는 것이다.
  이렇게 민생이 파탄이 나서 남한사회 전체가 피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미국이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남조선 경제는 더 이상 악화될라야 악화될 여지가 없었다. 최악의 조껀에서 최악의 밑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는 판에 북한에서 굶주리는 남녘동포들을 위해 쌀을 보내겠다고 정식으로 제안을 해온 것이다. 북조선 농민동맹에서 갹출한 50만석의 미곡을 남조선 적십자사가 지정하는 장소에  전달하겠다는 통보였다. 북조선 적십자사가 평양 방송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남한 정부 당국으로서도 매우 부끄럽고 면목이 없게 되었지만 미국 역시 허를 찔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은 남한 땅을 점령한 식민 종주국으로서 북조선공화국정부에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된 것이다.
  이 기회에 대한(対韓) 원조정책을 강화하고 남조선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내외에 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지지부진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남조선의 진흙탕경제를 미국이 적극적으로 직접 나서서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을 믿고 하늘처럼 받드는 남조선백성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안도감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보다 더 남조선 식민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세우고 남조선 부흥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속 다르고 겉 다른 이른바 ‘한‧미경제협정’ 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확실히 경제 지배를 명문화하여 꼼짝을 못하게 남조선 경제를 손아귀에 틀어쥐어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쫓겨나고 그동안 길을 잘 들인 민주당 신파(新派) 장면을 내세워 놓았더니, 식은 죽 먹기는 콧등에 땀이라도 나는데 이건 한 여름에 냉수 마시기 보다 더 시원하게 말을 잘 듣는다.
  장면은 미국대사시절부터 치즈덩어리도 좀 먹이고 머리통에 빠다를 발라 머리가 잘 돌아가게 훈련을 시켰었던 것이다. 좀 소심한 데가 있어서 일을 망설이거나 말을 잘 안들을 땐 서부활극에서 쌍권총을 차고 설치는 케리 쿠버 사진을 코앞에 들이 대곤 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 미국무성에서 주한 메카나기대사를 시켜 겨우 한마디 전했는데 어떻게나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 듣던지 국무성이 놀랄 정도였었다. 미국 측 원안대로 글짜 하나 고치거나 빠진 것 없이 ‘한‧미경제협정’이 지난 2월 8일 그대로 체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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