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 소설
서소문로 뒷골목 리아까에서 국수 한 그릇씩을 달게 먹고 가까운 덕수궁에 들렸다.
그들은 석조전 앞 정원 장의자에 앉아서야 비로소 오랜만에 만난 정회를 풀었다.
박정희 일당이 꾸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세상이 뒤숭숭 이상해져 버렸다.
‘중앙정보부’ 라는 괴상망측한 괴물이 생겨나서 세상은 온통 인심 흉흉한 공포의 바다가 되었다.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가까운 동무까지도 믿을 수 없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는 흉흉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하여 크게 문제가 되는 판이었다.
각계각층 사람들 사이, 사회 전체에 어느 직장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밀정 밀대가 숨어 있었다. 온 세상에 쫙 깔려있는 것이다.
최신식으로 최최근에 생긴 말로는 그 이름을 밀정, 밀대, 스파이에서 ‘사꾸라’라 호칭한다는 것이다. 박정희나 정보부 쪽 입장에선 매우 아름답고 화사한 멋진 이름인 것이다.
밀정, 밀대는 좀 구식인데다가 그들 입장에선 여간 모욕적이고 듣기에 거북스러운 것이다. 그들에게도 생쥐 불알만한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화끈하게 피었다가 화끈하게 지는 일본 꽃 이름이 듣기에 더 좋은 모양이었다.
어쨌든지 정보원들 자신들이 쓰는 은어인지 몰라도, 최근에 사꾸라란 말이 말 바람을 타고 퍼지기 시작을 한 것이다.
아니면, 민족을 알고 애국심이 강하고 통일을 소원하는 어떤 머리 좋은 민주인사가 지어낸 말인지도 모른다.
한일 협정이 불법적으로 타결된 뒤 일본의 매판자본이 야음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오고 있었다. 따라서 매판자본에 현혹되어 일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매판자본가 친일파들이 독버섯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민주주의와 정의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나라와 민족을 팔고 동지를 배반 권력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밀정 밀대 쁘락치들이 온통 세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었다.
강욱철과 김승국이 덕수궁에 들른 것은 한가한 고궁산책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오랜만에 만난 강.김 두 사람의 해후는 정보부 밀대 스파이 사꾸라들의 매우 좋은 관찰거리였다. 그들은 서로 다투어 정밀 관찰에 나섰을 것이다. 김승국은 북괴찬양, 북괴로부터 남조선 전복 지령을 받고 북괴의 공작금을 받은 혐의로 15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에 출옥을 했다.
그런 자가 외출을 했는데 밀대 스파이들의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 상대는 또 골수4·19 불순분자로 이른바 반정부 학생조직의 배후조종자로 지목을 받고 있는 강욱철인 것이다.
“하하, 저 새끼들 엿 좀 먹이자구.”
“아함, 좋구 말구.”
강욱철과 김승국이 서로 맞장구를 치며 한바탕 웃어넘겼다.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이들은 기운이 살아 넘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가 넘쳤다.
아니다, 그들이 자리잡은 위치가 그들을 그렇게 해방감에 들뜨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통행로가 비교적 가까운 쪽을 등지고, 통행로가 먼 쪽을 앞으로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석조전이 있는 쪽을 뒤로하고 중화전 쪽을 향하여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염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어이, 자네 팬터마임 선수가 아닌가.”
“아니지 자네 제스처가 더 그럴 듯 하지.”
이렇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그들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자리를 사꾸라들이 범접을 못할 위치에 너무 잘 잡은데 대한 안도감이 역력했다.
그들은 농담쪼의 대화로 시작해서 지난 일들을 서로 점검 여러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행동을 한 단계 높여 시급히 돌입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지난 일은 61년 3월 22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거행 되었던 2대 악법 반대투쟁 궐기대회 이후에서 5.16까지의 짧은 기간에 있었던 일이었다. 강욱철이 군대에 끌려들어간 뒤의 일인 것이다.
또한 김승국 동지가 현저동 1번지(서대문형무소)에서 통방(通房)으로 알게 된 동지, 운동시간이나 작업장에서 가까워진 동지들에 대한 의견도 협의 되었다.
무거운 문제가 협의될수록 이들의 몸동작은 팬터마임처럼 희화화되었다.
괜스레 벌떡 일어서서 몸을 푸는 척 팔을 휘젓는다던가 목운동도 하고 다리운동도 했다. 쓸데없이 큰소리로 헛기침도 하고 저능아들처럼 고개를 흔들며 필요이상으로 크게 웃어대기도 했던 것이다.
김승국 동지의 그간의 활동과 지난 일 점검은 특수상황에서 긴박하게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를 보호하고 성과 있게 실천하기 위해선 치밀한 계획을 필요로 했다. 이에 비해서 강욱철 자신이 진행해 온 사업들은 비교적 긴장감이 덜하고, 아직까지는 그 진행수단이 운동단계에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강욱철은 긴박하고 긴장감 짙은 김승국 동지의 활동과 지난 일에서 자신을 비판하고 각오를 다시 하는 바가 많았다. 강욱철 자신도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지금까지의 활동수단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려야한다는 생각을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기합리화에 세상을 바꿀 투철한 정신력의 부족이었다. 구각을 깨고 세상을 뒤집어엎을 확고한 신념과 의지의 부족이었다. 강철 같은 결단력의 부족이었다. 결심에서 실행 실천 행동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행동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없었기였다.
세상이 흉흉하기는 꾸테타 이전에 비해 두 배 세 배로 흉흉하고 그의 목을 조여 오는 검은 그림자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때와 비교가 안 되게 고도화 되고 고차원화 되어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각박하고 긴박하게 돌아가는지는, 택시를 탄 손님이 현 시국을 비판하거나 반공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말을 했다가는 그대로 파출소 직행 고발을 당하는 판국이었다.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이 된 인물들에 대한 사찰, 감시는 고도로 지능화되어 귀신도 모르게 365일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집을 매수하여 샅샅이 손금 보듯 감시를 하는 가하면, 방 문지방이나 창문 구석에 도청장치를 부착하기도 한다.
그들의 요시찰 대상자는 공직은 물론 규모를 갖춘 회사나 사업체에 취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요시찰 대상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까지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때 혈서를 썼던 이창봉 동지 말야...”
“참 그랬었지. 맞아. 이창봉이가...”
그들은 61년 2월 14일에 있었던 ‘전국 대학생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성토대회’ 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라 썼는데, 마지막 느낌표를 찍어야 하는데 피가 멈춰버려서 손가락을 꾹꾹 눌러서 피 한 방울을 쥐어짜듯 점을 찍었다.
“그 친구 대단했었는데, 열정이 펄펄 끌었었지...”
그 날 오후 2시 파고다공원 뒤 ‘낙원극장(樂園劇場)’ 앞에서 ‘전국대학생 한·미(韓‧美) 경제협정 반대투쟁 성토대회’가 열렸었다.
이 성토대회는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民族統一聯盟)’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 10개 대학생 단체가 공동주최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김승국의 성균관 대학과 강욱철의 장안대학도 참가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시절부터 미국은 남조선 경제를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입맛대로 좌지우지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남조선 경제가 4·19 혁명 후 더 취약해지고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미국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남조선 경제를 한 손에 틀어쥐고 흔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남조선 경제는 세계 최하위권의 최 빈곤국으로 미국의 입장에선 경제라고 할 것도 없었다. 6백만명이 넘는 절량(絕糧) 인구에 5백만 명을 헤아리는 실업자 군상이 우글거리는 판이었다.
지난 60년 한 해 동안에 발생한 행려사망자(行旅死亡者)만 1,230명이나 되었다. 남성에 비해 비교적 활동성이 적은 여성 사망자가 407명에 이르렀다.
서울 정동에 있는 구세군 무료급식소 앞에는 강냉이가루 한 줌을 타먹기 위해 날마다 굶주린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시골 들판마을 산골마을 할 것 없이 굴뚝에 연기 나는 집이 몇 집이 안 되었다.
바닷가 외딴 섬마을은 더 심각했다.
풀뿌리 나무껍질이 춘궁기 구황식량인데. 들녘 언덕받이 논두렁 야산자락에도 뜯을 푸나물이 없었다. 흔하게 돋아 오르던 쑥 잎마저도 커 오르기 전에 다 뿌리째 캐버려서 뜯어먹을 쑥도 귀하신 몸이 되었다.
충청도 산골 영동역(永同驛)에는 주로 전라도 무주(茂朱) 쪽에서 벌목한 통나무가 트럭에 실려 왔었다. 시골 아낙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를 긁어 먹었었다.
또 이것을 가족들에게 먹이기도 했었다. 나무껍질 값 30환을 내고 하루 종일 송기를 벗겨 팔면 50환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일금 20환을 벌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실시하는 절량농가 실업자 구제를 위한 국토건설 사방공사(砂防工事)와 조림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 공사판에 나가 하루 종일 흙을 나르거나 땅을 파면 거금 650환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현금지급이 아니고 현장감독의 도장이 찍힌 종이 조각 돈표를 주는 것이다. 왜말로 ‘간조’ 라 하여 돈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날을 기다리는데, 보통 15일 간격으로 돈이 나온다. 어떤 때는 ‘간조’ 날이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돈 소식이 깜깜인 것이다.
이렇게 굶주리다가 행여 부자 많은 서울로 가면 밥벌이가 될까하여 남부여대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농(離農)을 한 도시빈민의 경우 살기가 더욱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도로변 으슥진 곳이나 변두리 산기슭에 판잣집을 지어 하늘을 가리고 살아야 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가 쫓겨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세상 살기가 더 편해져야 하는데, 세상은 더 뒤숭숭하고 밥 먹고 살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시골 농촌마을에 밥을 굶는 절량농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서울의 도시빈민 판자촌 수가 늘어만 가는 것이다.
시골 농민 화전민촌, 바닷가 어촌, 섬마을 절량민을 위해 정부의 구호양곡이 방출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4·19 혁명1주년을 전후해 제 1차로 정맥(精麥) 3만 석이 방출되었고 제 2차로 3만 석은 춘궁기의 막바지인 5월 10일 이후 방출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총 10만 석이 책정되었는데, 농민들이 밥을 굶는 보릿고개를 다 지난 다음인 5월경에야 나머지 4만 석이 방출된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이유는, 갑작스런 곡가(穀價) 앙등으로 현물시장의 실거래 가격과 농림부 당국이 책정한 정부 보유 정맥가격과의 차이 조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혼란으로 인한 물가 앙등, 화폐 가치의 폭락 등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에 행정의 무능 비효율적 탁상행정으로 나라 창고에 곡식 가마를 쌓아두고도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