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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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강욱철이 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 김승국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두 가지의 논제 때문이었다.
  그들이 떨어져 있었던 오랜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와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였다.
  오랜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에 대해선, 그들이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맺거나 연락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완전무결하게 둘이서 공유하는 것이다. 그들 둘이의 사회관이나 지향점은 거의 쌍둥이처럼 닮았다. 다만 투쟁 진행 과정에서 그 방법에서 약간의 온도 차를 느낄 수 있었다.
  항상 김승국은 강욱철을 ‘강철파’ 라 불렀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김승국이 이번에는 더욱 ‘강철파’ 일 수 있었다. 어디 두고 볼 일이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다.
  꾀 구체적인 데에까지 생각을 주고 받았다. 세세한 미미 사안은 계속 연락 협의할 것이다. 서로 만나는데 많은 불편이 예상되었다. 이것도 김승국의 표정에 잘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사유의 뇌세포를 동원하기로 했다. 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욱철의 직관적 사유뇌세포도 이에 보조를 맞출 것이다.
  가장 강욱철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가 시청 앞 ‘2대악법반대성토대회’ 후 경찰에 연행되어 서대문구치소에서 곧바로 군대에 뛰어든 이후의 여러 인물들의 동향파악이었다.
  그때에도 물론 밀정은 있었다.
  요즘은 밀정 밀대의 격이 높아져서 고도화되고 과학화되고, 위장술 등에서 매우 치밀성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간악한 일제 깃법에 간접적이고 능글능글한 양코의 흉물깃법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양키들의 도깨비 장난식 허허실실 깃법이 자본주의 돈줄을 타고 계절을 유혹하는 사꾸라 깃법으로 활짝 피었다는 설이 있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느냐가 관껀이었다.
  강욱철이 현재 알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완전하진 않아도 비교적 쉽게 구별해 낼 수가 있었다. 군 제대 이후 공백 없이 계속 상대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승국은 그동안 영어의 몸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가 꼭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군사 꾸테타가 일어나고 김승국이 몸담았던 ‘통일일보’는 5월19일 폐간을 당했다. 김승국은 바로 감옥으로 갔던 것이다. 
  그때의 싯점으로만 여러 인물들을 식별한다면 여러 오류가 생긴다. 김승국이 감옥 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동안 그들이 어떻게 처신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김승국도 고문 취조를 당하면서 느꼈겠지만, 강욱철이 두말도 토를 달지 못하고 군 입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밀정 밀대들의 사전 밀고로 꼼짝을 할 수가 없었기였다.
  “저놈들이 하버드 출신 머리 잘 도는 놈들을 선발, 펜타곤에 앉혀놓고 대형 컴퓨터를 24시간 두드려 세계 정복흉계를 짜는 거야. 그 정보를 K C.I.A에 주고 그 정보에 의해서 우리 앞길에 장애를 놓는 거야.”
  “놈들이 얽어놓은 그물이 너무 촘촘하단 말이야.”
  “참으로 불행한 민족이야. 
  세상에 박정희 같은 독종이 어떻게 우리 조선족이지? 얼굴만 봐도 소름이 끼친단 말야.”
  “헛헛. 참, 김종필 같은 간물이 우리 김해 김씨야. 나 김해 김씨 탈퇴할까?”
  김승국 제 말에 제가 우스워서 한바탕 너털웃음을 쏟는다.
  “어헛, 그러고 보니 낭패로다. 나를 낳아주신 우리 어머님도 김해 김씨야.”
  강욱철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뒷쪽에서 보거나 중화전 쪽 먼데서 바라보면 이들은 꼭 미친 사람들 같았다.
  팔을 벌리고 허우적대다가, 고개를 끄덕여 목운동을 했다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발길로 돌멩이를 차는 시늉도 했다. 또 이따금 벌떡벌떡 일어섰다가 앉기도 했다. 

▲ 민주혁명학생 위령비
▲ 민주혁명학생 위령비

  그들은 7.29 선거가 끝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자마자 서두르기 시작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로 표현된 하나의 조국을 되찾는 일 말이다. 갈라진 민족, 북녘강산 북조선공화국 동포에 대한 사랑 말이다. 미완의 혁명으로 앗겨버린 사월혁명의 깃발을 되찾고 혁명완수를 위해서는 어서 한시가 급하게 서둘러야 했다.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먼저 들고 나온 것은 법대생 황웅권이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황웅권은 사회에 눈을 떴다. 그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대 사회적인 관심이 너무 컸다. 가까운 동무들 사이에서 조숙(早熟)을 뛰어넘어 조로(早老)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사회에 대한 인식이 빨랐다.
  그것은 아마도 독립투사였던 부친과 근대사회학 강의로 이름을 날린 맏형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는 사월혁명동지 ‘사월패’ 들이 모일 때마다 민족모순에 대한 그 나름의 논리를 전개했었다. 
  이에 뒤질세라 김승국 역시 대단한 나라사랑 동포사랑 주창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뱀처럼 차가운 지혜를 가졌다. 
  남북은 하나다. 북녘 남녘 혈맥을 이어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까지의 뜻을 모으는 데는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조국통일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설익은 채로 계속 제시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가 정해지는 데는 대체로 2,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뭔가 좀 허전한 것 같기도 했고 글자 그대로 구호에만 그치는 것 같기도 했었다. 여기서 김승국 특유의 지혜가 발동을 했다. 만나자 판문점에서! 로 끝마무리를 한 것이다. 그의 선친은 남북녘의 혈맥을 잇기 위해 분연히 총을 들고 산사람이 되었다. 해방공간 영양 일월산 전투에서 조국의 한줌 흙이 되었다.

  강욱철들은 그때 되도록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는 길을 택했었다.
 그것은 혁명 직후 우후죽순처럼 4.19 단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중 학생들 사이에서 어용학생 단체는 스스로 해산하라, 는 구호가 나온 걸 보드라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이다.
  참고 두고 보자니까.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연하고 혁명정신을 훼손하는 것도 유분수지, 도저히 앉아 볼 수만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작한 것이 처음 ‘사월패’였다. 정식명칭도 아니고 강의 끝나고 얼굴 보자고 만나기 시작한 동지들이 그냥 ‘사월패’라 불렀었다. 차라리 ‘혁명패’가 났겠다고 바꾸자는 의견도 만만찮았으나 죽지도 못한 것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냥 사월패로 두자고 그런대로 날짜를 보냈었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파렴치 혁명유공단체가 늘고, 사이비 단체들이 순수한 학생들의 혁명 혼을 더럽히는 사례가 많았다.
  유사 청년학생단체가 되려 위세를 부리는 세상이 되었다.
  더 이상의 인내는 4월 영령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다시 붙인 것이 ‘民族統一學生聯盟 이었다. 全國이나 自主가 앞에 붙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한미경협반대‘ ’2대악법반대‘ 가 옆에 붙기도 하고 ’학생연맹‘ 이 ’투쟁위원회‘ 로 바뀌기도 했었다.
  강욱철들이 서로 만나면 사월패란 별칭겸 애칭으로 모두들 기껍게 불러 댔었다.

  ‘사월패’ 멤버 중 빼놓을 수 없는 동지가 있었다.
  바로 거중 조정자 이문성이었다. 영어를 너무 잘해서 영문과를 택했었는데, 사월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코쟁이 말을 전공한다 하여 양코뒷잡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양코 앞잡이의 반대였다.
  양코뒷잡이 이문성은 피부가 허여멀쑥하고 체격이 훤칠해서 ‘런던젠틀’로도 통했다. 사월패들은 혁명투사답게 각자 주의주장이 강했다. 어떤 테제를 놓고 서로 핏대를 세우는 때가 많았다. 이럴 때 논제가 옆으로 새다 보면 백가쟁명에 천가만가쟁명이 되는 수가 있었다.
  보통 제일 시끄러운 논제가 전 민족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조국의 자주통일 문제였다. 스위스식 또는 오지리식 영세중립통일론과 남북협상에 의한 민족자주통일론이었다. UN감시하 또는 국제 감시하 선거통일론도 한 몫 끼었다. 
  여기엔 자연 해방공간 미. 쏘 공위(美蘇共委)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반탁(反託) 찬탁(贊託)이 나오고 맥아더의 점령군 포고문과 치스챠코프의 해방군 포고문이 등장한다.
  여운형의 건준, 이를 모태로 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새로운 나라의 국호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되었다. 이 조선인민공화국이 실패로 끝난데 대한 말이 많았다. 새나라 조선인민공화국 각료명단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여운형, 우익인사로 호남재벌 김성수가 끼어 있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청의 집요한 파괴공작에 의해 ‘인공’ 이 실패로 끝난 것에 울분을 터뜨리는 사월패가 많았다. ‘인공’ 의 모태인 ‘건준’ 은 당시 남북을 망라하는 전국적인 지지성원을 받고 있는 단체였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가 대상이 되면 열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민족자주통일론이 팔팔 끓어오르고 황웅권을 비롯한 ‘강철파’ 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었다. 달변가 조용근이 기세를 올리고 심세택 하백만이 따라 붙는다. 강욱철은 말을 안 해도 벌써 누구보다도 먼저 강철파에 속해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지지 찬성을 표하는 것이었다.
  주로57, 58학번인 이들에 비해서 이들보다 학번이 2, 3년 위인 정병효 대학원생을 필두로 하여 김시연 김승국 배용수 노창식등이 각자 제 주장을 세우고 반기를 들었다.
  한창 열이 오를 땐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맞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이 오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때야말로 양코뒷잡이 이문성이 필요했다.
  이문성은 고전적인 태제에 대한 이론도 정연하지만 시대적인 감각도 선진적이고 감각이 빠르다. 광화문에 있는 양서(洋書)수입서점 단골학생이었다. 사월패 중에선 유일하게 타임지(Time)와 뉴스위크지의 애독자였다.
 합리적이고 시대감각이 뛰어난 이론으로 차분하게 분위기를 조절하고 상호충돌 위험을 낮추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문성은 사월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양말(洋語) 전공이었지만 인품이 무던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는데 특유의 덕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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