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3)

1. 김옥균의 성장

갑신정변이라는 조선 부르주아 변혁을 주도하여 대한제국까지, 근대개혁의 흐름을 형성한 이는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가난한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오촌 당숙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서울에서 살다가 11살 때부터 16살까지 강릉 부사로 부임한 양아버지와 함께 강릉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며 자랐다.
16살 되던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침입에 반대하는 격렬한 민족적 투쟁을 보면서 조국에 불어닥친 위기를 자각하게 되었고, 봉건 양반들의 학정으로 암담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려면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어, 실학을 열심히 탐구하였다. 

김옥균은 16살에 양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때 벌써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그의 주변에는 뜻있는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다. 또 새로운 선각자와의 만남과 교류를 통하여 실학사상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당시 세계정세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도 탐구하게 되었으며, 개화운동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성장하게 된다.

김옥균의 사회정치사상을 분석할 수 있게 하는 저서로서 현재 ≪갑신일록≫ ≪치도략론≫ ≪회사설≫ ≪리재원에게 보내는 편지≫ ≪리홍장에게 보낸 편지≫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김옥균이 홍문관 부교리로 있던 시절에 쓴 ≪기화근사≫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글들을 보면 김옥균은 실학자들을 연구하는 과정에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자기 사상의 출발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옥균은 영향을 준 개화사상 1세대 (설명 후술)와의 접촉을 통하여 실학사상의 탐구와 함께 서구 자본주의 등 개화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김옥균은 1882년 2월(22살) 문과에 급제, 2년 후에는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면서 관리로서 개화파들을 모으는데 진력한다. 1882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는 등 전도 유망한 청년정치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식견과 자질은 워낙 뛰어나 서울 장안의 주목을 받아 당시의 집권자 대원군에게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2. 김옥균과 개화파의 개화사상 전파

1) 개화사상전파

1882년 8월 지석영이 올린 상소(≪고종실록≫권 19)를 보면 김옥균의 저서 등 개화파 성원의 저작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애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와 수구파 반동들의 탄압으로 이 글들을 대부분 유실되었다. ≪기화근사≫도 원문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내용을 다 알 수 없지만, 조-일 관계와 전망에 대한 견해로서 당시 조선외교의 출로를 모색한 것이었다.

김옥균이 1884년 2월 ≪한성순보≫에 실었던 ≪론기화형세≫를 보면 ‘조선을 이탈리아, 일본을 영국에 비유하면서,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상호관계를 패권을 다투며 경쟁하는 관계’로 묘사하였다. 또한 각 나라들이 민족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부국강병을 이룩하면 외세의 침략도 막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한성순보≫에 쓴 ≪회사설≫에서 김옥균은 ‘지금 서양 각국에서는 회사를 설립하여 상업을 장려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이것은 나라의 부강을 이룩하는 기초로 되는 것’이라면서 근대적 자본주의 기업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치도략론≫에서는 교통 운수의 발전을 국가정치의 중요한 요점의 하나이며 나라발전의 수준을 보여주는 기준이라고 하면서 이에 무관심한 봉건 관료들을 비판하였다.      

▲ 김옥균의 치도략론                             한성순보                                              지석영
▲ 김옥균의 치도략론                             한성순보                                              지석영

김홍집, 김기수, 어윤중 등은 외국 시찰 방문 결과를 책으로 내면서 개화문물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기수의 보고서를 통하여 그 나라의 형세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을 파악하기 위하여 1879년 이동인을 파견하였다. 이동인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상세하고 연구하고 귀국하여 개화파 지도 인물들에게 일본의 정치정세와 여러 나라의 발전 면모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개화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1870년대 말부터 1880년대 초에 들어서면 개화사상은 시대적 풍조로 되었으며 사회의 여러 계층이 개화사상에 공감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또 이와 함께 이 무렵부터 김옥균은 개화파의 지도자로서 개화운동에 전력하였다. 그는 정세로 보아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사업은 수구파 정권을 전복하고 개혁파가 정권을 장악하는 조건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김옥균은 개혁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첫째로 국왕(고종)을 전취하여 개혁운동을 벌이는데서 유리한 공간을 마련하며, 둘째 신식 군대의 양성, 무장력의 강화 등으로 개혁의 무력적 지반을 닦으며, 셋째 계몽운동을 강화하여 개혁의 군중적 지반을 확대하는 것을 선차적 과업으로 내세웠다.

그는 1883년 1월 참의 통상 교섭사무, 1883년 3월 동남제도 개척사 겸 포경사(재정마련을 위하여 포경업을 고민했음), 그해 4월 이조 참의, 10월 호조참판을 하면서 개화파 성원들을 지도하여 개혁 운동을 추진시켜 나갔다. 김옥균은 1884년 10월 17일(양력12월4일) 봉건적 부패를 청산하고 부강하고 자주적인 근대국가형성을 목적으로 한 무장정변의 봉화를 지핀 것으로 하여 조선 근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2) 개화파의 정치적 결속 
 

▲ 개화 1세대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 개화 1세대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1세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오경석과 유홍기(유대치) 박규수가 있다. 오경석은 원래 자산가 출신 집안으로, 통역관으로 중국에 왕래하면서, 인삼, 보석 등 장사를 하며 많은 재산을 축적한 자본가였다. 또 유홍기도 역관 집안의 한의업을 하는 자산가였다. 당시 부유한 중인 출신들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이었고, 대를 이어 통역관, 또는 의관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도 양반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처지의 중인 출신 지식인들은 학문적 시야가 넓고 국내외 정세와 흐름에 대한 파악이 있으므로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분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세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자본주의적 관계를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 사상적 조류의 싹이 중인 출신 지식인들 속에서 싹트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박규수는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61년 제2차 아편전쟁 직후 외교사절로 청나라를 다녀오며 자본주의 침략으로 아시아에 닥쳐오고 있는 위험을 목격하였다. 또 ≪제너럴 셔먼호≫ 침략 당시 평양 감사로 재직하며 평양 인민들과 군민 일치로 미국의 침입을 막아낸 후 다시 중국에 가서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된다.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당시의 사회 제도 아래에서 신분적 제한을 많이 받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앞으로 <북촌의 양반자제>들 속에서 인물을 선발하여 지도자로 키울 구상을 하였으며, 이 과정에 김옥균을 지목하여 개화운동의 운명을 걸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김옥균의 적극적인 방조자였던 이동인도 류홍기의 주선으로 개화파 성원이 된 사람이다. 이동인은 중인 출신으로 벼슬을 할 수 없자, 일찌감치 북한산 봉원사의 중이 되었지만, 유홍기에게 학문을 배우는 과정에 김옥균과 사귀게 되었으며 그의 충실한 방조자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핵심성원으로 되었던 홍영식, 철종의 사위 박영효(갑신정변 실패 후에 친일파로 전락), 그의 형 박영교, 서광범, 유길준, 후일 혁신 관료로서 갑오개혁을 추진한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도 박규수, 유홍기가 김옥균과 연계해 준 사람들이었다. 김옥균은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여기에 모여든 뜻있는 청년들과 연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1870년대 초에 들어서면 유홍기, 오경석, 박규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김옥균은 개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력을 모으게 된다. 
                      

▲ 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 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 김옥균 집터, 삼청동 정독도서관
▲ 김옥균 집터, 삼청동 정독도서관

근대적인 개화사상가였던 김옥균은 문벌을 엄격히 가리는 봉건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사람을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였으며, 사상과 재능을 위주로 인물을 평가하고 교제하였다. 김옥균에 의해 개화파가 된 성원 중에는 중, 궁녀, 내시, 군인, 상인들과 나아가 천민들도 적지 않았다. 승려였던 차홍식은 김옥균이 화계사를 유람할 때 친교를 맺고 개화파로 성장하였으며, 상인이었던 남홍철도 김옥균을 따라 일본을 여행하는 과정에 개화사상에 공감하고 개화파 성원이 되었다. 김태수, 변수와 같은 궁중의 내시들은 김옥균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한 개화파 성원들이었다, 이들 외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옥균은 정변 후 집필한 ≪갑신일록≫에서 정변 당시 ‘모군’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했는데 그는 환관이었다. 고대수라는 별호의 궁녀도 개화파의 초창기부터 궁성에서 활동한 개화파 성원이었다. 군인들 속에서도 개화파 세력이 확대되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성원들은 부르주아 개혁을 무력으로 뒷받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군인들을 인입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신복모, 신중모, 백락운, 윤영관, 이은돌, 이은종, 김봉균, 윤경순, 윤경완 등 일본 사관학교 유학생출신 군인들과 전후영 군인들을 비롯한 개화파의 영향을 받은 군인들이 개화파의 중요 성원으로 활약하였다. 전영 소대장인 윤경완은 형인 윤경순의 영향 하에 정변 당일 50여 명의 군인들을 인솔하고 개화파의 정변 활동을 무력으로 보장했다. 

대상인 자본가들과 보부상 출신도 있었다. 개화파는 이들과 정치적 연계를 맺으며 그들을 개화파의 정치 활동에 끌어들이는 사업을 벌렸다. 서울 종로에서 금은방을 경영하던 박상인은 정변 수행에 긴급히 소요되는 재정을 개화파에 조달하였다, 보부상의 통령 이창규는 정변 계획 작성 시 주요 인물이었고 정변 당일에는 부령관으로 김옥균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였으며 정변에 100여 명의 보부상을 인입한 활동가였다. 가노들도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와같이 개화파 성원들이 늘어남에 따라 김옥균의 사상적 영향 밑에 규합된 그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었다, 이 정치세력을 우리나라 근대역사에서 개화파라고 하였으며 개화파에 정치적으로 대립된 반동적인 양반 관료들을 수구파라고 불렀다. 개화파는 자기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비밀 결사형식의 조직인 ≪충의계≫를 조직하였다. 

3) 부르죠아 개혁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충의계
 
이 충의계는 부르죠아 개혁을 위한 개화 운동가들의 정치적 비밀결사였고, 개화파 세력의 핵심조직이었으며 근대적 정치조직의 첫 맹아였다. 조직 명칭을 ‘충의계’로 하고 ‘계’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개화파 성원들이 입헌군주제의 주장자들이었으며, 또 낡은 봉건체제가 완강히 남아있는 조건에서 이러한 명칭이 활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충의계에 포함된 모든 성원들이 처음부터 부르주아 사상으로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낡은 봉건적 인습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임을 고려한 이름이다. 

개화파가 형성되고 충의계와 같은 부르주아적 정치조직이 결성됨으로써,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세우며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밀고 나갈 새로운 정치 역량이 마련되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지도성원들은 핵심들을 충의계에 묶어 세워 개혁준비를 추진시켜 나갔다.

개화파가 형성되고 충의계와 같은 부르주아적 정치조직이 만들어짐으로써 우리나라에서 낡은 봉건제도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국가제도를 세우며 외래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역량이 마련되게 되었다.

 

김이경

전 통일연대 사무처장
전 통일연대 자주교류위원장
전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 민주민권위원장
전 민주주의 민족통일전국연합 통일위원장
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통일교육센터 준비위원장 등 역임
현재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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