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1)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우리나라 역사 관련 대표적 논점 중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공장을 지어주고, 경부선을 부설하면서부터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근대화는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 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서 부르조아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대략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철학적, 과학적 기초가 제대로 쌓이지 않아 기계를 동반한 산업혁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 둘째는 아시아의 경제 성장은 유럽으로부터 자본을 유입 받는 수동적인 성격이었다는 점, 세 번째로 정치변동이 계속되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정치변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이다. 아시아적 생산 관계의 정체성으로 보아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자본주의의 이식은 당연한 결과였는데, 조선의 경우, 메이지 유신으로 일찍 자본주의화 된 일본으로부터 근대화를 이식받은 것을 불편하게 해석하는 것은 열등감의 표현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이런 주장을 들을 때, 즉자적으로 반발하면서도 기존의 역사 분석 틀로서는 조선의 독자적인 부르조아 혁명이 가능성을 논증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체적으로는 봉건제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의 해묵은 이론도 한 번쯤 떠올려 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봉건제도가 와해되기 시작하며 새로운 생산관계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사극에서 봤던 조선 후기의 민중들의 삶을 반추해보아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조선에서 봉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 관계를 지향하는 싹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물론 새로운 생산 관계를 지향하는 이 싹들이 그 후 어떻게 굴절되고 변화되었는지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다만 이미 싹트고 있었던 근대적 생산관계의 조짐이 조선의 근대주의를 지향하는 사상가들, 정치가들, 혁명가들, 개혁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가 있었음을 먼저 설명하려는 것이다. 

조선 근대화 과정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복잡하다.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형성되던 새로운 경제의 흐름은 곧바로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의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침탈되고 유출되어 자체적 근대적 발전의 길은 왜곡되어 좌초되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과정을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근대사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봉건적 해체와 근대화는 모두 격렬한 투쟁을 동반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의 경우 단지 산업화의 문제 아니라 처음부터 전면적인 외세의 침탈을 막으려는 반외세 투쟁과 동반하여 진행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조선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외세와 결탁한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이 동반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반외세, 반봉건 근대화를 가로막기 위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을 차례로 끌어들이며 온갖 사대주의, 외세 추종주의를 유포하여 혁명과 개혁을 가로막았으며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모든 동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그에 따라 당시 반외세, 반봉건의 흐름을 형성했던 농민운동, 위정척사운동, 정치개혁운동은 잔혹하게 거세되어 때로는 형장의 이슬로, 때로는 일본의 학살마당으로, 정치망명의 길로 뿔뿔히 흩어졌고, 결국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중에서도 갑신정변(1884년)은 조선에서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든 부르죠아 혁명’이라고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비록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10년 후 갑오개혁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부르조아 개혁의 흐름을 만들어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처럼 갑신정변은 물론 갑오개혁, 대한제국의 역사마저도 우리 근대화 과정의 중대한 노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의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제부터 몇 회에 걸쳐 조선의 부르조아 개혁의 흐름을 소개하고, 일본이 조선의 자생적인 부국강병의 흐름을 어떻게 좌절시키며, 식민지로 전락시켰는지에 대하여 재정리하려고 한다. 이 과정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제대로 비판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봉건제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실현하여 자주적인 부국강병의 나라를 우리 손으로 건설하려던 부르조아 혁명가와 개혁가들의 노력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첫 번째 칼럼으로 18세기 조선의 봉건제도 허물어지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태동하는 흐름부터 소개한다.
  
▷19세기 전반기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태동  

조선에서는 18∽19세기 전반기, 이미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시작인 시장(장)이 발전하고 있었다. 19세기인 1808년(순조 8년)을 보면 전국적으로 5일 장만해도 1061개소가 있었는데 이는 자생적인 경제발전의 필연적인 현상이다. 대외무역도 발전하여 무역 거래 액수만 해도 은화로 수십만 냥에 달하였으며 평양, 서울, 안주, 함흥,, 전주 대구, 원산, 진주 등이 번성하여 수원 유생 우하영이 쓴 ≪천일록≫에는 이 상업중심지들은 ‘재물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고 장사꾼들의 의탁하여 살찌우는 곳’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상업자본이 크게 성장하여, 의주상인(만상) 평양상인(류상) 개성상인(송상) 서울상인(경상) 동래상인(동래상)등과 한강의 선상을 비롯한 대상인자본이 출현하였다. 이런 흐름에 따라 1791년에는 육주비전(관에 물건을 납품하며 독점하던 관변 상인들)을 제외한 각 전의 독점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이 발표되는데 이른다. 19세기 초,중엽. 홍장처를 경영하던 서울의 오한주, 서울 갑부 리덕유, 배동익, 호남만석군 오영석 등은 신흥 상인자본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소전 (수저를 만들어 팔던 시전)의 전매권을 차지하면서, 화폐주조까지 맡기도 하고, 한때 통역관이었던 이덕유는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여 중국에서는 조선 국왕의 도장보다 이덕유의 어음을 더 믿을 정도로 재력이었다. 

▷ 농업 생산분야에서의 변화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 발전으로 이행하는 큰 변화의 흐름은 농업 생산분야에서 일어났다. 인신적인 주종관계 (신분 관계)보다는 소작인들이 계약관계에 기초한 단순한 차지인으로 전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봉건제도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와 농민의 숙명적인(신분적인) 결박’은 18세기부터 이미 금이 가기 시작, 19세기에 이르면 농민들의 토지이탈 현상이 촉진되었다. 즉 농민의 토지상실, 또 토지가 대지주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뚜렷했으며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인신적 예속에서 벗어나 광산노동자나 떠돌이 장사군 등으로 전변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영국의 엔클로저 현상처럼 하루아침에 대거 농촌에서 쫒겨나 도시 노동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상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 경작권을 빼앗긴 채 더 열악한 계약관계에 의한 소작인이 되어 결국 고향을 등진 유랑민이 되거나, 아니면 광산노동자나, 등짐을 진 장사꾼으로 전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양반 신분이 아닌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과정은 ‘토지의 상품화’ 즉 토지가 경제적 매매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분적으로는 하층에 속하는 지방의 하급관리들과 상인들이 과거에는 대토지소유자일 수 없었으나 19세기 후반에는 대지주로 부각되는 것이 보편적 사회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소유는 사(史)적 토지 소유 관계에서 새로운 근대적 소유의 발생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농업과 비농업 부문에서의 상품화폐 관계의 새로운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런 현상은 종전의 봉건적 자연경제에 하나의 큰 충격을 줌으로써, 상품생산을 목적한 상업적 농업경영, 임금 노동의 고용 등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을 위한 관계를 싹트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19세기 중엽까지 이러한 변화는 아직 봉건적 지배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낡은 봉건적 지배질서는 고용노동에 의한 부농경리, 상업적 농업경영의 발전이 억제하는 측면도 있었다. 또 농민의 계급분화도 자본가적 차지인과 무산자-고용노동자층을 분화시키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소작료를 수탈하여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또 축적한 재부를 상업고리대자본으로 전화시켜 이중으로 생산자에게 붙어먹는 지주층과 그들의 초지를 경작하는 소작 농민들의 분화가 아직은 농촌계급 분화의 주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농업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비록 미약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근대적 발전의 합법칙적 과정을 보여주는 경제관계의 발현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농업에서의 변화들은 비농업적 부문에서의 상품생산과 자본주의적 경영의 발전을 위한 전제였다. 

▷ 수공업 분야의 변화 

수공업적 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농민경리에 결합되어 있던 가내수공업은 다양성을 띠게 되었고, 생산과정에서 상업자본과 결합되는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주목할만한 새로운 경제관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가내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확대는 농업경영과 분리된 전업적 수공업을 낳았다. 무명, 삼베 비단 모시 등 직물류들과 고리, 대그릇, 나무 그릇, 각종 초물 (돗자리, 바구니 등의 제품) 등 일용품 생산을 중심으로 옛날부터 농업경영과 결합 되어 있던 가내 수공업들이 점차 분리되면서 전문 수공업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미 존재하던 수공업경영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수공업 부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평안도 정주, 납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놋그릇 제조업이 확대되었으며 여기에서 생산되는 식기, 문화용품 기타, 일용품들은 광범한 자체 판로를 갖고 유통되었다. 종이생산은 농촌에서 전문적 수공업으로 발전함과 함께 도시 주변의 대외무역 통로를 중심으로 한 높은 수요를 대상으로 하여 확대되었다. 그 결과 문방구, 돗자리 바구니 같은 초물, 도자기, 모자, 신발 등 각종 수공업 부문에서는 지방적 수요를 벗어난 광범한 수요를 대상으로 상품생산이 늘어났다. 

또 비농업 부문에서 일어난 새로운 변화의 또 다른 하나는 광업, 놋그릇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상품들이 더욱 발전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 협업의 형태에서 상업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더욱 발전된 공장제수공업경영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 광업부문에서의 변화 

금.은.동.철 등을 캐내는 광업 부문에서 변화는 더욱 뚜렷했다. 광산에서는 일시적으로 흘러드는 부역 노동이 아니라 농업에서 떨어져 나온 고정된 임금 노동에 의한 채굴이 현저히 확대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자본주의적 광산경영은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에는 광업 중심지인 광산마을이 많이 형성되어 여기에 농촌에서 이탈한 비 농업적 인구가 모여들고 상품유통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광업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영의 발전은 광산물을 가공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영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9세기 중엽에 동을 주원료로 하는 놋그릇 생산부문에서 자본주의적 경영이 확대되었고, 주철 부문에서도 자본주의적 경영이 생겨났다. 

▷ 광업과 가공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산업자본 전환 

큰 상업자본가들은 가내 수공업제품의 상품화 과정을 촉진시키면서 그 제품의 매점업자로도 되어 점차 상품 유통분야에서 주요한 담당자가 되었다. 매점의 규모도 지방적 범위를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로 확대되어 갔다. 이제 상업자본은 직접적 생산자의 생산을 점차 종속시켰다. 큰 상인들은 자본을 투자하는 방법으로 분업에 기초한 수공업장의 경영자로 됨으로써, 상업자본을 수공업과 결합시켰다. 광업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영의 발전은 광산물을 가공하는 부문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영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이제 상업자본은 생산과 결합되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1850년대부터 이름난 정주 납청의 놋그릇 생산경영에서는 자본가인 경영주가 2만〜3만냥의 자본을 가지고 설비와 원료를 장만하였고, 노동자들은 여러 공정에서 각기 자기 맡은 일을 한 대가로 경영주로부터 임금을 받았다. 서울의 오한주도 이때부터, 정부로부터 화폐 주조 청부를 맡고 자기 자본으로 원료와 연료 설비를 구입하고, 노동력을 사서 20만 냥의 금속화폐를 주조하였다. 19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적 관계는 전에 비할 바 없이 빨리 발전하였다. 놋그릇 제조업, 철가공업, 광산업, 제지업, 요업, 직조업, 양조업 등 공장제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일부 생산영역에서는 기계제 생산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 소결

이상에서 조선의 봉건제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 자리에 새로운 근대적 생산관계가 서서히 마련되고 있었음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유럽의 근대화가 산업혁명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만일 그들의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엄청난 수탈이 없었더라도 자본을 축적하는 것에 성공했을까? 반대로 조선의 경우 제국주의적 수탈과 침략을 받지 않았더라면 더디더라도 근대화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앞으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 부국강병을 이루려던 조선의 사상, 정치운동가들의 노력부터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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