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2)

앞의 연재 글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에서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봉건제의 기초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요구하는 객관적 토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나 서구열강의 자본침투 없이도 조선이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물적인 토대는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봉건제의 토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서 곧장 근대사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라는 낡은 생산 관계를 청산하고, 생산력을 더욱 높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면 부르조아 개혁이 필요하다. 

조선에 근대를 준비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엽이었다. 19세기 초엽, 조선을 지탱하던 봉건적 사회 질서가 기초부터 허물어져 백성의 삶은 더욱 비참해지고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권력을 가진 양반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민중들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 착취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제도를 수립해 근대화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면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끌어들이고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개항을 더욱 확대하는 등  등 공세를 전개한다. 조선의 근대를 위한 개혁은 처음부터 이들과의 사투의 과정이었다. 

근대를 준비하고 중엽, 외세의 경제침탈에 맞서 싸우려는 근대사상가, 정치가들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여러 정책을 마련하고 차곡차곡 개혁과제를 실천하지만, 그때마다 수구 세력과 외세에 의하여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조급한 개혁운동가들이 준비도 없이 벌린 무모한 정변이 아니었다. 점진적인 방식에 의한 개혁이 불가능하게 된 현실에서, 그것을 깨닫고 혁명적 방식으로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부르조아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간파하고 벌인 애국적 결단이었다. 

이들은 단지 정치개혁을 통해 봉건적 질서를 제대로 다시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반봉건 반외세 혁명’을 꿈꾸었다. 그들은 혁명의 주체세력을 만들기 위해 혁명을 수행할 ‘충의계’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으며, 의식화를 위한 신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고, 군대를 양성하고 후진교육을 애쓰며, 근대화된 민족산업을 키우려는 전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였다. 그러면 조선의 근대를 준비했던 갑신정변 주역들의 개화사상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도록 하자. 

갑신정변의 사상을 개화사상이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이 ‘개화’라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개화’라는 단어는 중국 고전인 『역경』에 나오는 말로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라는 뜻이며,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본 메이지 유신 때부터였다. 이처럼 ‘개화’라는 말 자체는 무미건조하고 내용이 없다. 그렇지만 개화라는 단어가 역사적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서 그대로 쓴다. 

이번 연재 글에서는 우선 김옥균과 조선의 근대사상가들의 갑신정변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어 조선 양화진에서 효수된 김옥균 [사진 : 필자제공]
▲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어 조선 양화진에서 효수된 김옥균 [사진 : 필자제공]

 

개화사상의 기본 특징 

개화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당시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사회적 악의 근원을 통째로 제거하려는 ‘반봉건 사상과 반 침략적 애국사상’이다. 즉 김옥균은 당시 조선이 봉건제 자체의 폐단이 낱낱이 드러나고,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으며, 봉건제도를 철폐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조선 민중의 노예적 삶도 개선할 수 없으며 조선의 독립도 보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개화사상의 두 번째 특징은, 개화의 방향과 관련한 내용으로써 나라의 정치를 변혁하고 국가권력의 성격을 변화시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려고 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은 서구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고수하려면 자본주의적 정치제도를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봉건체제를 대신할 근대적 사회제도와 사회관계 수립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개화사상의 세 번째 특징은 실학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김옥균은 “구구한 의견보다도 문제는 실사구시이다. 즉 한두 가지라도 긴급한 것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요. 현실을 멀리 떠난 대책을 떠벌이는 공리공담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성순보』 1884년 윤 5월 11일), 또 김옥균은 실학의 한 유파인 북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이와 관련한 사상을 더욱 풍부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개화사상은 자라나고 있던 자본주의적 관계에 경제적 뿌리를 박고 있는 동시에 실학사상에 기초함으로써, 자기나라 현실에 발을 붙인 애국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사상으로 될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해본다면, 부패한 정권과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횡포에 반대하면서도 대부분 사람은 절대군주제의 회복이나,혹은 봉건제도의 안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 봉건제도 자체를 때려 부수고 근대국가 건설하겠다는 것을 꿈꾸지는 못했다. 그리고 근대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근대 사상을 마련해야 한다고 절박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반면 개화사상은 조선의 암울한 상황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더불어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반봉건 반외세, 부르조아 개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의 독립과 조선 민중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개혁 사상이었다. 또 이 갑신정변의 사상은 처음부터 반외세의 기치를 분명히 들었다고 하는 점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도 크게 다르며 당시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는 처지에 있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정치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구체적 내용 

개화사상가들이 당시 우리나라의 당면한 변혁을 논의하면서 ‘오늘의 세계정세는 변하였다. 만국의 교통은 대양을 통하여 기선이 내왕하고, 전선 줄은 지구 면을 통하고 실오리로 짜듯이 덮였으며, 금. 은. 석탄. 철 등의 개발 각종 기계의 발명으로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편리를 주는 허다한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실시하는 정치의 요점을 찾아본다면.....’(≪한성순보≫ 1884년 윤5월11일)이라고 쓴 것은 개화사상가들의 정치적 견해의 기본 출발점이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화사상가들은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방도로써 정치를 개혁하여 백성들을 계몽시키고 문명개화를 이룩하며 상업을 일으켜 재정을 정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군대를 양성할 것과 무지무능하고 보수 완고한 대신들을 내쫓고 문벌을 폐지하며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져 백성의 신임을 얻을 것을 주장하였으며 학교를 많이 세워 사람들의 지식을 깨우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 실현을 위해서는 ‘전제정치에 기초한 봉건적 국가를 없애고, 입헌 군주제에 의한 근대적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생각한 입헌 군주제란, 강력한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헌법에 의한 근대적 법치국가이되 아직 조선의 자본주의화가 성숙하지 못하고 완고한 대신들의 힘이 강한 조건에서 동요하는 국왕을 전취하여 근대화의 편에 세우려는 방안으로서의 제도였다. 실제 근대사상가들은 시간 있을 때마다 고종에게 입헌 군주제의 취지와 필연성을 교육하였고 갑신정변이 발발하던 그 날까지 고종은 이들과 함께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나라의 생산력 발전을 위하여 농업, 공업, 상업의 발전이 다 같이 중요한 의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 모든 것을 근대적 기술과 경영방식에 기초하여 발전시키자고 주장하였다. 농업, 공업, 상업을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으로 올려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국가가 나서서 민족산업건설을 다그치고 육성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국가가 자본을 확보해서 민족산업을 이끌어 나가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화폐제도, 조세제도, 신분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 분야에서는 근대적 교육제도를 마련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였으며 교육체계와 교육내용을 근대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밖에도 근대 과학 성과의 도입, 대중계몽과 새 지식을 보급하기 위한 각종 수단의 창설, 봉건적 사회풍습을 바꿀 것 등을 문화 분야의 중요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대우의 개선, 사회편의시설과 사회구제시설의 설치, 종교, 신앙의 자유 등 사회문제의 해결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한문에 대한 봉건지배 계급의 맹목적인 숭상을 배격하고, 말과 글을 일치시킬 것을 주장함으로써 오랜 기간에 걸쳐 민족어와 민족문화의 발전을 가로막던 한문과 한자의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국방 분야에서는 징병제에 기초한 국방력의 전면적 강화, 군대의 교육, 무장 장비의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 실제 군대를 양성하였으나 그때마다 수구 양반들의 방해 책동으로 좌절되기도 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의 이러한 사회정치적 견해의 바탕에는 봉건적 억압을 반대하고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부르조아 민권 사상이 놓여있었다. 김옥균은 당시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폐지해야 하며 그 뿌리를 뽑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필경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개화사상가들은 국가와 법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개화사상가들이 주장한 <자유>와 <평등>이란 계급적 본질에 있어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자로서의 부르조아 계급의 <자유>와 <평등>이었으며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부르조아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이는 봉건제도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제도의 수립을 지향하면서도 낡은 제도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농업에서의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의 청산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근대적 상업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한데서 나타났다, 부르조아 개혁에서 근본문제의 하나인 토지문제, 농민 문제의 해결을 제기하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발전의 미숙성과 함께 개화사상가들의 계급적 제한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개화사상에는 이러한 사회 계급적 역사적 제한성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적인 자본주의 제도를 세우며 외래 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내용으로 하여 19세기 70년대∽80년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해 갔으며 하나의 시대사상으로서 부르조아 개혁의 준비와 그 발전을 추동하게 되었다. 
 

소결 

앞으로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부르조아 혁명의 기치를 들었던 김옥균이 동지들을 모으고 주체를 강화하는 과정, 외세의 경제침략이 본격화되던 1880년대 초중반, 민족의 이익을 지키려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이들의 노력은 무엇이었는지. 급기야 준비가 부족한 대로 정변이라는 급진적인 칼을 휘둘렀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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