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부정선거 ② : 유신헌법과 영호남 갈등 시발점 된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지난 ‘다시보는 부정선거’ 연재 1편에서 밝혔듯이 사실 대한민국 헌정사상 깨끗한 선거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 부정선거는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3번째 대통령 당선에 성공한 1971년 4월27일의 제7대 대통령선거는 유신독재와 영호남 분열의 시발점이 된 선거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박정희 정권 기간에도 유권자들에게 막걸리나 고무신 같은 금품을 살포하거나 투표 당일 야당 후보표가 대거 무효 처리되는 등의 부정행위는 항상 있었다.
박정희와 김대중 출신지에 따른 맞춤형 선거전략
그러나 7대 대선에서 새롭게 나타난 부정선거 유형은 바로 지역감정 조장이다. 야권 유력주자였던 유진오 신민당 당수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싱겁게 끝나는 듯했던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같은 신진 주자들이 대거 경선에 출마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가장 먼저 출마선언을 한 김영삼은 대의원 투표로 치러진 신민당 경선에서 1차 투표 1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겨주기로 한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뒤집기에 성공하면서 신민당 대선후보로 최종 선출된다.
박정희 정권은 고도 경제성장의 허구성과 각종 폐해가 드러나고 정권의 부정부패는 물론 무리한 3선 개헌으로 이미 인기를 잃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대중의 출신지가 호남, 박정희의 출신이 영남이라는 점에 착안한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맞춤형 선거전략이 등장하게 된다. 공화당 정권은 영남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호남은 버리더라도 영남에서 압승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 측에서는 ‘신라 대통령론’과 함께 유세현장에서 “문디가 문디 안 찍으면 우짤끼고?” 같은 원색적 구호를 노골적으로 사용했다. 게다가 투표 사흘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영남지역에서 반호남 감정을 강하게 자극했다.
호남 유권자들도 이에 반발해 김대중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영남에 비해 압도적 지지세가 모이지는 않았다. 결국 경북과 경남에서 박정희가 3배 가까이 압승한데 비해 호남에서는 김대중이 박정희를 2배 이상으로 이기지 못하면서 판세가 갈렸다. 박정희는 영남에서 김대중을 약 160만 가까운 표차로 이겼지만 김대중은 호남에서 겨우 60만표 차이밖에 벌리지 못했고 이것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전국 득표차와 거의 일치한다.

“마지막 출마” VS “총통제” 누가 맞았나?
그러나 박정희는 엄청난 관권과 부정선거로도 예상만큼 압승을 거두지 못했고, 어차피 다시 개헌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 대통령선거 출마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결국 3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 연임 횟수의 제한을 두지 않는 유신헌법을 강행하게 된다.
앞서 7대 대통령선거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과 격차가 벌어지지 않자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는 비장의 카드를 던진다. 선거유세 중 박정희는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가 이번에도 집권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말은 다 맞게 됐다.
박정희는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겠지만 그는 유신헌법으로 국민에게 표를 구걸하지 않고도 죽을 때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김대중도 총통제 발언으로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돼 불구속기소까지 당했지만 유신체제는 나찌 독일이나 대만 장개석 정권의 총통제와 별만 차이가 없었으므로 그의 말도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박정희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
김대중은 이 선거에서 패배한 후 “나는 박정희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는 말을 했다. 군인 출신으로 박정희의 대통령 첫 임기부터 비서실장을 했던 이후락은 대통령 연임을 2번에서 3번까지 가능하게 하는 3선 개헌을 주도한 뒤 비난여론을 피하기 위해 1969년 잠깐 주일대사로 외유를 떠났다. 그러나 7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1970년 12월 불과 1년 만에 다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해 관권, 부정선거를 총괄 지휘하게 된다.
이후락이 중정부장이 된 이후 김대중 후보 주변에 이상한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대통령 선거를 3개월 앞두고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서 폭탄이 터지는가 하면 1주일을 앞두고는 ‘선거판의 여우’로 불리며 김대중의 선거전략을 지휘하던 참모 엄창록이 실종되는 사건도 벌어진다.
이밖에도 선거 당일 김대중 본인이 거주하던 동교동 등 유리한 지역의 표가 석연치 않게 무효 처리되고 부재자투표의 표가 박정희 몰표로 나오는 등 부정선거 의혹은 열거하자면 한도 끝없이 나오게 된다.
이런 관권, 부정선거는 판결로도 일부 드러났다. 부산지방법원은 울산에서 박정희의 득표율을 허위로 발표하거나 투표용지 수십 장이 부족해 개표 중단이 되는 사건 등과 관련해 책임자인 윤동수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 판결을 내린 판사가 바로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이다. 유 전 의원은 “피고인들은 공명선거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유권자의 주권을 변조 조작하여 민주질서를 파괴한 행위를 벌였기에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박정희 일가와 유수호 일가는 이때부터 대를 이어 악연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7대 대선에서 정부가 뿌린 정치자금은 당시 국가예산의 1/7 수준인 6~700억 원이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요즘 화폐가치로 추산하면 대략 6~70조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액수의 차이는 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중복해서 증언한 내용이다.
7대 대선의 결과물인 유신독재는 약 7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박정희 사후에는 전두환이 똑같은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는 길을 열었다. 또 이때 잉태된 지역감정으로 인해 87년 6월 시민들의 피땀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도 양김 분열로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헌납했다. 지역감정은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심각한 병폐로 작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