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부정선거 ① : 1960년 3.15 부정선거

▲ 1960년 3월15일 열린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는 총체적인 부정선거였다. (사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대 대통령선거일이 오는 5월9일로 확정됐다. 다시 선거의 계절이 온 것이다. 1948년 5.10총선거 이후 대한민국은 70년 가까이 수많은 선거를 치러왔다. 하지만 이들 선거는 민주국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수많은 부정과 조작으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다.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대놓고 금품을 뿌리는 것은 예사이고 각종 조작행위도 수없이 발각됐다. 이런 부정선거의 그림자는 최근에 치러진 선거에까지도 이어졌다. 사실 깨끗하게 치러진 선거를 찾기가 쉽지 않은 대한민국 선거의 역사이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악명이 높은 부정선거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의 첫번째는 3월15일을 맞아 4.19혁명의 불씨를 당긴 1960년 3.15부정선거 사례를 소개한다. [편집자]

1960년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인 자유당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민생상황과 사회 고위층의 부정부패로 민심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서 멀어졌다. 직전 1956년 제3대 대선에서는 강력한 경쟁자인 신익희가 급사하면서 이승만이 당선될 수 있었지만 부통령은 자유당의 이기붕을 꺾고 민주당 장면이 당선됐다.

그래서 자유당은 법마저 어기고 본래 1960년 5월에 치러져야 할 선거를 3월15일로 앞당긴다. 하루가 다르게 민심이 이반하니 하루라도 선거일을 앞당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야당인 민주당이 조기선거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유당은 조기선거를 강행했다.

1959년부터 선거를 관리할 내무부는 물론 경찰과 정치깡패까지 동원된 광범한 부정선거가 조직된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이어 전국 시·읍·면·동 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득표를 위한 활동을 지시한다.

이밖에도 내무부는 1959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했다.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한조에 경찰 등 공무원 1인 반드시 투입)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율을 모두 85%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최인규는 전국의 기관장과 경찰 간부들을 매일 10~20명씩 내무부로 불러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는 이런 발언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 역사상 대통령선거에서 소송이 제기된 적 있어요?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봅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고요.”

▲ 3.15 부정선거를 총괄지휘한 최인규 당시 내무부장관 (사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유당도 1959년 1월 이승만을 총재, 이기붕을 부총재로 한 대한반공청년단을 발족했다. 전국의 자유당 산하 청년조직들을 통폐합한 이 단체는 무려 200만의 조직원을 확보했는데 물론 상당수가 정치깡패들이었다. 이밖에도 지역의 유지나 명망가들을 각종 이권으로 포섭하고 정부 각 부처에도 당세포를 심는 등 유례없는 대대적인 조직 확대작업에 나섰다.

이 와중에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병옥이 선거가 코앞인 2월15일 하와이에서 신병을 치료하고 귀국하던 중 또다시 급사하면서 단독후보가 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됐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이를 승계할 부통령 선거였다. 부정선거가 없이는 이기붕이 장면을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이 80대 중반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자유당은 이기붕의 당선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선거일 이전부터 지방에서 부정선거를 감시할 민주당 간부들이 구타 살해당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선거 당일이 되자 예상대로 투표함에 자유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것은 기본이고 자유당원이 기표소까지 난입해 어디 투표를 하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한 사람이 20장의 투표용지를 들고 기표소에 들어가고, 이에 항의하는 야당 참관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등 상식 이하의 폭거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결국 오후 4시30분이 되자 민주당은 “이것은 선거의 이름하에 이뤄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행위”라는 언론담화를 발표한다. 그리고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한다.

어찌나 부정이 심했던지 막상 개표가 시작되자 자유당 득표율이 99%에 달하는 결과가 나왔고, 당황한 내무장관은 “이승만 찬성표는 80%, 이기붕은 70% 선으로 조정하라”는 지시를 내려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88.7%, 이기붕 79.2% 당선으로 발표된다.

▲ 3.15 부정선거 직후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진다. 선거 다음날 마산의 학생 및 시민들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해 약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수가 유권자수 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공산당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정치깡패를 동원한 폭력진압을 서슴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광기의 진압으로 겨우 꺼져가나 싶던 항거의 불길은 3월16일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이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주검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다시 타오른다. 4월19일 서울지역 대학생과 중고생들이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든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자 시위대는 무장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수뇌부의 무력동원 거부까지 벌어지자 이승만은 4월26일 하야를 발표하게 된다.

4.19혁명 이후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됐다. 그 결과 최인규는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이후 감형·특사 등으로 거의 풀려났다. 3.15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해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힘들게 되찾은 민주정권이 5.16쿠데타로 1년 만에 무너지면서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사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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