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 파헤치기 2 - 동관리 유적이 다시 땅속에 파묻혀야 했던 이유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1편 보기),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는 어용 학문으로 출발한 일본 역사학은 선사유적을 조작해 내면서까지 일본의 역사를 끌어올리려 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우리 역사를 깎아내리고 축소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1935년의 ‘동관리 구석기 유적 은폐’ 사건이다.

왜 저들은 동관리 유적을 숨기려 했을까?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철길 공사 중에 발견된 우리나라 첫 구석기 유적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리 유적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리 유적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193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해 장악하곤, 허수아비 정권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고, 나아가 중국 본토에 대한 야욕도 점점 키워나갔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어 일제는 조선과 만주에 대규모 산업시설과 교통망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만주와 접해 있던 평안도-함경도 지방은 일제 병참기지화 정책의 핵심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도문선(圖們線, 조선 청진-중국 도문 간 철도), 길회선(吉會線, 중국 길림-조선 회령 간 철도) 등 평안도-함경도 곳곳에 조선-만주를 연결하여 군수물자를 운송하고 각종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철길이 부설되었다.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철길 부설 사업은 두만강 연안의 작은 고을 함경북도 종성군에도 미쳤다. 일제 철길 부설 사업에서 청진-도문을 잇는 도문선(청진-회령-종성-온성-도문)이 종성군을 관통해 지나가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문선 철길 부설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33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종성군 동암리(현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 상삼봉(上三峰)에서 철길을 놓던 와중에 웬 오래된 동물의 뼈와 돌조각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동관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 구석기시대 흑요석 창날과 석부(좌), 신석기시대 간석기 창날과 뼈바늘(우) ⓒ국립중앙박물관
동관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 구석기시대 흑요석 창날과 석부(좌), 신석기시대 간석기 창날과 뼈바늘(우) ⓒ국립중앙박물관

철길공사 도중에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당연히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일제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 모리 다메조(森爲三), 와세다대학 교수 도쿠나가 시게야스(德永重康),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 등을 비롯한 학자들을 파견해 동관리 일대를 조사케 했다. 2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1935년에 동관리 일대에서 털코끼리(매머드), 쌍코뿔이, 큰뿔사슴, 하이에나 등 총 9종의 고생물 화석과 흑요석기, 골각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동관리에서 출토된 고생물 화석은 전형적인 빙하기(기원전 258만년~기원전 1만 2천년경)에 살던 동물들이었고, 이를 유추해 보면 함께 발견된 석기 및 뼈도구들은 구석기시대에 해당했다. 이렇게 철길 부설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동관리 유적은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었다.

동관리 유적 외면하고 다시 파묻어 버린 일제

동관리 유적을 철저히 은폐한 일제. ⓒ경향신문
동관리 유적을 철저히 은폐한 일제. ⓒ경향신문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발견된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동관리 유적. 그러나 일제는 동관리 유적에 대한 조사를 더 진행하지 않고 다시 파묻어 버렸다. 왜일까? 동관리 유적의 발굴이 일제의 조선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까지 일제는 조선에 구석기 유적이 단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던 것을 들어 우리 역사에서 구석기시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반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조선에서의 선사시대는 기원전 2천년경에 시베리아에서 신석기 문화를 지닌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비로소 형성됐다고 보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선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종족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석기인들을 몰아내고 청동기 문화를 만들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경우 1877년 오오모리(大森) 조개무지(貝塚) 유적 발굴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선사유적을 발굴했으며. 이를 근거로 일본은 약 1만 4천년 전부터 자체의 신석기시대인 조몽시대(繩文時代, 새끼줄 모양 토기를 사용하던 시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즉, 오래전부터 자체적으로 선사시대(조몽시대)를 연 일본과 달리 조선은 한참 뒤에야 선사시대가 생겼고, 그나마도 자체적으로 형성된 게 아닌 외부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은 일본보다 뒤처지고 열등한 민족이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제의 주장이 동관리 유적 발굴로 완전히 뒤집혔다. 일본에서도 아직 구석기시대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는데, 신석기시대였던 조몽시대보다 한참 전인 구석기 유적이 조선에서 발굴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당연히 일제가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식민사관을 뿌리부터 흔드는 최대의 위기를 가져왔다.

결국, 일제는 동관리 유적을 철저히 숨기기로 했다. 식민사관을 내세운 일본 어용학자들은 동관리 유적에 대해 ‘일본보다 뒤처진 조선에서 구석기 유적이 나올 리 없다’, ‘유적에서 연대가 다른 것들이 마구잡이로 나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는 논리로 부정하고 폄훼했다. 일제는 기껏 발굴한 동관리 유적을 다시 흙으로 파묻은 뒤 철길을 놓아 버렸고, 나오라 노부오를 비롯한 발굴에 참여한 학자들과 언론의 입을 틀어막으며 유적에 관한 어떠한 연구나 논의도 허용치 않았다. 또한, 동관리 유적에서 발견된 고생물 화석과 구석기 유물들은 총독부 수장고에 보관하고는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막았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첫 구석기 유적인 동관리 유적은 철저히 감춰졌고, 해방 후에도 한동안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을뿐더러 한국 사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와중에 총독부(해방 후 중앙청)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동관리 유적 출토 유물들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노획되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1989년에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제가 우리 역사에서 ‘구석기시대’를 없애고자 한 이유

그렇다면 왜 일제는 동관리 유적을 철저히 은폐하면서까지 우리 역사에서 구석기시대를 없애려 했을까? 이는 앞서 보았듯이 일본의 역사가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고, 조선이 일본의 영향을 통해 발전했다는 식민사관을 통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의 기원 문제에 있어서 고대 이전의 선사시대는 매우 중요했다. 주춧돌 없는 건물 없고 샘 없는 강이 없듯, 어떠한 문명이든 그 이전에 선사시대 없이 발생한 경우가 없다. 바로 일제는 우리 역사의 기원이 되는 선사시대를 의도적으로 축소·왜곡시켜 우리 민족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불분명한 근본도 없는 열등한 민족으로 만들려 했다. 그렇기에 일제는 동관리 유적을 숨기면서까지 우리 역사에서 구석기시대를 ‘없애야만’ 했고, 신석기시대 역시 자체적으로 형성된 게 아닌 외부로부터 온 것이며 그 시기마저도 일본보다 훨씬 뒤처졌다고 조작한 것이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의 구석기유적 발굴. 1963년 조선(북)에서의 함북 웅기군 굴포리 유적 발굴 《로동신문》 보도(좌),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는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와 발굴단(우).
해방 후 한반도에서의 구석기유적 발굴. 1963년 조선(북)에서의 함북 웅기군 굴포리 유적 발굴 《로동신문》 보도(좌),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는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와 발굴단(우).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아무리 가린들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다. 1963년 조선(북)에서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현재 라선시 웅기구역)에서 구석기 유적을 발굴했고, 남쪽에서도 1964년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곳곳에서 구석기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1967년 황해남도 상원군에서 발굴된 검은모루동굴 유적(약 100만 년 전)과 1974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27만~40만 년 전)의 발굴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땅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매우 발전된 구석기 문화를 창조해 왔음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우리 역사에서 선사시대를 축소하고 왜곡하려던 일본의 기도는 완전히 깨졌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보았듯이 정작 일본은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에 자극받아 후지무라 신이치를 필두로 유적·유물까지 조작해 가며 일본에도 구석기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가 조작이 탄로나 천하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관리 유적 은폐사건에서 우리 선사시대 인식을 다시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 그동안 우리는 선사시대에 대해 시큰둥하게 여기며, 단지 아주 먼 옛날에 조상인지도 불분명한 원시인들이 헐벗고 뛰어다니며 사냥하는 장면만 떠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한반도 곳곳에 어딜 가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선사유적에 대해 ‘그냥 먼 옛날 원시인이 살던 곳’ 정도로 생각하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글과 이번 글에서 살펴보았듯 우리가 이 땅의 선사시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동안 일본은 선사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역사왜곡에 몰두했다. 자국의 선사시대는 유적·유물은 조작해 가면서까지 추켜올렸으며, 반대로 이 땅의 선사시대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없애고자 철저히 은폐, 왜곡했다.

세상에 어떤 문명도 하루아침에 나타난 법은 없다. 반만년 우리 역사도 역사 이전에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구석기-신석기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토대 위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하는 우리 역사에서의 선사시대 왜곡과, 더불어 우리의 선사시대 인식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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