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 파헤치기 1 -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과 일본 역사학의 본질
우리는 선사시대(구석기, 신석기 등)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대부분 헐벗거나 가죽옷만 걸쳐 입은 원시인이 돌도끼를 들고 사냥감을 쫓으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수십만 년 전 까마득한 오랜 옛날에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도 불분명한 시대이고, 뗀석기, 간석기 등 당시 선사시대 사람들이 쓰던 도구들을 보더라도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수십 년 전, 우리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선사시대에 일본 역사학계는 깊은 관심을 두고 중요성을 부여하며 ‘연대 올리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석기 유적 조작이란 엄청난 사건이 폭로되어 대대적인 망신을 당했다. 과연,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또한, 왜 일본 역사학계는 그러한 사건을 터뜨리면서까지 선사시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 및 발굴에 공을 들였을까? 함께 살펴보자.
발단 -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견에 대한 일본 학계의 충격

먼저, 일본 구석기 유적 조작에 큰 영향을 준 사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바로, 1979년 우리나라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서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다. 1978년 전곡리 한탄강 강가에서 주한미군 장병이었던 그렉 보웬(Greg Bowen)이 우연한 계기로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를 발견한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에, 한국 학계는 1979년부터 전곡리에서 대대적인 발굴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4,500여 점의 막대한 유물들을 발굴해 내며 약 27만 년~40만 년 전부터 전곡리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곡리 유적의 발굴은 한국 학계뿐 아니라 전세계 역사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조사 결과 유럽~아프리카 일대에서 발굴되던 양면형(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선 양면형 주먹도끼가 나오지 않고 훨씬 뒤떨어진 찍개형 주먹도끼만 발굴되어 구석기시대에 서양이 동양보다 훨씬 진보했다던 기존 학설(뫼비우스 학설)을 뒤엎는 결과였다. 그리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양면형 주먹도끼가 발굴되면서 해당 학설은 완전히 파기되었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가히 세계 학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전곡리 유적 발견 소식은 일본에도 퍼졌다. 일본 학계는 한반도에서 오랜 시기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고, 학계 내에서 자국과 동아시아의 선사시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비록 현재까진 일본에서 1만 년 전 이상의 선사유적은 발굴된 적은 없었으나, 이웃한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일본 역시 한반도와 비슷한 구석기 유적이 존재할 것이란 기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한반도에 대한 경쟁의식도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에 자신들은 1934년에 발견된 구석기 유적인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리 유적을 외면, 은폐하며 ‘조선엔 구석기가 없었고 외부로부터 신석기가 들어오며 선사시대가 시작됐다’라고 주장했는데, 그 조선에서 수십 년 전의 오래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된 것이 아닌가. ‘일본 역시 구석기가 존재했고 조선(한반도)에 질 수 없다’라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학계는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전역에서 선사유적 발굴 총력전을 벌였다.
‘신의 손’, 후지무라 신이치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학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바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였다. 비록 대학에 진학하진 않았으나, 독학으로 고고학을 터득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다. 후지무라는 첫 발굴인 1976년 미야기현(宮城縣) 오사키시(大崎市) 소재 사사라키(座散亂木) 유적 발굴에서 오래된 기와 유물을 발굴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1981년 조사 결과 해당 기와 유물이 ‘4만 년 전 것’으로 발표되어 일본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특히, 4만 년 전의 기와 발굴은 ‘일본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이에, 일본 학계는 그에게 발굴단장에 임명했고, 후지무라는 1980~90년대 동안 일본 전역의 선사유적 발굴을 주도했다.
후지무라는 발굴 때마다 계속 오래된 유물을 발굴해 냈고, 이와 더불어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40만 년 전, 70만 년 전으로 계속 올라갔다. 이렇게 ‘유적에 손만 대면 역사책을 새로 쓸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었기에, 후지무라는 학계는 물론 일본 사회에서 ‘신의 손(神の手, God Hand)’으로 불리며 고고학계의 유명 인사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역사 교과서에도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굴이 실리고 대학 입시 문제로도 나올 정도였으니 그의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하다. 거기다가 2000년 10월엔 『아사히신문』에 기존 발굴 성과를 또다시 뛰어넘는 80만 년 전 유물을 발굴했다고 보고하며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유적에 손만 대면 유물이 쏟아지는’ 후지무라의 발굴은 뭔가 이상했다. 유독 후지무라가 주도한 발굴에서만 선사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발굴 현장 주변에선 동시대의 생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든가, 유적에서 나온 유물이 소재 지역의 돌 성분과 다르다던가, 방금 파낸 유물에 마른 흙이 묻어있다든가 등,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가와 미쯔오(賀川光夫) 교수 등 후지무라 신이치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일본 사회는 그에 대한 의구심은 일절 허용치 않았다. 일본이 선사시대부터 오랜 역사를 가졌음을 밝혀낸 애국자이자 야마토 민족의 영웅을 감히 의심하느냐는 의견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후지무라에 대해 검증을 시도하는 학자에 대해선 매국노로 낙인찍고 학계에서 매장시키기까지 했다.
만천하에 발각된 조작, 그리고 웃음거리가 되다

그러나 후지무라 신이치의 전성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의 발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행적을 추적하던 『마이니치신문』 기자 사나다 가즈요시(眞田和義)는 그 실체를 밝혀내고자 취재팀을 꾸리고 본격 조사에 나섰다. 사나다 취재팀은 후지무라가 자주 드나들던 발굴 현장(미야기현 가미다카모리(上高森) 유적)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며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마침내 2000년 9월 5일에 후지무라가 몰래 유물을 가져다가 파묻는 조작 영상을 찍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어서 10월 22일엔 더욱 선명한 조작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물론, 사나다 가즈요시는 이 조작 현장을 입수하고도 곧바로 언론에 폭로하지는 않았다. 곧장 폭로했다간 후지무라가 ‘조작된 영상과 사진’, ‘제자들의 발굴 실습을 위한 것’이라며 반박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사나다는 후지무라가 기자회견을 할 때 직접 그 현장 사진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사건을 폭로하기로 했다.
얼마 있지 않아 후지무라 신치이치는 11월 4일 센다이시(仙臺市)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는 자신이 80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바로 이때 사나다 가즈요시는 조작 현장을 포착한 영상과 사진을 공개하며 후지무라에게 조작이 맞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순식간에 자신의 유물 조작이 만천하에 폭로되어 당황한 후지무라는 유물 조작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발굴 전체를 조작한 것은 아니다, 오늘 마가 낀 것 같다.”라는 궤변을 늘어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구석기 유적 조작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여기다가 후속 보도에서 이전까지의 후지무라의 발굴 결과를 검증한 결과 유적 180개 중 대다수(90%)인 162개에서 그가 유물을 조작했음이 밝혀졌다. 나머지 18개도 조작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진짜란 보장이 없었다. 이렇게 후지무라 신이치가 조작으로 쌓아 올린 명성과 인기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고, 후지무라는 역적으로 낙인찍히며 학계에서 퇴출, 영구 제명되는 결말을 맞았다.
나아가, 수십 년간 후지무라의 발굴을 어떠한 검증 없이 옹호하며 선사시대 연대를 끌어올리던 일본학계도 한순간에 웃음거리로 전락하며 망신을 당했다. 그가 유물 조작을 통해 끌어올린 선사시대 연대는 완전히 부정당하며 일본은 자체적인 선사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설로 확정됐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도 일본 역사학계는 연구 부정 집단, 사기꾼들로 낙인찍혀 한동안 국제학술대회 참여가 거부당할 정도였다.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에서 드러난 일본 역사학의 민낯
일본 역사학 최악의 흑역사인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 과연 이는 일본 학계가 단순히 ‘후지무라 신이치’란 사기꾼에게 놀아난 것에 불과할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일본 학계는 후지무라 신이치에 대한 어떠한 검증 없이 그의 조작에 동참했으며,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 가차 없이 탄압했다. 그리고 그 끝은 사기꾼 후지무라와 함께 학계 전체가 만천하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자업자득으로 끝났다. 즉, 일본 학계는 엄연히 후지무라와 함께 사기극을 주도적으로 벌인 주범, ‘공동정범’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작이 근 20년 동안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역사학이 시작부터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써의 어용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부터 조선을 비롯한 대륙 침략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일본군 참모본부 산하에 역사연구반을 만들고 조선, 만주 등지에 침투시켜 조선 및 대륙의 역사, 지리, 풍속 등을 연구하고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게 했다. 마침내,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0년대에 조선 및 대륙 역사 연구 성과들을 집대성한 역사책 및 사료집인 황조병사(皇朝兵史)(1880), 임나고고(任那考稿)(1882) 등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무력인 일본군이 주도한 조선 및 대륙 역사 연구는 일본 내부에선 천황제를 정당화하고, 밖으로는 고대에 일본이 조선과 대륙에 ‘진출’한 역사적 근거를 내세워 침략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또한, 일제는 1880년대 후반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등 일본 전역에 소재한 제국대학에 역사학과를 설치하여 학자들에게 일본군 참모본부 연구 성과를 전수했고, 일제의 대외침략과 제국주의 정책에 복무하는 역사 연구를 진행케 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과학적 검증과 검토는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역사학은 태초부터 학계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침략 무력인 일본군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으며, 철두철미 일제 침략에 복무하는 어용 학문으로 탄생하고 성장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근대적 역사 연구(사료, 유적・유물에 근거한 과학적 연구방법론)와 객관성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온갖 조작과 은폐, 날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 살펴본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이 그러하듯, 오늘날까지도 일본 역사학의 어두운 근원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