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재구성 ①

12.3 ‘비상계엄’, 결정적 2시간

12월 3일 밤 10시 30분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 밤 11시 박안수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호 발표, 12월 4일 1시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까지의 2시간(혹은 2시간 30분)이 결정적 시간이었다.

만약 현행 헌법상 ‘비상계엄’을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국회가 결의안을 채택하지 못했다면 윤석열의 내란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만약 내란이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12.3 윤석열 담화문과 포고령 1호는 내란 성공 이후 ‘비상계엄’을 지속하고,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후 계획이 담겨 있다.

첫째, 이재명을 수괴로 하는 ‘내란 사건’을 조작하고, 민주당 등 야당과 22대 국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한다.

둘째, 22대 국회의원 총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부정선거로 해당하는 국회의원의 당선을 무효로 한다. 이는 ‘비상계엄’을 해제할 유일한 헌법적 권한을 가진 국회를 사실상 ‘해산’함으로써 ‘비상계엄’을 지속하기 위한 조치다.

셋째, 국민의 저항을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철저히 진압하고 처단한다.

넷째, 우크라이나 파병을 추진함으로써 ‘비상계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낸다.

다섯째, 남북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미국이 조선을 폭격하게 할 사건을 조작한다.

그들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제주4.3학살, 한국전쟁, 5.16•12.12 쿠데타, 5.18 학살 등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하나로 모은, 최악의 사태가 펼쳐졌을 것이다. ‘결정적 2시간’이 이런 모든 파국적 사태를 막아냈다.

최소 두 번의 시도와 실패

윤석열이 검찰 독재, 비상계엄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장기 집권을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은 집권 초기부터 파다하게 나왔다. 그러나 그 본격적인 실행은 경호처장 김용현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면서부터라고 보인다. 윤석열이 김용현을 국방장관으로 내정한 것은 8월 12일이다.

그리고 3일 뒤 윤석열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를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흉기”라고 언급하고, 그런 세력을 “반자유세력, 반통일세력”이라고 규정했다. “검은 세력의 거짓선동으로부터 우리 국민을 지켜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비상계엄 선포 담화’의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있다”는 문장과 오버럽된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통한 내란을 염두에 두고 광복절 경축사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내막과 과정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전에 최소한 두 번의 시도가 있었다.

첫째, 10월 초 무인기를 평양 상공에 들여보내 조선의 군사적 행동을 끌어내고, 그것을 명분으로 ‘원점 타격’을 가해 남북 교전을 일으켜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조선이 무인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소음이 큰 무인기를 보냈다는 제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윤석열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조선은 군사적 대응이 아닌 외교적 대응을 선택했다. 조선의 외교적 대응이 첫 번째 시도를 좌절시켰다.
☞참고기사 : 무인기 침투와 핵 방아쇠의 가동

둘째, 11월 말 김용현은 김명수 합참의장에게 ‘오물 풍선 경고 사격, 원점 타격’을 지시했다. 드론 침투가 실패하자 오물 풍선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김명수 합참의장이 “위험하다”고 반대하자, 김용현은 합참 작전본부장에게 동일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작전본부장도 반대하여 이 계획 역시 무산되었다. 윤석열과 김용현이 ‘계엄사령관’을 합참의장이 아닌 육군참모총장 박안수를 ‘계엄사령관’으로 앉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합참은 부인했다. 그러나 12월 10일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국회에 출석해 “사건 발생 1주일 전부터 다음 주에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이 높다. 모두 영내에 대기하라”는 지시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함으로써 사실임이 드러났다.

10월 초 첫 번째 시도와 11월 말 두 번째 시도 사이의 시간 간격이 크다. 이는 그 사이 또 다른 ‘실패한 시도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내란 재판에서 이런 모든 의혹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12월 3일 결행의 비밀

12월 3일 내란 세력은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명태균이 “휴대폰이 있다면 검찰이 아닌 언론, 재판부나 민주당에 제출하겠다”는 명태균이 발언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명태균의 소위 ‘황금폰’은 윤석열-김건희-명태균으로 이어지는 ‘공천 개입’의 진실을 여는 판도라 상자다.

명태균과 통화하는 윤석열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이 공개된 10월 31일 이후 궁지에 몰린 윤석열은 11월 7일 기자회견을 자처하고 수습에 나섰다. 수습책은 단 하나, 명태균의 입을 막고, ‘황금폰’을 영원히 묻는 것이다.

11월 15일 명태균은 구속되었고, 명태균에 대한 수사는 ‘정치자금법’에 국한되었다. 즉 11월 7일과 11월 15일 사이에 ‘윤석열-명태균 야합’이 이뤄진 것이다. 윤석열은 명태균을 정치자금법 위반에 국한해 수사하고 경미한 처벌을 내린다. 명태균은 공천 관련 진실을 덮는다. 이것이 야합의 골자다.

그러나 11월 26일 명태균에 대한 구속적부심은 기각되었고, 사건의 속성상 명태균의 수사는 공천으로 확대되었다. 명태균은 윤석열의 ‘배신’으로 결론 내리고, 12월 3일 ‘황금폰을 공개하겠다’는 카드를 던진 것이다.

12월 3일 명태균의 발언이 현실화하여, 윤석열과 김건희 육성이 공개된다면 이는 윤석열 탄핵의 스모킹건이 될 것이 자명했다. 윤석열로서는 빠른 조처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황금폰’이 공개되기 전에 윤석열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했다. 즉 ‘북한의 도발’을 명분 삼은 ‘비상계엄’ 선포가 가장 좋은 카드였으나, 긴급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2월 3일 내란은 그렇게 결행되었다. 국무위원회를 정상적으로 개최할 수도 없을 만큼 핵심 세력들만으로 내란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헬기가 제시간에 뜨지 않았고, 계엄군을 실은 헬기는 수도권 비행금지구역 허가 문제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없었고, 국회로 진입한 계엄군은 ‘북한군’이 아닌 ‘국민’을 마주하면서 우왕좌왕했다.

그 사이 수천의 국민들이 여의도 국회로 모여들었고, 의원들은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갔고, 국민들은 실시간 동영상으로 내란의 현장을 목격했다. 12월 4일 새벽 1시 190명의 국회의원이 본회의실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윤석열이 계엄 해제를 선언한 것은 12월 4일 새벽 4시 20분이다. 이는 “대통령은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경우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한다”(계엄법 11조)는 계엄법 위반이다. 3시간 이상을 지체한 것이다. 지체 이유는 명백하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의 적법성을 따지고, 조금이라도 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면 결의안을 수용하지 않고 계엄 상황을 지속하려는 것이었다. 국회의 결의안 통과 후에도 군부대 이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회 결의안의 법적 하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석열은 계엄을 해제하는 기자회견을 열수밖에 없었고, 김용현은 “중과부적이었다”고 계엄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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