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재구성 ②
‘북한의 도발’은 없었다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담화의 한 문장이다. 그들은 내란의 명분으로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과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을 꼽았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위협과 도발’은 없었다. 오히려 10월 초 평양 상공 드론 출동, 11월 말 오물풍선 원점 타격 등 내란 세력의 ‘대북 도발’이 있었을 뿐이다.
1960년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내건 혁명 공약 1번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가 그것이다. 즉 ‘북한의 위협과 도발’을 막기 위해 강력한 반공 태세를 구축하는 것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리면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발표한다.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김일성의 사주”를 받아 내란 음모를 계획하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등을 선고받았다.
한국 정치에서 쿠데타와 ‘비상계엄’은 언제나 ‘북한의 위협과 도발’ 그리고 ‘친북 세력의 폭동’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위협과 도발’은 없었고, 쿠데타 세력이 척결하려고 했던 ‘친북 세력’은 사실은 정치 정적이었다.
김어준의 폭로에 따르면 내란 세력들은 한동훈을 사살하고, ‘북한군의 소행’으로 조작하려 했다. 인민군복을 어딘가에 묻어두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발견해서 ‘북한군 수행’의 물증으로 하려했다는 것이다. “북한산 무인기에 북한산 무기를 탑재하여 사용한다”는 계획까지 수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미군 몇 명을 사살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폭격을 유도한다”는 제보도 있었다고 한다.
내란 세력이 “북한과의 전쟁”을 유도해 내란을 완성하려 했다는 정황이다. 내란 세력이 명분으로 삼았던 “북한의 도발”은 없었다. 오히려 내란 세력은 “북한과의 전쟁”을 기획했다.
미국: 방조 혹은 방관
12.3 내란 사태에서 미국이 어느 정도 관여 되었는가 하는 점 역시 해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한미 관계의 역사와 속성 상 미국이 12.3 ‘비상계엄’을 모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당시에도 미국은 박정희가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12.12 쿠데타 역시 미국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5.17 역시 미국은 알고 있었다.
☞참고기사: 5.16 쿠데타가 주는 교훈
☞참고기사: 5.18과 미국, 꼭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문제
지난해 3월 CIA가 대통령 집무실을 도청해 국가안보실 고위 관리들의 대화를 미 국방부에 보낸 사실이 공개된 바 있다. 우리나라 주요 정책결정자들을 CIA가 도청한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민주당의 국회의원들조차 윤석열의 ‘비상계엄’ 준비 정황을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면, 미국은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내란을 시도했던 윤석열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에 사전 통보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번 ‘비상계엄’은 과거의 사례와 다르게 ‘친위 쿠데타’였다. 즉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 세력은 ‘굳건한 한미동맹’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고 ‘비상계엄’에 성공하면, 뒷감당의 부담이 너무 크다. ‘굳건한 한미동맹’에 균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후 외교적 수습도 문제가 된다. ‘비상계엄’ 발표 전에 윤석열 내란 세력은 미국에 통보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미국은 스스로의 정보력을 통해서건, 윤석열 세력의 통보를 통해서건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미국은 윤석열의 내란을 방조했거나 혹은 최소한 방관했다.
‘비상계엄’과 작전통제권
미국의 개입 문제에서 또 하나의 논쟁점은 작전통제권 문제이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평시(데프콘 4 단계)에 한국 합참이 행사하다가 데프콘 3가 발령되면 전시로 전환되어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한다.
따라서 ‘데프콘 4 단계’였던 12월 3일 특전사 등의 병력을 이동하는 것은 한미연합사령관의 관할은 아니다. 즉 국방부 장관인 김용현과 ‘계엄사령관’ 박안수가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병력 이동은 가능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미국은 ‘비상계엄’ 상황을 알고 있었다. 즉 병력 이동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아니면 이동 중인 병력을 원대 복귀시키는 조처를 하는 것은 가능했다. 왜냐하면 ‘데프콘 4 단계’에서도 주한미군의 통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할 때 평시의 경우에도 ▶ 전쟁 억제와 방어를 위한 한미연합 위기관리 ▶ 전시 작전계획 수립 ▶ 한미연합 3군 교리 발전 ▶ 한미연합 3군 합동훈련과 연습의 계획과 실시 ▶ 조기 경보를 위한 한미연합 정보관리 등을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기로 합의했다. 특전사 등의 병력 이동은 ‘한미연합 위기관리’에 해당한다. 주한미군이 ‘위기 관리’ 명목으로 원대 복귀를 지시할 수 있는 것이다.
김용현과 박안수 등 내란 주범들은 합참 지휘통제실에서 병력 이동 현황을 체크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지휘통제실은 지휘부가 위치한 시설 혹은 작전과 상황 유지 시설을 일컫는다. 지휘통제실엔 C4I(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C4I 체계 운용은 ‘한미연합 정보관리’에 해당한다. 즉 미국이 ‘비상계엄’을 차단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지휘통제실의 C4I를 통제함으로써 내란 세력의 지휘 체계를 마비시킬 수 있었다.

평시 작전통제권이 환수된 조건에서 12.3 ‘비상계엄’이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 하에 이뤄졌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관은 자신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여 ‘비상계엄’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막을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윤석열의 내란을 방조 혹은 최소환 방관했다는 지적은 작전통제권 문제에서도 적용된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