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초강경 ‘핵무력 정책’ '통일 성사 불가' 강조 속 남한 전전 긍긍
미국, 미 해군의 서해 훈련과 한국에 미국 함정의 모항 설치 가능성 제시
이승만부터 핵무기 관심, 미국의 해외 전술핵 최우선 외교 관리 대상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미국의 저지 작전

북한은 핵무력 정책을 최고의 법인 헌법에 명시하고 핵무기 발전을 고도화한다고 밝힌데 이어 한미일 군사동맹을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핵무기 생산을 크게 늘리는 방침을 공개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해서도 “더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정치권과 언론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관련 발언이 주목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7일 방영된 KBS 신년 대담에서 "어떤 분은 한국은 북한같이 단단한 화강암층이 없어서 지하 핵실험을 하기 어려워서 곤란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 종합적으로 우리가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이 국익에 더 부합된다"라며 독자적 핵개발에 선을 그었다.

북한의 초강경 ‘핵무력 정책’ '통일 성사 불가' 강조 속 남한 전전 긍긍

실제로 우리나라는 현재 25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고 있고, 원전 기술을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원전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어 NPT 탈퇴나 그에 따른 각종 제재를 각오한다면 1~2년 안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메지시를 공개한 셈이다. 윤 대통령은 과거에도 “핵 개발 역량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에 비춰 마음만 먹으면 시일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북한 핵에 대해 국내 수구보수층 일부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자체 핵무기 보유, 또는 미국 전술핵무기 재배치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신 장관은 지난 2월 국회 정치·외교·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실전 배치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 '북핵 동결' 기류가 강화될 것이라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지적에 대해 "미국이 북한의 공갈에 말리고 휘둘려서 동맹국과의 조약상 의무를 저버리면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24년 2월 22일>.

신 장관은 이어 "지난해 워싱턴 선언에 이어 한미가 함께하는 일체형 확장 억제 체제가 있기 때문에 북한이 ICBM을 실전 배치해도 한미 동맹이 약화할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 북한 핵에 대한 미국 핵우산 제공 정책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현 상태의 핵 관련 한미 동맹은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과 신 장관의 발언은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그의 집권 이후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미 대북공조 구조가 ‘북핵 동결과 북미관계 개선’ 등의 내용으로 변화할 가능성에 대한 반응으로 풀이된다.

미국, 미 해군의 서해 훈련과 한국에 미국 함정의 모항 설치 가능성 제시

윤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발언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현직 대통령의 입에서 50여 년 만에 최초의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023년 1월 11일 국방부·외교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자체 핵무장과 관련해 북한 핵 문제가 심각해지면 ‘한국에 전술핵 배치를 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12일 한국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북핵 위협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말한 것이라며 핵무기전파방지조약(NPT) 체제를 준수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공지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미국과 핵 확장억제 공동기획, 공동연습 추진방침을 밝히자 바이든 대통령이 ‘no’라고 부인했다. 이어 미국 국무부, 국방부도 한 목소리로 미국의 대북 핵전략은 미국의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세계핵전략의 일부로 대처한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미국은 현재의 북한 핵 공격력이 미국을 크게 위협할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한일 두 나라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방침을 고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과 접하고 있는 한국이 특히 반발하는 양상이다.

윤 대통령의 연이은 대북 강경발언은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 사용은 김정은 정권의 종말’이라고 경고했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대북 핵정책에 불안감을 느끼는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미국의 대북 핵전략 구도 속에서 북한이 핵으로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 보복을 가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와 그 사용을 법제화한 상태로 미국의 대북 핵공격 발생 시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미 본토나 하와이, 괌 공격과 이로 인한 미국의 대응, 동북아의 화약고 대폭발 가능성 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이 막대한 자국 피해를 감수하면서 한반도 핵전략을 수행할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즉 미국이 세계대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 것이냐 하는 의문이 커지면서 윤 대통령의 입을 통해 여러 형태의 메시지로 발설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핵 관련 발언은 미국과 북한, 일본 정부는 물론 국내의 관심을 집중시킨 효과는 있었고 미국이 군 장성의 입을 통해 반응을 나타냈다. 미국 해군참모총장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와 함께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를 더욱 강조하면서 미 해군의 서해 훈련 가능성, 부산 등에 미국 함정의 모항을 설치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한국 정부에 공개적으로 미국의 방침을 공개한 것이다.

이승만부터 핵무기 관심, 미국의 해외 전술핵 최우선 외교 관리 대상

돌이켜 보면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도 미국에 대해 100% 신뢰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핵무기 자체 개발 시도가 있었다. 미국이 6.25 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던 탓인지 한국 정부도 핵무기에 대한 관심을 1950년대 중반부터 갖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계획으로 핵무기 제조 계획이 포함된 핵에너지 연구 계획에 대해 정부 지원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당시 핵무기에 대한 반대 여론이 낮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핵 공격을 받고 항복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의 핵무장 시도를 저지했고 1990년대 북한 핵개발을 저지할 움직임을 취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북한이 2020-2022년 개량된 핵무기 보유와 미사일 개발을 통한 핵무장 강화를 시도하자 남한 사회에서 자체 핵무기 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일고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는 동북아 안보 질서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미국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미국이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을 저지시켰던 사례를 참조하면 향후 미국의 대응이 어떨 것인지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1958년 1월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뒤 그 해 2월 3일 280미리 원자포와 지대지 미사일 어네스트존을 공개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최소 1백여 개에서 최고 1천여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도입했으며 핵무기 종류는 전술 핵무기와 중성자탄, 전략 핵무기와 전역 핵무기 등으로 보도되었다. 주한미군의 핵 기지도 군산, 광주 등 19개 지역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남한에 들여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로 가능했다. 미국은 당시 소련과의 냉전 중이었고 남한 핵무기는 비핵국인 북한보다 핵 강국인 소련 타격을 목표로 배치되었다.

미국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발생 직후 카터 대통령이 직접 그 진압을 결정했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미국 핵무기 보호 차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해외 배치 핵무기는 해외 정책 가운데 최우선 관리대상의 하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미국이 해외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에 대한 관리가 얼마나 배타적인지 하는 것이 드러나면서 윤 대통령이 말한 핵확장억제 공동기획, 훈련에 대해 미국이 단칼에 거부한 이유도 설명된다 하겠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미국의 저지 작전

박 대통령 정부가 자체 핵무장을 시도한 것은 미국 정부가 1970년 7월 한국 정부에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을 통고한 뒤 1971년 미 7사단 병력 2만 6천 명이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 뒤였다. 이에 한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착안했고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 시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말 핵무기를 1977년까지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라는 비밀 계획을 수립하라고 청와대 경제 2비서실에 지시했다. 한국 정부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프랑스에서 구입하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주한 미 대사관은 1974년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 국방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의 한국 방어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자극받아 독자적 방어능력을 키우기 위해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려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1975년 3월 답신을 통해 “한국의 핵 무장은 동북아 균형을 파괴할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미국은 한국이 핵 공격력을 갖추지 못하도록 적극 저지해야 한다”면서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직접, 강력한 조치를 취할 방침을 밝혔다.

포드 미 행정부는 캐나다, 프랑스 정부와 협력해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중단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이 함락되면서 한국의 미국에 대한 우려가 커졌으며 박 대통령의 핵무장 추구 결의가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함락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 해 6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에 대한 포부를 처음 밝혔다. 이는 미국의 재처리시설 구입 중단 압박에 대한 대응이자 미국의 대가를 더 얻어내려는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은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미국이 남한에서 1개 사단을 철수하기로 한 것에 대한 불만에서 나왔으며 이 때문에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은 1979년까지 캐나다에서 경수로를 구입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경수로에서 생산되는 사용 후 핵연료에서는 재처리시설을 통해 농축 우라늄보다 쉽고 빠르게 핵무기 원료를 추출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경계했다. 미국은 한국이 핵무장을 할 경우 미국과의 결별, 국제적 제재, 외교와 무역 타격, 일본의 비핵정책 파기 위험, 중국과 러시아의 한국 핵공격 위험 등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며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도 한국이 1975년 4월 캐나다에서 원자로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했다. 이 조약에 가입하면 한국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원칙에 순응하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안전지침을 준수해야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미국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행한 조치로 추정되고 있다.

키신저 장관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한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포기 압박을 지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캐나다 정부가 한국 정부에 원자로 판매 조건으로 재처리 공장시설을 건설하면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키신저 장관은 캐나다 국무장관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결정타가 될 것’이라며 동의했다.

키신저 장관이 주도한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박정희는 결국 1976년 1월 프랑스에서 재처리 기술을 도입하려는 계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핵무기 개발 계획을 중단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핵무기 제조를 위한 암호명 890계획 비밀계획 추진용으로 만든 은행계좌가 1979년 말 박정희가 살해될 때까지 존재했다. 미국은, 박정희가 그런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강압정치를 통해 한국 내에서 국회 등과 사전에 협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판단했다.

카터 행정부는 1977년 주한미군 1천 명을, 1978년 5백 명을 철수시킨 뒤 1979년 철수 계획을 중단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핵무장 계획이 밝혀진 뒤 전면철수 계획을 백지화한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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