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자본론>의 핵심 이론인 잉여가치론은 자본가와 노동자 간에 발생하는 엄청난 빈부격차가 능력 차이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구조적 착취 때문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이론이다. 요컨대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대학생 시절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시간이 흘러 마르크스 <자본론> 해설서인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가 되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자본론> 내용을 알게 되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보탬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2년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에어컨 실외기를 둥지로 삼으려는 비둘기들을 한참 쫓아내며 힘겹게 글을 쓰고 있었다. 갑작스레 카톡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공기업 노동조합 간부로부터 온 문자였다. 내 책을 교재로 조합원들과 학습 중인데 문의 사항이 있다는 것이다. 문자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 편한 시간에 전화를 달라고 했다. 이내 전화벨이 울렸다.
“그동안 제가 작가님 책으로 여러 노동조합에서 학습모임을 해 보니 제조업이나 건설 쪽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착취구조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해합니다. 그런데 공무원이나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아무래도 사기업 자본가에게 고용된 형태가 아니다 보니 마르크스가 얘기한 착취구조가 자신들에게 적용되는지 아닌지 헷갈리더라고요. 일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국가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집행위원회라고 했으니, 공공부문 노동자 역시 민간 부문과 비슷한 처지라는 식으로 얘기했는데요. 뭔가 명쾌하게 정리된 느낌은 아니어서요.”
<자본론>에 의거하면 민간 기업의 이윤은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공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니 충분히 헷갈릴 법하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같은 공기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합리적인 비용으로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공익을 목적으로 운영된다. 필요하다면 적자운영을 감수하기도 하며, 임금, 예산, 사업 등은 정부와 의회의 계획과 통제하에 결정되고 집행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기업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공기업은 민간 부문의 영향과 압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설립 목적과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민간 기업의 효율성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며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공공부문 노동자 역시 민간 부분 노동자와 끊임없이 비교되며 공공의 적이자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린다. 그러니 해당 국가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향하는 경우 공기업 노동자 역시 자본주의 착취의 자기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겠다.
이렇게만 정리하고 끝낸다면 칼로 무를 두 토막 내듯 명쾌하겠지만, 대중을 상대로 <자본론>을 강의해 온 사람으로서 꼭 짚어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단편적이고 협소하게 받아들이는 경우 빠지기 쉬운 오류인데, 그 얘기를 좀 해 보겠다.

알다시피 잉여가치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기초로 한다. 재화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를 분배하는 데에 있어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에 기여한 것보다 훨씬 적게 임금으로 지불받는다. 예컨대 생산에 100을 기여했다면 받은 임금은 50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은 노동자가 지불받지 못한 나머지 50에서 나온다.
사회주의 사회가 되어서 기업 대부분이 공기업으로 전환되었다고 가정하자. 이제 공기업 노동자들은 회사의 경영 성과를 모두 인건비로 나눠서 가져가면 그만일까? 좀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자. 사회의 모든 부가가치를 그 사회 구성원들이 죄다 먹고 마시는 데에 써 버리면 새로운 분야에 투자하거나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할 재원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부가가치의 일정 부분은 새로운 투자나 기술개발을 위한 ‘잉여’로 보류하고, 남은 것을 구성원의 생계비로 써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마르크스 잉여가치론의 의미를 마치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을 죄다 노동자 몫의 인건비로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자본가 역시 이윤(잉여가치)을 취득해서 새로운 투자처나 기술개발에 투입하지 않는가. 물론 경영에 소홀하고 낭비하며 흥청망청하는 자본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관하면 냉혹한 시장경쟁에서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스템 모두 어느 정도의 ‘잉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주의에서도 부가가치의 일정 부분을 재투자나 연구 개발 등을 위해 유보해야 한다면, 잉여가치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본주의를 마냥 착취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 아닐까?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차이를 만드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소유권과 민주주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소유권이 자본금을 투자한 자본가에게 귀속되고 그러한 소유권을 명분으로 자본가는 해당 기업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전취한다. 기업의 운영방식이나 이윤의 사용처 등은 전적으로 자본가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다. 정규직을 고용할지 비정규직을 쓸지, 인건비는 어떤 수준으로 할지, 이윤을 어디에 투자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자본가의 권한이라는 의미다.
반면에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소유권이 공동체에 귀속되기 때문에 어떤 특정인의 의사에 따라 운영될 수 없으며, 임금 수준, 잉여(유보금)의 규모 및 사용처 등이 공적인 영역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결정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주의를 구현하는 일은 자본가의 독재와 전횡으로 운영되는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학습모임을 하면서 잉여가치가 바로 착취라는 식으로만 앙상하게 이해하다 보니, 공공부문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게 애매했는데 이제 좀 명료해지네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의 집행위원회라고 한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전에 저희가 어떤 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었는데요. 그분은 국가가 도로를 깔거나 발전소를 짓고 다양한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본주의 착취 시스템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울산에서 과자를 생산하는 개별 자본가가 서울에서 과자를 판매하겠다고 자비로 도로를 깔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자본가가 자신의 공장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발전소까지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용할 노동자가 업무 능력을 갖추도록 국어, 영어, 수학, 화학, 물리를 일일이 가르칠 여력은 자본가에게 없다. 국가는 세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다만 국가기구의 성격을 이런 측면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하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억압기구일 뿐이며 혁명을 통해 즉시 무력화해야 한다.’
실제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국가의 이러한 억압기능에만 주목해 혁명을 통해 국가기구의 즉각적 폐지를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사회주의 세력이 국가권력을 쟁취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재’라는 표현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독재란 전두환, 박정희 같은 식의 행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한번 상상해보자.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공기업을 육성하고 공공임대주택을 확충하며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시행하는 법 제정을 시도한다. 민간건설업체, 사학재단, 민간보험회사 같은 기득권 자본가 계급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조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반발에 맞서 개혁 법안과 제도를 추진하고 뚝심 있게 집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99%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1%의 기득권 부르주아에게 행하는 ‘독재’인 것이다. 민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라 하겠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이 국가기구 내에 심어놓은 장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데, 만약 진보 성향의 노동조합이 국가기구와 공기업 내부에 튼튼하게 조직되어 있다면 훼방자의 방해를 무산시키고 정부가 빈틈없이 개혁을 추진하는 데에 큰 지원군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탄탄한 조직화는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다.
계급이 없는 진정한 해방 세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가 지나고 사회주의적 생산 양식이 전면화되면서 가능해질 것이다. 그때에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보편화되어 자본가 계급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며, 적대적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는 국가 기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지배계급의 억압기구로서 국가의 기능은 사멸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기능만 남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의 집행위원회라고 일컬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학습모임에서 책을 다 읽은 후 저자와의 만남 형식으로 이런 심화 내용을 다루면 좋을 것 같네요. 다음에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냈다. 어디선가 ‘구구구구’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강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활동가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뿌듯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에어컨 실외기 쪽 확인에 들어갔다. 이놈의 자식들! 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크기의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이로제로 인한 환청인가? 아니면 벌써 실외기에 똥 싸지르고 도망간 거 아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 출판사 글 납품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다시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세상에 하고많은 상품 중에 하필이면 값어치가 비둘기 똥 수준인 ‘글’을 팔아 먹고살겠다고 결심했을까? 이게 다 대학교 때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은 충격의 여파구나. 역시 불온서적인 이유가 있네. 전화로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대화를 나누고서는 방구석에서 이러고 지내는 내 모습에는 제법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