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일본에서 벌어진 논쟁
편집자주
앞으로 수시로 경제전문가 분석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임수강 블로그에서 필자의 동의를 구해 퍼 온 글이다.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30년에 대해 최근 한국경제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깊이있는 분석글이 참고가 되길 바란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자산(부동산, 주식 등) 가격 거품의 형성과 붕괴에 대해 중앙은행이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이와타(岩田規久男)와 오키나(翁邦雄) 사이에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와타-오키나 논쟁”으로 불린다. 두 사람 사이에서 시작된 논쟁은 이후 수많은 학자와 연구자들이 참여하면서 그 규모가 매우 불어났고 또 그만큼 유명해졌다. 논쟁의 배경에 실제로 일본에서 거대한 자산 가격 거품이 생겨났다가 꺼진 사건이 있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본의 1990년은 “파란만장한 1년”
자산 가격의 거품을 다룬 『복합불황(復合不況)』이라는 저서를 1990년대 초반에 펴낸 미야자키(宮崎義一) 교수(당시)는 1990년을 “파란만장한 1년”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일본에게 1990년은 자산 가격 면에서 말 그대로 만(萬) 개의 지팡이만큼 높은 물결 같았다. 그 이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름세를 보이던 일본의 자산 가격이 이 해에 이르러 갑자기 물결이 부서지듯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 발걸음을 뗀 금융·자본 시장 개방과 1985년에 맺어진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 가격이 급속히 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금융·자본 시장 개방을 보자. 1980년대 초, 미국 정부는 자국의 구조조정을 위해 금리를 높게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는, 금리를 높게 유지하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문을 닫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실업자가 늘 것이며, 실업자가 늘면 노동조합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는 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본에 우호적이었던 레이건 행정부는 노조의 힘이 약해지면 임금 수준이 낮아져 자본의 수익률이 올라갈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낮춤으로써 돈의 실질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기대한 화폐자본가들의 이해도 금리를 위쪽으로 이끄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이 달러로 표시된 자산에 대해 이자를 더 많이 주겠다니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달러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달러로 표시된 미국 상품의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 그러므로 미국 기업들이 상품을 수출하기가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미국에 수출을 하는 다른 나라 기업들은 상품 대금으로 받는 달러의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에 수출을 하기에 더 유리해진다. 현실에서도 높은 달러 가치의 영향으로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미국은 상품수지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입을 줄이거나 수출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달러 발행을 늘려서 적자 대금을 메우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달러 발행을 늘리기 위해서는 미국 주변 나라들에서 달러가 활발하게 흘러 다녀야 한다. 이리하여 미국은 이 무렵부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대해 금융시장과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스탠포드 대학의 솔로몬(Ezra Solomon) 교수(당시)가 작성한 “솔로몬 보고서”는 일본 시장 개방의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금융시장과 자본시장 개방은 당연히 달러 자금의 일본 유입 증가로 이어졌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나 독일 등 주변 나라들의 팔을 비틀어서 인위적으로 주변국 화폐 가치를 끌어올림으로써 미국의 상품수지 적자를 줄여 보려고도 했다. 그리하여 맺어진 것이 이른바 1985년의 플라자 합의이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일본은행(중앙은행)은 엔/달러 환율을 끌어내리기 위한, 다시 말해서 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정책개입에 나섰다. 엔/달러 환율은 1984년 250엔에서 1986년에는 160엔으로, 그리고 1987년에는 123엔으로 떨어졌다.
환율이 떨어짐에 따라 수출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자 일본 당국은 내수를 늘림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는데, 그 수단 가운데 하나는 금리를 낮추는 것이었다. 1986년 1월에 일본은행은 정책 금리를 5%에서 4.5%로 내린 데 이어 그 이후 1년 수개월 사이 잇따라 5회에 걸쳐 내려서 1987년 2월에는 2.5%에 이르렀다. 한편 1987년 10월에 뉴욕의 주식시장이 폭락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해 낮은 금리를 계속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금리를 인상하면 자금이 금리가 높은 쪽으로, 곧 미국에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미국이 걱정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요구는 일본이 장기간 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되었다.
이처럼 자산 구입을 목표로 삼은 외국 자금의 유입이 늘어나고 여기에 더해서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행이 금융을 완화하는 정책을 펴면서 자산 가격 버블이 생기는 자금 면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자금이 풍부해지면서 수익성 높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기업들은 부동산과 주식 매수를 늘리는 이른바 “재-테크”에 나섰고 은행들은 담보대출을 늘려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먼저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주식값도 그 뒤를 따랐다.
실물 부문도 1986년 11월부터 1991년 7월까지 56개월 동안 확장을 이어갔다. 그 이전에 일본 경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확장 국면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1954년 11월에서 1957년 6월까지 31개월 동안 이어진 “진무(神武) 경기”, 1958년 11월에서 1961년 12월까지 42개월 동안 이어진 “이와토(岩戶) 경기”, 그리고 1965년 10월에서 1970년 7월까지 57개월 동안 이어진 “이자나기(いざなぎ) 경기”가 그것이다.
더욱이 일본의 투자자들이 국내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려서 대외투자를 늘렸기 때문에 1986년 무렵부터 1990년까지 세계에는 “저팬 머니”가 넘쳐났다. 일본의 투자자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뉴욕,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에서 부동산과 기업 주식을 사들였다. 일본의 은행들이 대출을 늘려 나가자 대차대조표의 자산 계정이 팽창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일본 은행들은 한동안 세계 최대 규모의 은행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1990년 들어 자산 가격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품 붕괴의 신호가 된 것은 그 이전 해의 금융정책 변화였다. 1989년에 새로 일본은행 총재가 된 미에노(三重野康)는 중앙은행 정책 금리를 12월에 3.75%에서 4.25%로, 1990년 3월에는 5.25%로, 그리고 8월에는 6%로 올렸다. 더불어 1990년 3월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을 규제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이를 계기로 먼저 주식 가격이 무너져 내렸고 이어서 부동산 가격도 그 뒤를 따랐다. 도쿄 증권시장 평균주가는 1989년 말 3만 8,915엔에서 1990년 말에는 2만 3,848엔으로 떨어졌다. 한 해 하락의 정도가 폭으로는 1만 5,067엔, 비율로는 38.7%에 이른다. 1990년 연중 최저 주가는 10월에 2만 221엔을 찍기도 했다.
부동산 가격이 무너짐에 따라 부동산 기업과 재-테크 기업의 파산이 잇달았다. 특히 부동산 기업의 파산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주식 가격과 부동산 가격이 무너지면서 사라져버린 자산 가격 총액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대침체의 교훈』을 쓴 쿠(Richard C. Koo)에 따르면 그 규모가 GDP의 세 배가량에 이른다. 미국 대공황 당시 날아가버린 자산 가격 총액이 GDP의 한 배가량이었다는 사실에 견줄 때 일본의 자산 가격 하락 폭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산 가격 붕괴와 함께 실물 부문에서도 성장률이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GDP 성장률은 1986~1989년에는 연평균 5%, 1990년에는 4.9%였다. 이것이 1991년에는 3.4%로, 그리고 1992년에는 0.8%까지 낮아지더니 1993년에는 드디어 마이너스(-0.5%)로 돌아섰다. 91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연평균 GDP 성장률은 1.3%였다(日本 總務省 統計局, https://www.stat.go.jp/index.html).

이와타 – 오키나 논쟁
<이와타의 “중앙은행 책임론”>
일본 자산 가격 거품은 1990년부터 꺼지기 시작했는데, 일본 당국은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전망했다. 여러 투자자들도 내심 그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자산시장은 점점 더 수렁에 빠졌고 실물경기도 살아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GDP는 1993년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경제가 빠르게 축소하면서 일본은행은 정책 금리를 1991년 7월에 6%에서 5.5%로 0.5%p 인하했다. 그 이후에도 정책 금리는 여러 차례 낮아져서 1992년 7월에는 3.25%에 다다랐지만 이것이 경기 회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일본의 대체적인 여론은 자산 가격 거품이 생겨났다가 꺼지고 그에 따라 실물 경제가 비틀거리는 데 대한 일차적인 정책 책임을 중앙은행보다 대장성에 묻는 쪽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일본은행은 형식상으로나마 대장성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품이 꺼지는 국면에서 일본의 화폐 증가량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자 경기를 살리는데 중앙은행이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닌가 하는 볼멘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목소리의 출처는 자산을 많이 가진 계층이었다. 상가를 임대하여 영업을 하는 소상공인, 무주택자 등에게는 자산 거품의 붕괴가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조치(上智)대학의 교수(당시)였던 이와타(나중에 일본은행 부총재)는 앞장서서 그러한 볼멘소리를 대변했다. 그는 자산 가격의 폭락과 경기 후퇴의 원인이 준비금의 통제를 내버려 두고 금리정책에다만 초점을 둔 일본은행의 정책 잘못이라는 주장을 폈다. 다시 말해서, 준비금이 늘어나면 화폐 공급량이 늘어나고 그러면 자산 가격이 회복될 터인데 일본은행이 준비금을 늘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현대의 화폐 시스템은 이중의 화폐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중앙은행과 은행들 사이에서 생기는 화폐 흐름이다. 여기에서는 준비금(reserve)이 유통된다. 준비금은 중앙은행이 창출하여 은행들에 제공하는 장사 밑천과 같은 것이다. 은행들은 중앙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이를 통해 준비금 거래를 한다. 중앙은행은 은행들에 대한 준비금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을 통해 그들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준비금을 손에 쥔 중앙은행의 말을 은행들이 거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은행과 고객(개인과 기업) 사이의 화폐 흐름이다. 여기에서는 은행들이 준비금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출한 예금이 화폐로 유통된다. 고객들은 은행이 창출한 돈을 빌린다. 은행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어떤 조건으로 빌려줄지를 결정한다.
준비금의 원래 의미는 지급준비금이다. 은행은 여러 사람들한테서 예금을 받아 이를 대출에 운용한다. 은행은 다양한 만기의 예금 인출에 대비하여 어느 정도의 돈을 따로 마련해 두어야 하는데, 이를 지급준비금이라 한다. 과거 중앙은행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은행들이 각자 지급준비금을 보유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제도가 발전하면서 이 지급준비금은 점차 중앙은행으로 집중되었다. 오늘날에는 은행들의 준비금 대부분이 중앙은행에 집중되어 있다. 정책 당국은 예금의 일정 비율을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하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한다(최근에는 이 제도의 중요성이 낮아지면서 이를 운용하지 않는 나라들도 생기고 있다).
중앙은행이 은행들에게 준비금을 제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중앙은행은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어음이나 채권, 외환 등과 맞바꾸는 방식으로 은행들에게 준비금을 제공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은행들에게 준비금을 대출해줄 수도 있다. 정부가 개인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조달을 통해 물건을 사들이면 정부 예금계좌에서 개인이 거래하는 은행계좌로 자금이 이동하는데, 이렇게 해서 은행 준비금이 늘어나기도 한다.
거꾸로 중앙은행이 은행들에게 채권을 팔거나 정부가 세금을 거둬들이면 은행들의 준비금이 줄어든다. 은행들은 준비금이 남는다면 은행 간 자금 시장(콜 시장)에서 이를 운용하고 부족하면 빌려온다. 중앙은행은 은행들의 준비금 수요 공급을 예측하여 공개시장 운영을 통해 준비금을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한다.
이때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준비금과 은행 대출량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준비금 증가가 원인이 되어 은행 대출량이 증가하는가 아니면 은행 대출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준비금이 증가하는가?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거품의 생성과 붕괴에 대한 책임이 중앙은행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릴 수 있는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타는 준비금(본원통화, 머니타리 베이스, 베이스 머니 등으로도 불린다)이 증가하면 은행의 대출량이 일정한 배수만큼 자동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일정한 배수를 신용승수(화폐승수)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중앙은행이 은행에 준비금을 공급하면 은행은 그 일부를 법정준비금으로 남겨 놓고 나머지를 대출한다. 대출을 받은 사람이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지급하여 그 사람이 이를 다른 은행에 예금하면 그 은행도 법정준비금을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한다. 이런 과정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면 은행제도 전체로서 최초의 준비금이 몇 배의 예금과 대출을 창출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이와타의 설명 방식은 주류 경제학의 설명방식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화폐금융론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와타는 1991년 이후 일본의 대출 증가율, 곧 화폐 공급 증가율이 낮아진 것은 준비금 증가율이 낮은 탓이라 설명한다. 다시 얘기해서, 일본은행이 준비금 공급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은행시스템 전체의 대출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은행이 신용 창출 규모를 늘리고 이것이 경기 확대와 자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 등을 통해 더 적극적으로 준비금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기가 확대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중앙은행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를 연장하면 거품이 만들어진 책임도 중앙은행에게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이와타에 따르면, 자산 가격의 상승도 결국은 은행의 대출 규모에 달려 있는데, 이 대출 규모를 결정하는 것은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는 준비금의 규모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의 반론>
일본은행 조사통계국 기획조사과장(당시)이있던 오키나(나중에 京都大学 교수)는 이와타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폈다. 준비금 증가가 원인이 되어 은행 대출량이 증가한다는 이와타의 주장에 대해 오키나는 거꾸로 은행 대출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준비금이 증가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오키나 주장의 핵심은 준비금이 화폐 공급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라는 점에 있다.
은행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예금을 받아서 대출하는 것이 아니다. 결제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은행들은 먼저 대출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은행들은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때 누군가의 예금으로 받아 놓은 현금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통장에 단순하게 예금액을 기록해준다. 이를 은행의 신용창조라 한다. 그렇게 해서 고객에 대한 은행의 대출이 증가하고 고객의 예금도 증가한다. 예금이 먼저 있고 대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출이 먼저 발생하고 예금이 생기는 것이다.
은행들은 증가한 예금에 대해서 규정으로 정해진 지급준비금을 쌓아야 한다. 오키나는 은행들이 필요 준비금을 나중에 쌓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실제로 실무에서 은행들은 정해진 지급준비금을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 맞춘다. 예컨대 지난 달 지급준비금의 평균 잔액이 규제 수준에 모자랐다면 그 모자라는 부분을 이번 달에 남기는 방식으로 맞춘다는 의미이다. 이와타는 준비금을 바탕으로 은행들이 대출을 해준다고 설명하는데 비해 오키나는 거꾸로 은행들이 대출을 먼저 해주고 사후적으로 필요한 준비금을 마련한다고 설명한다.
만약 은행들이 정해진 준비금을 맞추지 못한다면 은행들은 준비금을 마련하기 위해 콜 시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준비금의 부족 정도에 따라서 은행들 사이에 준비금을 둘러싼 경쟁전이 발생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콜 금리는 폭등할 수 있다. 오키나에 따르면, 그러한 상황은 금융시장의 안정을 헤치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대체로 준비금을 충분히 공급하여 콜 금리의 상승을 막는다.
오키나 주장의 요점은 일본은행이 준비금을 통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은행들의 대출량에 대응해서 준비금을 수동적으로 공급한다. 곧, 대출에서 예금으로, 그리고 예금에서 준비금으로 이어지는 연쇄 관계가 있다는 것, 은행들의 대출 증가가 원인이고 준비금 변동은 결과라는 것, 따라서 준비금은 중앙은행이 임으로 조작할 수 있는 변수(외생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오키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오키나는 1990년대 초에 일본의 준비금과 화폐 공급량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를, 실물경제가 위축되고 재생산이 수축하여 자금수요가 떨어진 탓에서 찾는다. 자금 수요 감소에 따라 은행 대출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준비금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지 일본은행이 준비금 공급에 소극적이어서 준비금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오키나 논리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준비금이 늘어나지 않는데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논쟁의 평가
<이와타 논리의 보수성>
사실 이와타-오키나 논쟁은 학설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는다. 이미 1800년대 초부터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는가를 두고 통화학파와 은행학파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통화학파는 통제할 수 있다고 봤고 은행학파는 은행권이 거래의 필요에 따라 발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봤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에는 화폐(통화)주의자와 케인지언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타는 화폐주의 전통에, 그리고 오키나는 케인즈주의 전통에 가깝다.
화폐주의자들의 논리는 대체로 금융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한다. 따라서 화폐주의에 기반을 둔 이와타의 논리는 정치적 이념 면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렇다면 신용 공급의 증가가 금융자본가에게 가져다주는 이로운 점은 무엇인가. 만약 신용 공급의 증가가 상품 가격 상승과 화폐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금융자본가에게는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이와 달리 증가한 신용 공급이 상품시장이 아니라 자산시장으로 흘러가서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쪽으로 기능한다면 이는 금융자본가들이 바라는 바이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자산 가격이 급등할 때에 상품 가격은 매우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물가(상품 가격)는 오르지 않으면서 자산 가격만 상승한 것이다.
이와타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은행 대출의 증대를 통해 자산 가격이 다시 상승하는 상황이다. 이와타는 나중에 “제로 금리”와 “양적 완화”, “인플레이션 타겟팅” 제도의 도입을 주장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모두 화폐 공급량의 증가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는 화폐 공급량의 증가가 자산 가격의 유지와 상승에 유리하게 기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타의 보수성은 집값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금리를 올려 집값 잡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산 가격 버블을 인위적으로 붕괴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행은 거품의 형성과 붕괴에서 책임 면하기 어려워>
준비금과 대출량의 관계는 오키나의 설명이 진실 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준비금은 오키나의 설명처럼 기본적으로 은행들의 대출 행위에 의해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중앙은행이 준비금을 통제하여 전체 대출량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오키나는 이러한 사실의 강조를 통해서 일본은행이 거품의 발생과 붕괴, 그리고 그에 이은 경기 침체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준비금이 대출량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거품의 발생과 붕괴에 대한 일본은행의 책임을 면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은행의 수동성(중앙은행의 시장 상황 수용)은 어느 정도 인정되지만 그것이 금융정책 실패의 책임 회피 논리가 될 수는 없다.
먼저 일본은행은 준비금 이용에 따른 비용이나 준비금 이용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재할인율의 변경은 은행이 준비금을 얻는 비용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중앙은행이 채권을 사고파는 공개시장 운영은 준비금이 은행에 흘러 들어가는 속도와 양을 조절하는 일차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 신용제도의 축이라 할 수 있는 중앙은행은 금융시장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금융시장 상황의 변화는 당연히 은행의 대출 행태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본다면 중앙은행이 오키나가 상정하는 바처럼 그저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은행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출을 고려했어야 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자산 가격 거품은 분명히 일본은행의 금융완화와는 독립된 요인에 의해서 생겨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거품을 인위적으로 키운 데에는 일본은행의 책임이 크다. 일본은행은 은행들의 과잉 신용창조를 억제하기보다는 추인하는 쪽이었다. 무엇보다 자금이 자산시장으로 흘러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은행 대출은 설비투자를 향할 수도 있고 자산시장을 향할 수도 있다.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은 경제 전체의 재생산 규모에 따라 규정되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자산 거래를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이론상 한계가 없다. 자산 가격이 무한정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행으로서는 자산 시장으로 흘러가는 자금을 규제해야 했지만 손 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시이(石井寬治)에 따르면, “대미협조”라는 논리가 개입하고 있기는 했지만.
자산 거품에 대한 일본은행의 책임은 내부자가 잘 설명한 바 있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은행 총재를 지낸 미에노(三重野康)는 취임 당시 그동안 잘못된 통화 정책으로 국민은 가진자와 못 가진자로 갈리고 지주는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잘못된 통화 정책이 “금융완화 정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에 따르면 금융완화 정책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토지 투기에 힘을 빌려주었고 그 결과 토지가격이 급등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거품을 종식시키고 탐욕스런 부동산 투기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책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정리하자. 일본에서 벌어진 이와타-오키나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중앙은행의 준비금 규모가 대출량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를 두고 벌어졌다. 그러나 이 논쟁의 본질은 중앙은행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데에 있다. 중앙은행은 오키나가 상정하는 것처럼 힘없고 수동적인 존재일 수는 없다. 중앙은행은 자산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주어야 한다. 다만 이와타가 주장하는 식으로 중앙은행이 자산 계층에만 유리한 쪽으로 힘을 행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앙은행의 힘은 민주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국민 삶의 질을 개선하고 평등을 이루는 방향으로 행사되는 것이 마땅하다.
<참고한 자료>
建部 正義(1995), “マネーサプライ・コントロールをめぐる岩田・翁 論争について―問題の所在―”, 『信用理論研究』, 第13号, 信用理論研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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