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시대의 무용에서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서구 무용의 “우리(조선)식” 수용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군중무용과 타프춤(Tap dance)의 ‘진격’이다. 오늘 연재에서는 군중무용을 우선적으로 다루어 보겠다.
북측에서 무용은 사회주의 조국 건설 시기에 3개의 무용 단체를 중심으로 초기 형성기를 거치게 된다. 최승희무용연구소가 신무용의 본산이었다면, 정지수와 부인 리석예가 주축이 된 국립예술극장 무용단이 발레 무용의 토대를 만들었고, 서울발레단을 설립한 한동인과 부인 나숙희를 중심으로 한 최가야무용단 출신들이 대거 포진한 인민군협주단 무용부가 현대무용을 이끌었다. 특히 일제 시절 유명했던 요정 동일관 건물(현 옥류관)에서 둥지를 튼 최승희무용연구소는 천재적인 최승희의 “혁명적”인 노력으로 현재의 “조선무용”을 안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조선 무용사를 관통하면서 북측에서는 군중무용의 전통을 어어 왔다. 그 시작은 항일혁명무용에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투쟁을 하는 와중에 유격대원들이 짬짬히 휴식을 취할 때 추던 춤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원형을 수집 정리하였고, 김정일 위원장 시절에는 그들의 전투성과 생활감정을 담은 춤을 복원 및 재형상화하여 대중에게 보급하였다.
1996년 북측 정부는 무용 부문 창작가와 예술인들에게 새 세대들을 김정일 위원장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드는 '혁명전사'로 준비시킬 것을 역설하며 '항일혁명군중무용'을 대량 창작할 것을 요구하였다.
"항일혁명 선열들이 수령님을 목숨으로 보위한 것처럼 3.4세대들이 김정일 위원장을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도록 교양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혁명전통의 무용작품을 많이 창작해야 한다"면서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한 새 세대들로 하여금 유격대 항일혁명 선열들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고귀한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조국해방전쟁이자 반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한국전쟁 전후에 추던 군중무용 역시 복원 및 재보급을 지시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군중무용의 생활화’를 지시하였고, 당시 새로 복원한 항일혁명군중무용 13편을 직접 ‘총화’하기도 하였다.
![▲ 북측 김명은 화가가 조선 민족의 낙천성과 신명을 그린 조선유화. [사진 : 조선의 오늘 칼무리]](/news/photo/202103/11536_24306_5949.png)
군중무용이란 용어는 1985년 발간된 <무용용어해설>(예술교육출판사)에 등장을 한다. 여기서 군중무용은 “인민들이 대중적으로 추는 무용형식”으로 정의가 되어 있으며, 그 목적을 “인민대중 속에서 집단주의 정신을 키우며 문화생활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군중무용을 배우고 추는 과정에서 인민은 조직성과 규율 등 집단주의를 배양하게 되고, 무용과 음악에 대한 소양과 직접 참여하고 즐기는 계기를 얻는다”고 부연하였다. 이어 “춤의 내용과 형식에서 사회주의적이며, 민족적 특성을 옳게 구현했다”면서 최승희가 만든 “‘조선민족무용동작’에 기초하여 누구나 쉽게 배우고 출 수 있는 동작으로 구성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항일혁명무용이란 새로운 춤의 전통을 만들어 ‘주체적 군중무용’으로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조선무용을 대표하는 민족무용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일제 항일 무장 투쟁 시기에 중국 공산당과 교류하면서 군 내부적으로 다양한 무도회가 열렸는데 이때 추어진 춤이 서양식 사교춤이다. 이는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대지의 딸>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교류를 했던 항일 혁명가들도 자연스럽게 서양식 사교춤을 습득했으며, 이 춤이 항일 투쟁기에 유격대원들의 여가 춤으로 변형 발전되고, 이후 이것을 민족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을 하여 조선식 사교춤으로 발전을 시켜 “주체적 군중무용”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이론적 바탕은 1992년에 나온 <우리나라 사회주의는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식 사회주의다> (김정일 저)와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펴낸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 논문집, 사회과학원의 <조선 로동당의 사회주의 건설 령도사>(1995)에서 찾을 수가 있으며, 이것의 출발은 아래에 적은 1991년 1월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이다.
“당의 영도 밑에 우리 인민의 자체의 힘으로 건설한 ‘우리식’ 사회주의는 사회의 모든 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참다운 인민의 사회이며, 자주 자립 자위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활력있는 사회입니다. 인민 대중 속에 깊이 뿌리 박은 위대한 당의 영도를 중심으로 받들어 나가는 위대한 인민,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 바로 여기에 우리나라 사회주의의 공고성과 기초가 있으며, 그 어떤 풍파와 시련도 이겨낼 수가 있는 위력의 원천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민대중’이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면서 풍부한 문화정서 생활을 마음껏 누리도록 지도자와 당이 현명하게 영도하고 있다는 것”과 그 특징으로 “인민대중이 정신문화적 재부의 창조자일뿐 아니라 그 향유자로 되어 고상한 사상문화 생활을 누린다는 데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 수행에서 “문학예술의 혁명은 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에 맞게 우리식의 새로운 문학예술, 주체의 문학예술을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혁명예술은 ‘혁명적인 내용’과 ‘민족적인 형식’에 기초하여 예술을 현대화 및 통속화하는 것을 기본과업으로 규정하여 우리식 새로운 예술창조라는 방침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무용에서 “눈이 내린다”와 “조국의 진달래” 같은 작품이며, 북측이 세계 무용계에 자랑하는 “자모식 무용표기법”이다.
![▲ 1975년 3월의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 [사진 : 조선중앙통신 칼무리]](/news/photo/202103/11536_24303_5722.png)
김정일 위원장은 조선무용의 바이블로 통하는 <무용예술론>(1992년)에서 조선무용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중 두드러진 것이 바로 “생활”이라는 키워드이다. 무용작품의 생활화와 생활무용을 많이 창작 보급하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이는 “무용이 인민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양하여 자주성 실현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 추동하는 대중 교양의 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용창작’ 편에서 북측 문학예술이론의 핵심인 “종자론”을 거론한다. “종자는 작품에 반영이 되는 생활의 사상적 알맹이다. 종자는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는 핵이다.”라며 “작품의 종자는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무용작품의 종자는 창조적인 노동생활 속에서 찾아내어야 한다”는 강령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강령적 지침은 북측의 ‘군중문화사업’으로 구현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군중무용’이 나타난 것이다. 이 책의 ‘생활과 무용’ 편에서 “이제는 직접 참여하는 참여 무용, 생활무용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 교육도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아래와 같이 군중 무용을 장려하고 있다.
“군중무용을 발전시켜야 한다. 군중무용은 대중적으로 추는 춤으로서 사람의 생활을 흥겹게 하여준다. 사람들이 흥이 나면 춤판을 벌이고 춤을 춘다, 사람들은 흥이 나야 춤을 추지만 춤을 추게 되면 흥이 더 나게 된다, 군중 무용은 근로자들의 문화정서 생활을 흥겹고 윤택하게 하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군중무용은 사람들 사이에 우애를 도모하는 데 좋다, 군중무용은 원을 지어 돌아가면서 하는 형식이 기본이 되어 있다. 군중무용은 춤을 추기 헐하고 흥겹게 만들어야 한다. 군중무용의 춤동작은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만들어야 한다”며 “군중음악은 대중가요도 쓰고 민요도 쓸 수 있다. 군중무용 음악은 선율이 경쾌하고 장단이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춤을 흥겹게 출 수 있다”고 구체적인 창작 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군중무용을 생활화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930년대 혁명 전통과 춤의 원형을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 수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 국가 재건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안정과 사회통합의 주요한 수단으로 항일혁명 군중무용이 보급 및 향유가 되었고, 이후 1990년대 말 김정일 위원장이 지시한 “군중문화의 생활화”로 대중적인 확산과 보급이 이루어졌다.
1999년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따르면 학교와 공장, 기업소 등을 중심으로 군중무용 보급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데, 특히 "태양절을 앞두고 온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 이채로운 춤바다가 펼쳐지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신문에서는 부모 세대들이 한국전쟁 직후 휴식시간에 즐겨 ‘춤바다’를 펼치던 그때의 군중무용이 아직도 청년들의 가슴에 낭만과 희열을 안겨주고 있다면서 대표적인 것으로 `옹헤야' `흘라리' `청춘의 자랑' 등을 꼽았다. 또 당시 “새롭게 창작된 군중무용 `어깨춤' `손뼉춤' `양산도 장단춤'도 율동이 단순하고 경쾌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어디서나 유쾌하게 출 수 있어 청년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군중무용은 지도자의 생일 행사나 정권 수립일 등 주요 행사 때 '무도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정도였다.
군중무용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김정은 시대가 들어선 2010년대 이후이다. 새 지도자의 ‘애민(愛民)주의’의 발현인 것이다. 문화성 군중문화지도국의 조직적인 지도로 군중무용은 대중적인 춤으로 북측 문학예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2014년 6월 22일 조선중앙TV를 통해 소개된 창작 군중무용 8작품이 대표적이다. 그 발단은 2013년 10월 '7·27 행진곡'을 주제로 새로운 군중무용을 창작하라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였다. 창작된 군중무용은 CD로도 제작이 되어 전국적으로 보급을 하였다.
![▲ 북 군중무용 [사진 : 조선의 오늘 갈무리]](/news/photo/202103/11536_24304_581.png)
영상에는 20대의 젊은 남녀 30여 명이 무용(반주)곡에 맞춰 쌍을 이뤄 춤을 추는 모습이 담겼다. 민속 장단에 디스코 리듬을 곁들인 춤곡에 맞춰 서로 손을 맞잡은 젊은 남녀가 환하게 웃으며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여성의 무릎을 살짝 덮을 정도의 한복 치마와 굽이 높은 '킬힐'의 조합이 이채롭다. 남성들은 모두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지만 여성들은 제각각 화려한 수를 넣은 다양한 색깔의 한복을 입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잦은 모리춤인 <황금산 타령>이나 <흘라리춤>은 민요를 반주로 했고, 전후 복구 시기부터 추어온 <옹헤야>와 <돈돌라리> 등은 기존의 민요곡을 반주로 하고 있다. “어깨춤과 손벽치기 동작으로 경쾌하고 락천적이며 기백이 차 넘치는 율동으로 민족적 색채가 진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당을 따라 별처럼 나도 살리>와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영도자>, <인민의 나라>는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찬양과 지도자에 대한 흠모 등을 담은 대중가요를 반주로 하고 있다.
군중무용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동작이 쉽고 반복적인 것이 특징이다. 춤 동작은 한 곡당 3∼4개에 불과하고, 남녀가 함께 마주 보고 같은 동작을 하도록 구성해 젊은 층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발구르기, 걷기 춤 등 흔히 볼 수 있는 집단무용 동작에 어깨춤 등 전통적인 요소도 가미됐다.
춤동작은 최승희 춤에 기인을 하면서도 발동작들은 서양춤의 동작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춤의 부드러운 약동적이면서도 팔을 많이 놀리는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팔동작은 메고펴기, 메고기지, 휘감기, 손벽치기 등이 대표적이고 발동작의 경우에는 보통걷기와 곱디며 걷기, 머물러 걷기 등의 단순한 동작들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발동작에서 서양춤의 유사성이 보이는 데, 보통걷기는 포크댄스의 ‘워킹’, 곱디며 걷기는 ‘투 스텝’과 비슷하며, 머물러 걷기 역시 한 발을 땐 다음 다른 발을 그 옆에 붙여 모으고 굴신하고 다시 한 발을 이동하는 형태가 서양식 민속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흥겹고 낭만적인 군중무용들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낭만을 안겨주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군중무용은 과거의 명작 중심의 무용창작 기풍과 달리 모든 인민이 일상 생활에서 즐길 수 있도록 창작·보급을 확대하고 있으며, 지금 조선무용의 대세임이 분명하다.
![▲ 아이들과 함께하는 김정은 총비서 [사진 : 조선의 오늘 갈무리]](/news/photo/202103/11536_24305_597.png)
80년 질풍노도의 시기에 운동권 가요는 투쟁의 현장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고, 바위섬 등 민중가요에 맞추어 함께 추었던 여러 군무들은 동지를 한데 묶는 역할을 하였다. 북측의 군중무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현장의 고단함과 투쟁의 치열함을 혁명적 낙관주의로 치환하는 북측의 군중무용에는 지도자의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민위천“의 의지가 올곧게 담겨있다는 점에서 새 시대의 조선춤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