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11)
본문 요지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이론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각 사회의 주요모순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결국 당 건설은 바로 이 같은 주요모순의 해결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본문은 먼저 러시아와 중국 두 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다룸으로써 다음번 한국사회를 위한 논의의 기초를 다진다.
제7장 당 건설은 ‘주요모순’을 해결하는 과정
1.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
2. ‘이론 구체화’와 한국의 주요모순
3. 비정규직투쟁의 전략적 의미(1)― 노동운동적 측면
4. 비정규직투쟁의 전략적 의미(2)― 당 건설 측
2. ‘이론 구체화’와 한국의 주요모순
사회주의자들이 대중 실천의 모든 측면에 개입할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업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가장 보편적이고 절박한 문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 사회의 ‘주요모순’과 관련된다. 따라서 주요모순에 대한 올바른 파악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자계급의 실천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이자, ‘이론 구체화’를 위한 첫 번째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주요모순은 노동자계급 내부 문제일 수도 있고, 다른 계급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하에서 다른 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당 건설이 주요모순의 해결과정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1) 외국의 사례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주요모순이 노동자계급 내부 문제인 경우에 해당하고, 중국은 다른 계급과 관련된 경우에 해당한다.
먼저 러시아의 사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러시아는 19세기 중후반부터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20세기 초에는 이미 독점자본주의단계로 진입하였다. 이처럼 독점단계로의 진입이 말해주듯 러시아는 수도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자연히 이들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발전하였다. 그것은 전체 사회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러시아에서는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직접 관련된 문제가 사회 주요모순이 되었다.1)
러시아의 노동운동은 독점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 발전에 조응하지 않는 낡은 짜르 전제정치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때문에 노동운동의 발전은 심하게 억압당했으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절실한 경제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이 같은 전제정치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한국 노동운동이 1987년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하다. 러시아 노동자계급 역시도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자유가 없는 조건 하에서 러시아의 주요한 투쟁형식은 자연히 불법적인 ‘공장파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같은 사회정치적 조건 하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경제투쟁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으며,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내거는 정치적 색체를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러시아 노동운동은 합법적인 노동조합보다도 ‘비합법 활동가조직’이 더욱 적합하였다. 이런 유의 조직만이 당시 노동운동이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습써클의 운용, 공장 내 유인물과 선전 책자의 반입, 파업기금과 후원회 조직, 구두 선동, 프락치 감시 등과 같은 활동들은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는 대부분이 노동조합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짜르 전제체제 하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러시아의 객관적인 엄혹한 현실은 노동조합과 활동가 조직을 엄격히 구분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점에 대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가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노동조합 조직과 정치조직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구별되듯 명백히 구별된다.……그러나 러시아에 있어서 일견 전제주의의 굴레가, 사회민주주의 조직과 노동자들의 조합간의 모든 차이점을 일소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자들의 조합과 모든 학습써클이 금지되어 있고, 노동자의 경제투쟁의 중요한 표현과 무기인 파업이 형사상의 범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조건은 한편으로는 경제투쟁에 전념하고 있는 노동자로 하여금 정치문제에 관여하도록 강력하게 ‘내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하여금 노동조합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혼동하도록 ‘내몰고’ 있다.”2)
레닌은 이 같은 러시아적 조건에 기초하여 노동자들은 경제투쟁과 자신들의 일상적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혁명가 조직’으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노동자들이 “혁명가 조직으로부터 출발”할 경우에만 운동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도 더욱 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강력한 혁명가 조직이라는 확고한 기반에서 출발한다면, 전체운동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사회민주주의 및 노동조합 양자 모두의 목적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중이 가장 ‘접근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되는 광범위한 조직(그러나 실제로 보안경찰이 가장 잘 접근할 수 있고, 혁명가가 경찰에 가장 발각되기 쉬운)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3)
이 점이 러시아에서 ‘비합법 활동가조직’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다. 러시아의 선진적 노동자들은 실제로 ‘혁명가 조직’에 집결하여 공장들을 하나씩 요새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비합법 활동가조직’이 늘어날수록 경제파업과 정치파업 또한 활성화되었으며 노동운동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농촌에서는 농민투쟁이 촉발되었으며, 도시에서는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의 시위운동이 활발해지는 등 전체 사회운동이 왕성해졌다.
그렇다면 이 같은 ‘비합법 활동가조직’의 발전과 러시아의 당 건설은 어떠한 관계를 갖는 것일까? 이들 조직의 발전은 곧 당 조직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비합법 활동가조직’이 사실상 당 조직의 일부이거나 혹은 대부분 당 조직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시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구조를 한 번 보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해외와 국내에 두 개의 중앙위원회를 두었으며, 그 중간에 지역위원회와 공장위원회를 두어 지역과 공장사업을 지도하였다. 이들 상층조직은 비교적 광범위한 기층조직에 의해 뒷받침 되었는데, 그것들은 당의 직접적인 세포이거나 각종 형식의 지지자써클로 구성되었다. 바로 이들 기층 세포조직과 각종 지지자써클이야말로 앞서 말한 ‘비합법 활동가조직’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비합법 활동가조직이 증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조직 발전을 의미하였다.

이상의 러시아의 사례는 당 건설이 당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권익,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그러한 투쟁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형식인 ‘비합법 활동가조직’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 같은 러시아 사례와 비교할 때, 중국의 경우는 사회의 주요모순이 노동자계급이 아닌 농민계급과 관련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회성격의 차이는 이 같은 양자의 차이를 발생시켰다. 중국은 자본주의 발전 정도에 있어 러시아와는 많이 달랐는데, 당시 중국사회는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성격을 가졌다. 그 때문에 중국은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자계급의 형성에 있어 러시아에 비해 많이 뒤처졌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결된 대공장도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광대한 농촌에는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이 존재하였다. 거기에다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열강들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하여 중국사회를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었다. 중국 각지는 이들 열강과 결탁한 군벌들이 할거하였으며, 중앙의 강력한 통일된 정부가 부재한 상태였다. 이 같은 조건하에서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은 농촌과 농민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 ‘토지문제’가 전체 사회문제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한 도시의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선 이 같은 거대한 농민의 잠재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가 중국변혁과 관련한 관건적인 문제가 되었다.
군벌들이 곳곳에서 할거 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는 반식민지반봉건 사회에서의 토지개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될 수가 없다. 지주계급은 스스로 조직한 자경대라는 사적인 무장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군벌 및 제국주의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로부터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는 것만이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의 주요한 투쟁형식은 ‘전쟁’, 즉 군벌과의 국내 전쟁(내전)과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군대’는 중국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조직형식이 되었다.
이렇듯 군대는 중국혁명과 당 건설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전쟁과 전략문제>(1938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에서 주요한 투쟁형식은 전쟁이고, 주요한 조직형식은 군대이다. 기타 일체, 예컨대 민중조직과 민중투쟁 등은 모두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며 무시할 수는 없지만, 모두 전쟁을 위해서이다.……중국에서는 무장투쟁을 떠나서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지위는 곧 사라지고 말며, 어떠한 혁명적 임무도 완성할 수 없다.”4)
“ ‘총구에서 정권이 나온다.’……총(군대-주)이 있으면 확실히 당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 팔로군은 화북에 큰 당 조직을 만들어 냈다. 또한 간부를 양성하고, 학교를 세우며, 문화를 창조하고, 민중운동을 조직해 낼 수 있다. 연안(延安, 당시 해방구의 수도-주)의 모든 것은 총구로부터 나온 것이다. 총구로부터 일체의 것들이 나온다.“5)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처음부터 이처럼 군대를 중시했던 것은 아니다. 한 차례 쓰라린 역사적 경험이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였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무장투쟁을 떠나서는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지위는 곧 사라지며, 어떠한 혁명적 임무도 완성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우리 당은 1921년 창립 때부터 1926년 북벌전쟁에 참여한 5-6년 기간은 인식이 부족하였다. 그때는 무장투쟁이 중국에서 갖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전쟁을 준비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것에 열심이지 않았고, 군사전략과 전략전술 연구를 중시하지 않았다. 북벌과정에서 군대를 쟁취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으며, 민중운동에만 치우친 결과 국민당이 일단 반동으로 돌아서자 그것들은 모두 무너져 버렸다.”6)
마오쩌둥이 여기서 지적하듯, 중국공산당은 1차 국공합작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장투쟁과 군대가 중국에서 갖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전쟁준비와 군대를 조직하는 일에 별반 열심이지 않았으며, 군사전략과 전략전술에 대한 연구도 소홀히 하였다. 이와는 달리, 장개석은 그 기간에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자신의 직계 장교들을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추진한 북벌과정 내내 군대를 쟁취하는 것보다는 농민회 등 민중운동 활성화에 힘을 썼다. 그리하여 장개석이 1927년 4월 12일 상해를 점령하고 반동으로 돌아서는 순간, 중국공산당은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 그때까지의 민중운동의 성과는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으며, 6만 명에 달하던 당원은 단 석 달 만에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었거나, 조직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변신하였다. 더 많은 당원들은 소리 없이 전선을 이탈했다.
이러한 ‘피의 교훈’은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자체 무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수차례의 도시폭동과 농촌 추수봉기를 통해 일차 무장력을 갖춘 중국공산당은 농촌에 들어갔다. 중국공산당은 비로소 중국변혁을 본궤도에 올려놓게 될 토지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무장력인 홍군은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었다. 자기 땅을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당시 광범위한 농민들의 소원이었다. 이제 그 소원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토지를 지키기 위해 홍군에 지원했다. 홍군은 날로 장성해졌으며, 중국공산당 역시 함께 성장하였다. 홍군은 중국공산당이 건설하고 그 확고한 지도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은 수많은 홍군전사들 중 가장 우수한 분자들을 선발해서 자신의 대오를 충원하였다.
중국공산당이 토지혁명과 당 건설을 결합하는 이상의 과정이 모두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난점은 농민출신 병사들을 어떻게 진정한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칫 당 전체가 농민의 ‘소생산자 의식’에 물들어 쁘띠부르주아정당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같은 난관을 정치교육을 통해 극복하였다. 홍군 병사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맑스주의’에 입각한 정치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그들을 사상적으로 재무장시켰다. 입당 절차를 엄격히 하였으며, 입당을 원하는 선진분자들은 그들이 진정한 노동자계급 의식을 갖게 된 것이 확인된 연후라야 정식 당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홍군의 전투력을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소련군대는 당 조직을 연대급 이상에만 두었지만, 중국공산당은 당 조직을 ‘중대’ 단위까지 하향시켰다. 이 같은 조치는 당이 군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막상 전투가 벌어질 때는 홍군이 더욱 용맹함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예컨대 전투의 고비 때마다 당원 병사들이 맨 앞장서서 전선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결사대를 자원해서 적의 진지와 함께 자폭하는 사람도 생겼으며, 수십 배에 달하는 적군의 포위망 속에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해내는 완강함도 보여주었다. 설령 전투에 패해 군대가 후퇴하더라도, 군벌 군대가 보통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공산당의 기층조직이 자리 잡은 홍군은 절대 해산하지 않았다. 신속히 재결집하여 매우 단 시간 내에 전투력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리하여 토지혁명이 진척될수록 홍군 대오는 확대되었으며, 홍군이 강대해질수록 당 조직이 발전하였다. 1921년 처음 당이 창당 될 무렵에 57명에 불과했던 당원 수는,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될 무렵에는 어느덧 448만 명의 거대 당으로 변모하였다.

중국의 당 건설은 이처럼 주요모순인 ‘토지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전쟁, 군대 그리고 당 건설이 유기적 삼위일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결: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체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반적 원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이론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그 사회 주요모순과 관련이 있으며, 당 건설은 결국 바로 이 같은 주요모순의 해결과정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러시아와 중국 두 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이점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과학적 사회주의 원리의 구체화에 대해 필자는 지금까지 주로 ‘주요모순’을 통해 서술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먼저 그 사회의 성격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기본모순’에 대한 파악 역시도 이론 구체화에 있어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실제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간의 논쟁에 앞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달 문제’를 둘러싼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와 레닌 간의 한차례 논전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사회의 ‘반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마오쩌동의 ‘노농무장할거’ 주장과 그 발전 형식인 ‘농촌으로부터의 도시포위 전략’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이는 주요모순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기본모순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필자는 다만 논의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기본모순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생략 하였다. (다음 한국사례에서 이를 다룰 예정이다.)
둘째, 본문에선 두 나라의 당 건설에 대해 러시아의 경우는 ‘비합법적인 활동가조직’, 중국의 경우는 ‘홍군’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두 나라의 당 건설이 단지 공장 내 활동가조직이나 ‘군대 내 당 조직’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들 조직이 그 사회 주요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조직형식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다. 실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공장 내의 당 조직 외에도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신문, 사회주의 의원단, 학생•지식인•농민계급 내의 당 조직 등 합법과 비합법을 총 망라한 당을 건설하였다. 예컨대,
“이 당은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해외국이라는 강력한 지도기구가 있고, 대형 일간지와 의원단이 있으며, 몇 개의 지방위원회와 여러 시위원회, 수많은 공장 지부(당 세포-주), 노동자계급의 합법적 조직 내의 당 소조들을 두었다…… 당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프라우다>뿐 아니라 <계몽>, <보험문제>, <여공> 등 공개적인 잡지를 발간하고, 볼셰비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많은 노동조합의 간행물을 지도했다.”8
중국의 경우도 적색정권이 수립된 드넓은 해방구와 농촌지역에서의 당 조직 외에, 베이징, 상하이, 천진 등 국민당 세력권(소위 ‘백색지구’) 하의 대도시에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지식인운동 등 각계각층의 사회운동 속에 구축한 상당히 큰 비밀 당 조직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국공내전의 막바지인 해방전쟁(1946~1949년) 시기에 중국공산당이 승리를 거두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든 중국이든 거대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조직’과 ‘홍군’이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조직의 골간이 분명하였기에 다른 영역으로의 당 조직 확대가 용이하였으며, 유연하고 폭 넓은 당을 구축할 수 있었다.
본문 주석
1) 물론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에 억매인 광범위한 농민들이 인구의 다수를 형성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힘만으론 봉건귀족과 신흥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권력인 짜르정권을 쓰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변혁운동의 결정적 시기, 즉 도시에서 노동자계급이 일차적인 봉기조직에 성공한 시점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도 농민들이 농민봉기를 통해 호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처럼 러시아에서의 주요모순은 먼저 도시의 노동자계급과 관련이 있었으며, 이후 농민의 토지문제와도 긴밀히 연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주의자의 임무>(1897년)에서, 먼저 도시의 대공장 노동자에 대한 사업에 역량을 집중한 후, 점차 주변 농촌의 농민들에 대한 사업으로 확장하자고 제안하였다.
2) 김탁 옮김, 1988년, <레닌저작집 1>, 전진출판사, p251.
3) 위의 책, p256.
4) 위의 책, pp543-544.
5) 위의 책, p547.
6) <모택동 선집>제2권, 인민출판사 1991년판, p544.
7) 출처:
https://zhidao.baidu.com/question/752699038424254844.html?fr=iks&word=%D0%C2%C3%F1%D6%F7%D6%F7%D2%E5%B8%EF%C3%FC%CA%B1%C6%DA+%B5%B3%D4%B1%CA%FD&ie=gbk본문 표의 각 시기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표시한다. 즉 1921.7은 중국공산당이 창립한 달이며, 1923.6은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과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달이다. 또 1927.4는 1차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상해를 점령한 달이며, 1927.8은 장개석이 1927.4.12 정변으로 쿠테타를 일으킨 후 석 달이 지난 시기에 해당된다, 1934.9은 중국공산당이 강서성해방구를 포기하고 장정을 시작하기 직전이며, 1937.1은 장정을 성공리에 완수한 후 섬서성 연안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시기이다. 1945.4은 국민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이며, 1949.10은 해방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천안문 광장에서 ‘신중국’ 성립을 선포한 시기이다.
8) [소련] 보‧니 보노말로프 주편집: <소련공산당 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