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9)

본문 요지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계급연합 사업이 실패로 끝난 원인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노동자계급 주도성)가 관철되지 못한 때문이다. 이 점이 러시아와 중국의 역사적인 성공사례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은 그 당이 지향하는 강령과 목표, 과학적 전략전술의 뒷받침 여부, 대중투쟁 발전에 직접적으로 복무하는지 여부 등을 통해 검증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독자정당’을 갖는 것은 노동자계급 주도성이 관철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1. 지금 왜 민주노동당에 대한 평가가 시급한가?
2. 민주노동당 성립의 시대적 요인 (1)―정파적 측면
3. 민주노동당 성립의 시대적 요인 (2)―대중운동적 측면
4. 패권주의의 기원과 ‘의회주의’ 
5. ‘진보연합정당’의 부활은 가능한가? (지난 호 게제)
6.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계급연합’의 성공조건
7. 당 건설은 어떤 과정인가? 
8. 노동자 독자언론 건설에 대해

6.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계급연합’의 성공조건

지난 호에서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나타난 패권주의 원인으로 ‘의회주의’와 함께 정파 간 ‘노선차이’를 들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본다면 서로 이질적인 정치세력 간 계급연합이 꼭 패권주의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상호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한 성공적 사례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와 중국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러시아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사회변혁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국가를 수립하였다. 중국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함께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 침략세력과 맞서 싸웠으며, 이후 민주연합세력들은 정치협상회의를 결성하여 신중국을 건국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은 실패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성공한 양자의 차이를 낳게 된 근본 요인은 무엇일까? 러시아나 중국과 달리, 한국의 민주노동당을 통한 계급연합 사업이 결국 실패로 끝난 원인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정치집단 간의 관계에서 본다면 정파연합조직이었으며, 여기에 민주노총•전농•한총련 등 대중조직이 결합하였다. 이처럼 서로 다른 정치집단과 계급•계층 조직이 함께 진보정당으로 결집했던 이유는 당시 확장된 합법공간을 활용하여 제도권 정치사업을 전개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 어떤 정치세력도 독자적 역량만으로는 당시 진보진영의 제도정치권 진출을 가로막던 ‘3% 득표’와 강력한 자유주의 보수야당이라는 두 가지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미성숙했음을 뜻한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이념이나 조직 면에서 스스로 아직 독자적인 정립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합 사업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는 길을 택했다. 이점이야말로 성숙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이미 존재한 가운데 계급연합 사업을 추진했던 러시아나 중국과는 다른 근본적 차이점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정파들이 한 조직 내에서 공존할 경우, 이들 간의 ‘동일 조직 내 경쟁’은 언제든지 패권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는다. 물론 그것은 ‘가능성’일 뿐, 그것이 현실화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이다. 그 조건이란 바로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이 관철되지 못하는 경우인데, 민주노동당이 바로 그러하였다. 이 경우 의회주의•합법주의•출세주의•좌익 망동주의 등 각종 기회주의가 득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렇다면 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즉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계급연합 사업의 성공을 위한 핵심 조건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만이 진정한 혁명적 계급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근절시키는데 있어 시종일관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 양립할 수 없는 태생적인 적대적 모순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철폐되고 사적소유가 소멸되는 조건에서만 자신이 해방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농민과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은 ‘조건적’으로만 혁명적일 수 있다. 즉 그들은 한편에선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가계급에 의한 수탈의 대상이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인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 자신들의 소자산가적 속성 때문에 자본가들의 회유와 기만책에 쉽게 넘어가 끊임없이 동요하며, 때로는 노동자계급의 반대편에 서기도 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할 때라야 계급연합 사업은 중도에서 동요하지 않고 일관되게 자본주의 종식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즉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선언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란 도대체 무엇이며, 현실에선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일부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선 그것을 단순히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자 조직이 당을 주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과거 민주노동당이 내부 갈등으로 분열하고 패권주의와 출세주의가 판을 쳤던 것은 많은 부분 ‘정파’ 탓이라고 원망을 한다. 심지어는 학생 출신과 노동자 출신을 대립시켜 앞으로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와 관련한 한 노조 간부의 주장을 들어보자.

“(중략) 학생운동가가 다는 아니지만 70~80%가 계몽주의자들이다……정파 만들어서 자기들은 성공했지 않나. 그게 우리나라에서 검증된 방식 아닌가. 민주노총 선거, 금속노조 선거, 각 기업이나 단일 노조 선거에서 정파 패거리 형성해서 지부장 당선시키고 금속노조 위원장과 민주노총 권력을 잡고, 그 권력으로 자기 정파에 힘을 실어주고 그 정파에 소속된 사람이 시의원, 구의원, 국회의원 등 정치적 진출을 하는 데 교두보이자 창구 역할을 해준다. 이처럼 자신들의 권력 확대와 재생산을 해주는 구조가 검증된 정파 구조였다. (중략) 빨리 극복을 해야 된다. 우리 노동자들 스스로 자주성, 주체성, 실력,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빨리 키워내는 게 최고 상책이다. 그러려면 정파 중심의 당 운동·노동운동이 아니고, 정파의 힘을 빼고 공조직 중심의 노동운동•당 운동이 되어야 한다. (중략) 우리 노조 간부들은 자주성을 상실했다. ‘중성’이다. 더 심한 말로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고 정파의 ‘꼬봉’과 ‘똘마니’에 불과했다.”1) 

이 노조활동가는 선거 조직으로 변질된 정파를 마치 ‘정파’의 본질인 양 오해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공조직’은 노동조합을 말하는 것이며, ‘자주성’은 정파에 대한 자주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운동의 발전과 ‘정파’의 존재를 대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결국 “공조직 중심의 노동운동•당 운동”이란 노조간부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노동운동과 정치활동을 말하는 것이 된다. 

과연 그것이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참뜻일까? ‘정파’ 즉 노선에 입각한 활동을 하는 세력 없이 현장 활동과 노동조합 발전이 가능하며, 자주성•주체성•실력과 능력을 배양할 수 있을까? 정파는 좋든 싫든 간에 노선과 이론을 공급하는 집단이다. 각계의 전문가와 학자, 보수정치집단들로부터 고급 이론과 지식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자본가계급에 비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부족한 점이 마침 이 부분이다. 따라서 앞으로 당 사업에서 가급적 정파를 배제하자고 하는 발상은 자본가계급과 정권이 과거 노동자계급을 고립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3자 개입금지’를 스스로 도입하는 것과 같다.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이처럼 당원의 다수를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당 내에서 그들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같은 출신성분 내지 ‘양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2)  비록 당내에서 노동자들이 소수일지라도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사회의 성격이나 계급 구성 때문에 그 같은 상황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농민계급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던 중국이 그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즉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출신성분’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계급연합정당 내에서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실현은, 우선 그 당이 지향하는 강령이나 목표와 관련이 있다. 노동자계급의 궁극적 목표인 완전한 계급철폐, 그를 위해 자본주의를 넘어선 근본 변혁과의 관계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분명히 설정하고 있는지 여부가 일차적인 관건이 된다. 

이 측면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은 당 강령의 전문과 본문에서 일견 기본적으로 이에 부합하는 지향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하고, “재벌을 해체”하여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고 명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문구로만 남아 있었으며 실제 당의 선전선동에는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3) 물론 여기에는 민주노동당이 출범할 당시 한국 민주주의의 불철저성으로 말미암아 ‘합법성’의 제약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보다 주요한 원인은 민주노동당 내부에 있었다고 보여 진다. 당시 소련과 동구권 붕괴에 따른 주체들의 사상적 혼란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 강령의 실제 활동에의 적용 문제는 이후에도 극복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더욱 후퇴한 채 결국 사문화되고 말았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궁극적 목표를 반영하는 당 강령이 민주노동당에 있어선 매우 형식적이었으며 장식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의 관철은 당의 강령적 목표가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전략전술을 통해 뒷받침 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함께 저술한 <공산당선언>은 우선 노동자계급이 추구하는 운동 목표에 대해 “일반적 소유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자본가계급의 소유제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어서 그를 위해서 “노동자혁명의 제일보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통치계급으로 상승시키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정치권력의 탈취’를 목표 달성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전략전술은 후대에 오면서 좀 더 구체화된다. 러시아의 경우 레닌이 수립한 ‘2단계 연속혁명’ 전략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에 따르면 우선 제1단계는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농민과의 동맹을 통해 인민봉기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짜르 전제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한다. 이렇게 성립한 부르주아민주공화국은 계속해서 노동자계급과 빈농 동맹에 기초한 소비에트권력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중도에서 멈추지 않은 채 곧 바로 사회주의 2단계 혁명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계급연합이 성공한 또 다른 역사적 사례인 중국의 경우, 반식민지•반봉건 사회라는 중국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앞서 러시아와는 전략상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선진적인 도시 노동자들이 농촌에 들어가 광범위한 농민의 토지혁명을 지원함으로써, 장기간의 무장투쟁을 통해 ‘농촌에 의한 도시 포위전략’을 수행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였다. 그 같은 방식으로 당면한 반제반봉건혁명의 과제를 완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점차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간다는 전략이었다.

이상의 다른 나라의 성공적인 계급연합의 역사적 사례와 비교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전략전술은 ‘의회주의’, ‘개량주의’ 노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주도성이 요구하는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스스로 천명한 ‘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이라는 목표에는 결코 이르게 할 수 없었으며, 사실상 자본가계급의 품속에 투항하는 전략전술이었다. 

셋째,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이론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현실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급연합 전략이 당면한 대중투쟁 발전에 직접적으로 복무하고 있는지 여부를 통해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관철 여부를 검증할 수 있다.

예컨대, 계급연합 전략이 성공한 러시아의 경우, 그 구체화된 형식인 ‘노-농 소비에트’는 도시의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선 총파업을 지도하는 지도기관으로서, 또 지방 각지의 농민들에겐 귀족들로부터 토지와 식량을 약탈하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토지혁명을 엄호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또한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대중적 봉기조직’이기도 하였으며, 차르전제제도와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실질적인 무장력을 제공하였다. 또 혁명 성공 이후에는 이어지는 외부의 간섭과 국내 반혁명세력의 기도를 분쇄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수호하는 권력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또 다른 역사적 사례로서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조직인 중국공산당은 적대적인 국민당과의 두 차례 통일전선을 대중운동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써 활용하였다. 제1차 통일전선 시기(1924~192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함께 ‘북벌’을 수행하였는데, 그를 통해 당시 전국 각지에 할거하던 군벌들을 크게 약화시키고 전국 통일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북벌 과정에서 각지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크게 활성화되었으며, 중국공산당도 이로부터 당원을 확충하고 조직을 넓힘으로써 국민당에 이은 제2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맞선 제2차 통일전선 시기(1937~1945년)에는, 거국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일제의 패배를 앞당기고 연합국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광대한 지역이 중국공산당 통치하의 해방구로 변했으며, 인민의 무장화가 진척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인민해방군 무력은 3만명에서 100만명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후 그것은 최후의 ‘해방전쟁’을 통해 국민당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해방전쟁’ 시기(1946~1949년)에는 곽말약 등 진보적 지식인, 자발적으로 투항한 양심적인 국민당 장성, 송경령 등 애국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은 ‘정치협상회의’를 결성함으로써 신중국 성립을 위한 산파역할을 하였다. 이 정치협상회의는 새로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 정통성과 합법성을 부여하였으며, 이러한 통일전선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정치협상회의’는 현재 중국의 정식 국가기구로 제도화되었다.

현실투쟁 발전에 크게 복무했던 이상의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성공적 관철 사례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계급연합 사업은 그 기여도가 애초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전반적으로 ‘의회주의’에 경도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조직을 주로 ‘선거용’으로 활용하였다. 전국적으로 ‘현장분회’가 일정 정도 존재하긴 하였지만. 그조차도 공장의 조직사업이나 투쟁 사업에 있어 별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선거 때만 잠깐 동원되는 선거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시간이 갈수록 국회의원과 공직 진출을 노리는 출세주의자들의 등용 무대가 됨으로써, 매번 선거를 치를 때마다 갖가지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파와 활동가 그리고 대중들 사이에는 앙금과 불신이 조장되었으며, 투쟁 발전에 기여하기 보다는 질곡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노동운동과 의회사업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소위 ‘양날개론’은 특히 이러한 해악을 구조화하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노동자계급 주도성)은 무릇 진보연합정당을 비롯한 계급연합사업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임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극대화 시킬 수 있게끔 해준다. 자본주의 발전이 아직 미성숙한 반봉건식민지 사회에서는 수적으로 절대다수인 농민의 거대한 잠재적 에너지가 노동해방을 향한 방향으로 분출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는 농민 자신들도 해방 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이 같은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관철을 방해하는 요인은 노동자계급의 내부와 외부로부터 모두 올 수 있지만, 그중 더욱 경계할 것은 내부로부터 제기되는 사민주의와 의회주의 경향이다. 
‘헤게모니’는 ‘주도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관철을 위한 노력은 또 다른 패권주의를 낳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주도권을 둘러싼 계급연합 내부의 경쟁은 자칫 자리다툼을 위한 ‘패권경쟁’으로 내달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 주도성의 본래적 의미가 의회주의노선과 대립되는 ‘변혁주의노선’을 의미하는 한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 진보연합정당을 결성할 경우 그 일차적 목적은 ‘국회연단’을 노동자계급과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며, 의회활동을 통해 부르주아국가권력의 허구성을 내부에서 폭로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수적으로 제한된 국회의원과 공직자 자리를 놓고 다툴 필요가 없으며, 여기에는 출세주의자가 차지할 공간이 없다. 그리고 진정한 노동자계급 주도성은 ‘의회주의’와 선을 그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회사업과 제정파간 연합전술의 의의를 부정하는 맹목적 좌파와도 분명히 구별된다.

지금까지 노동자계급 주도성이 왜 필요하며,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끝으로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로 하자. 

노동자계급이 분명하게 스스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조직되는 것, 즉 자신의 ‘독자정당’을 갖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 주도성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나 중국은 강력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존재하였기에 계급연합이 성공하였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 계급연합 내에서 노동자계급 주도성을 실현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 노동자계급의 역량 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통해 부족하나마 일정하게 획득한 정치적•조직적 성과를 기초로 독자정당 건설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문 주석

1) “하부영과 대자보 인터뷰 기사”, 대자보, 2009년4월13일.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27423&section=sc1

2) 대표적인 사례로는 영국 노동당을 들 수 있다. 영국 노동당은 1900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개최된 ‘노동자대표회의’가 그 전신이다. 이 회의에서 65개 노동조합대표, 협동조합대표,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주의연맹 등으로 구성된 상설적인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여기에 1884년에 결성된 페브리언협회가 결합하였다. 이처럼 노동조합이 주축이 된 영국 노동당은 당연히 당원 수에 있어 노동자들이 압도적이었으며, 당 간부들도 노동자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의회주의노선을 걸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멀어지고 ‘중산계층’을 대변하는 당이 되었다. 그래도 1990년대 이전까지는 노동당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었지만, 1994년 토니 블레어가 당수로 선출된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노동당은 '신 노동당(New Labour)'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사회주의 노선을 공식 포기하였으며, 당 강령에서도 사회주의를 삭제하였다. 이후 당의 우경화는 더욱 진척되어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당이 되었으며, 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3)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강령 전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과 해방의 새 세상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라면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한다고 반자본주의 및 사회주의적 지향성을 분명히 하였다. 또 경제운영에 있어서는 “사회적 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시장을 활용하는 경제체제”를 명시함으로써, 오늘날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연상케 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강령 본문에 들어가서는 이 같은 ‘전문’ 취지를 살려 그것을 구체화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예컨대 ‘경제’ 부문에서 그 첫 번째 과제로는 “재벌을 해체하고 민주적 참여기업을 확산”할 것을 명시하였는데, 재벌해체의 구체적 방안으로 “총수 일족의 지분을 공적 기금을 활용해 강제로 유상 환수하여 재벌을 해체”하며, “재벌 지배 대기업 가운데 공공성이 높은 부문인 통신, 운수, 병원, 학교 등은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으로 전환”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 같은 강령을 제대로 해석하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민주노동당 내 양대 계파인 평등계와 자주파는 모두 소극적이었다. 예컨대, 2004년의 17대 총선을 앞둔 2003년 11월 1일 개최된 임시당대회는 당발전특위에서 제출한 핵심사안 중 정치노선 제1항으로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한다’ 와 관련된 안건이 쟁점이 되었다. 결국 격론 끝에 통과된 <당헌 개정안> 및 <제도개혁방향>을 보면 애초 민주노동당의 강령 취지가 많이 후퇴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우선 평등파계열은 소유개혁 대신 ‘공공성 강화’로 초점을 맞추었으며, 사회주의를 “계획이 아닌 과정”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또 공공성의 주요 예시로는 오건호의 <공공성 투쟁의 내용과 의의>를 싣고 사회임금투쟁을 거론하였다. 다른 한편, 자주파계열은 당을 ‘진보적 대중정당화’ 해야 할 시기에 그리고 총선을 목전에 두고 있는 때에 오히려 사회주의 기치를 내건다는 것은 모험주의라고 간주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론’에 근거한 ‘진보적 대중정당론’을 제기하였다. 이처럼 당시 민주노동당을 주도한 양대 파벌의 태도를 볼 때, 당 강령 중 사회주의적 내용은 실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한 채 사문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 ‘당발전특위’ 관련한 내용은, 최기영,2009년, <미래를 위한 투쟁>, pp278-281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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