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혁명학원출신 쌍무기 비전향장기수
![▲ 고 박종린 선생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자료집 중에서]](/news/photo/202101/11366_23773_442.png)
1959년 남파되어 ‘모란봉간첩단’ 사건과 1976년 대구교도소 내 ‘붉은 별’ 사건으로 두 번의 무기징역을 받은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이 돌아가셨다.
추모식은 1월27일 코로나19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동지와 선생을 따르는 후학들이 참가한 가운데 인천사랑병원 장례식장에서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거행되었다.
선생은 녹내장과 대장암으로 고생하였지만 그보다도 전향공작 때 당한 고문과 쌍 무기수로 34년이란 오랜 투옥 생활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또한 2000년 9월 2일,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에 선생을 석방시키기 위해 목사가 쓴 ‘신병인수서’가 ‘전향서’로 둔갑하여 송환되지 못한 것이 철천지한으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 로인숙이 평양으로 돌아온 비전향장기수 환영행사에서 선생을 찾다가 그만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마음의 상처를 너무나 크게 입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병마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은 남파될 당시 생후 100일이 채 되지 않았던 딸 옥희(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에 대한 만남이 미국의 내정 간섭과 남북관계 경색으로 생전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분단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박종린 선생 추모영상 (2021년 범민련 남측본부)
선생은 사람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선생과 비슷한 인품을 가진 장기수 김수룡 선생(2012년 작고)은 늘쌍 우리는 ‘사람사업’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박종린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월간 『민족21』에 선생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회사가 회식을 하기 위해 식당에 가면 선생은 종업원에게 부담주지 않고 손수 물과 컵 등을 직원들에게 챙겨주셨다.
직원들이 당황하면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라 손님과 종업원이란 격차가 존재하지만 종업원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은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평등을 강조하셨다.
역시 북에서 생활하면서 사람 중시, 평등사상이 몸에 배여기 때문이리라.
선생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분할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민족21』에서 일할 때 월간지 특성상 마감 무렵에는 기자들이 며칠씩 밤샘을 한다.
그러다보니 사무실과 화장실이 배달시킨 음식찌꺼기와 각종 쓰레기로 매우 지저분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정신 노동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안타까워하면서 우리가 솔선수범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청소하자고 나에게 제안하였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사무실을 엉망으로 만들면 정신노동(기자)과 육체노동(관리직)과의 격차가 생기니 기자들을 개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말없이 선생님과 몇 주를 하였지만 결국 바라는 성과는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 선생은 『민족21』이 하나의 모범적인 공동체로 가길 원하였던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중국의 1937년 연안정신이라 불리는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위계와 분할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신 것 같았다.
![▲ 고 박종린 선생 [사진 : 통일애국열사 박종린 선생 민족통일장 자료집 중에서]](/news/photo/202101/11366_23775_4756.jpg)
선생은 또한 항일독립투쟁을 한 부친의 뜻을 잇기 위해 본인의 특혜를 내려놓으신 분이었다.
선생의 부친 박승진은 조국광복회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였다.
그러나 부친은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해방 될 때까지 무려 7년간 연길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오랜 감옥생활으로 해방 후 3개월 만에 ”당신의 경력으로 해방 조국에 부담을 주지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한다.
하지만 북은 만주지역 일대 항일혁명가 유자녀들을 찾아 그들을 보살펴 향후 새로운 조국의 동량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선생도 아버지 항일운동 덕택으로 만경대 혁명학원에 입학하지만 1950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친구들과 학교를 나와 특혜를 내려놓고 조국전쟁에 참전한다.
그리고 이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조국통일 사업을 위해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34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존경하는 박종린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조국과 민족자주 그리고 통일에 대한 붉은 혼은 여기 모인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못 다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 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 고 박종린 선생 당시 방북사진 [사진 : 통일뉴스]](/news/photo/202101/11366_23776_4943.jpg)
2007년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박종린 선생(맨 오른쪽). 당시 100일도 안 돼 헤어졌던 딸과 딸 가족이 왔다고 한다.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박종린 선생님 걸어오신 길
1933년 3월 14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 반석촌에서 부친 박승진(1945년 작고), 모친 채성녀(1988년 작고) 사이 5형제 중 넷째로 출생
1945년 3월 중국 훈춘 남신소학교 졸업
1945년 해방을 맞아 함경북도 경원군(현 새별군) 안농면으로 귀국
1945년 11월 조국광복회 항일유격대원 아버지 박승진님 별세
1947년 7월 함북 경원군 안농중학교 졸업
1950년 9월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 졸업
1950 – 51년 인민군 자원입대, 오백룡사단 배속 전쟁참가, 낙동강전투 부상
1951년 12월 16일 화선입당(19세)
1958년 3월 로인숙님(24세)과 결혼, 59년 득녀(옥희)
1959년 6월 20일 연락책으로 남파(911 통신부대 소좌) 당시 딸 옥희 생후 100일
1959년 12월 29일 체포. 서울형무소 수감(국가보안법)
1960년 10월 28일 ‘모란봉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61년 2월 18일 대법원 무기징역 판결. 대구교도소로 이감
1976년 이른바 “ 붉은별” 조직활동 사건으로 무기징역 추가. 2중 무기수로 복역함. 광주, 전주, 대전, 대구교도소 생활
1993년 12월 24일 병보석으로 출옥후 신병치료함
1994년 7월 – 2000년 9월 전남 무안군 용학교회 등에 거주. 무안 해제중학교 매점 근무
2000년 9월 – 2001년 3월 상경. 경기도 과천시 소재 소환된 비전향장기수들(홍문거, 김은환) 운영하던 고서적방 인수운영함.
2000년 9월 평양 비전향장기수 환영행사(부인 로인숙여사 –쓰러져 별세하심). 딸 옥희(김일성종합대학 교수)
2000년 10월 통일광장 성원
2001년 범민련 경기인천연합 고문
2001년 3월 – 2004년 5월 월간 “민족21” 창간 참여 근무함
2004년 5월 – 2007년 5월 홍익대 부속 중고등부 학생매점에서 근무
2005년 범민련 남측본부 금강산 행사 참가
2007년 5월 이후 신병 등으로 무직
2007년 6월 범민련 성원으로 6.15 7주년 기념 남북공동행사(평양)에 참가
2008년 북경올림픽 남북공동응원단 참가
2015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17년 8월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대장암 판정, 투병생활
2021년 1월 대장암 증세 악화로 인천 사랑병원 입원치료
2021년 1월 26일 오전1시49분 숙환으로 별세. 향년 89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