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6일 정경모 선생이 돌아가신 후 사월혁명회는 선생의 뜻을 기려야 한다고 여러 곳에 의사 타진을 하였는데 답변이 오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런데 다행히 늦게나마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고 정경모 선생 유해봉안위원회”가 만들어져 추모를 하게 되었다.

4월1일에는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선생 추도식>이 개최되었고 4월2일에는 마석모란공원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선생 유해봉안식>이 진행되었다

▲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4월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사진 : 조헌정 목사 페이스북]
▲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4월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사진 : 조헌정 목사 페이스북]

분단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조국의 반미반일 자주민주통일제단에서 영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의 역저 『찢겨진 산하』가 아닌 ‘통일된 산하’를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 그리고 유원호 선생이 만들어 준 불멸의 통일 역사를 통해서 우리 후대는 기필코 민족통일을 이뤄낼 것입니다.

선생님!

오늘 뜻 깊은 ‘6·15공동선언’의 배경이 된 ‘4·2공동성명’ 32주년에 유해나마 이렇게 봉안식을 하게 되니 너무 기쁩니다.

▲ 시대의 불침번 일본어판과 한글판[사진 : 세계한민족백과사전과 민족통신]
▲ 시대의 불침번 일본어판과 한글판[사진 : 세계한민족백과사전과 민족통신]

선생은 미국 유학시절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GHQ)에 소환돼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등과 함께 근무하며 정전회담 당시 통역을 맡으며 조국이 갈라지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때 선생은 “그때 절감한 비애와 미국에 대한 울분이 ‘한반도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시대의 불침번’으로 살게 했다”고 토로하였습니다.

1970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시대의 불침번’으로 5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 문필 활동을 통해 군부파쇼·유신반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이국땅에서 지원합니다.

1981년에는 한국문제 전문지 <씨알의 힘>을 일본에서 발행하여 동포사회와 일본지식인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원래 ‘씨알’이란 일제 강점기 일본이 강제로 쓰게 한 국민(황국신민)이 해방공간에서 인민(people)으로 널리 쓰였지만 북이 쓴다는 이유로 다시 국민을 쓰게 되자 함석헌 선생의 스승 유영모 선생이 인민 대신 우리말 ‘씨알’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평소 함석헌 선생의 문필활동을 눈여겨 본 선생은 <씨알의 소리> 보다 통 크게  <씨알의 힘>을 발행합니다.

<씨알의 힘>은 1991년 일본의 평화와 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 ‘씨알의 힘’ 모임을 발족하여 기관지 ‘씨알’을 펴냅니다.

▲ 2012년 2월 12일 일본 도쿄 니시카타마치교회에서 열린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내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일본어판 출간 기념회에서 박 목사가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국어판 저자인 성유보 한겨레 전 편집위원장,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 재일 민주화운동가 정경모씨, 박 목사, 일어판 번역자 야마다 마사오, 정진우 서울제일교회 목사(2012.5.13) [사진 : 인터넷 블로그 한누리 갈무리]
▲ 2012년 2월 12일 일본 도쿄 니시카타마치교회에서 열린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내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일본어판 출간 기념회에서 박 목사가 도와준 사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국어판 저자인 성유보 한겨레 전 편집위원장,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부사장, 재일 민주화운동가 정경모씨, 박 목사, 일어판 번역자 야마다 마사오, 정진우 서울제일교회 목사(2012.5.13) [사진 : 인터넷 블로그 한누리 갈무리]

선생님!

선생은 분단의 원흉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합니다.

전후 대소련 봉쇄 정책을 처음 제안해 ‘냉전의 설계자’로 불린 미국 외교관 조지 케년은 국무부 외교정책실장으로 발탁 된 후 “케넌 설계도”를 작성합니다.
선생의 지인인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1985년 가을,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재판인 미국의 “케넌 설계도”를 국무부 정책기획본부 제13호 파일 상자에서 찾아내어 선생께 보냅니다.

미국의 군사력으로 조선과 만주를 점령한 뒤 그 지배권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케넌 설계도”를 이후 선생은 근 20년 동안 글로 말로 폭로하고 주의를 환기하려고 안간힘을 다 쏟습니다.

▲ 1989년 방북 당시 기념촬영. 왼쪽부터 정경모 선생, 문익환 목사, 김일성 주석, 황석영 작가,  유원호 선생(1989.3.27)[사진 : 조국평홭총일협회 갈무리]
▲ 1989년 방북 당시 기념촬영. 왼쪽부터 정경모 선생, 문익환 목사, 김일성 주석, 황석영 작가, 유원호 선생(1989.3.27)[사진 : 조국평홭총일협회 갈무리]

그리고 미·일동맹을 저지키 위해 선생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 6·15남북공동선언의 초석이 된 문익환·허담 ‘4·2공동선언’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위해 북쪽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 죄(?)가 되어 정치 망명객로 끝내 그리운 고향 남쪽 서울 땅을 밟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국가 공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한 지식인으로 국가보안법에 맞서 ‘자수서 타협’을 거부하며 “내가 못 가는 게 아니잖소, 안 가는 것이오!”라며 지조를 지킵니다.

▲ 모란공원 안치되는 정경모 선생[사진 : 추모연대]
▲ 모란공원 안치되는 정경모 선생[사진 : 추모연대]

존경하는 정경모 선생님!

살아 있는 우리들은 분단의 원흉 미국과 일본에 맞서 
우리 어깨위에 지워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과업을 
우리는 결코 벗지 않고
통일 된 그 날까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조국과 씨알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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