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치연구(12) - 김정은 위원장의 정치 행보로 본 2020의 북한 ③
흔히들 남북관계를 롤로코스터에 비유한다. 그만큼 부침이 심하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보다는 런닝머신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런닝머신은 전원 스위치를 끄지 않으면 자동으로 후진하는 기계이다. 후진하는 기계 위에서는 정확하게 그 속도에 맞게 달려야 제자리걸음이라도 한다. 런닝머신보다 더 늦게 뛴다면 비록 그는 달리고 있는 거지만 사실 후퇴한다. 그리고 뜀을 멈추면, 그리고 런닝머신의 후진 속도가 빠르다면 넘어지고 만다.
2018년 11월 한미 워킹그룹회의가 결성된 이후 분단체제라는 런닝머신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 반면, 남북관계의 발전 속도는 정체되었다. 남북관계는 제자리걸음은커녕 점점 후퇴하는 형국이었다. 2020년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된 사건은 북한의 갑작스럽고 모험적인 행동이 아니라 2018년 한미 워킹그룹회의 결성 이후 예정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정은 위원장, 3월 친서로 민족대단결 의지를 피력하다
2020년 3월 3일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북한군의 훈련을 비난하는 성명을 청와대가 “강한 우려”와 “중단 촉구” 입장을 발표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도 전쟁 연습 놀이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남의 집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데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의 극치”라고 청와대의 성명을 반박했고, “이러한 비논리적인 주장과 언동은 개별적인 누구를 떠나 남측 전체에 대한 우리의 불신과 증오, 경멸만을 더 증폭시킬 뿐”이라며 남측 당국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여정의 담화가 나온 직후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김위원장의 친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남녘 동포들의 소중한 건강”을 기원하고, 위로의 뜻을 보낸다는 내용이 담겨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 대해 진솔한 소회와 입장”도 담겨있었다고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은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각각 굿캅(good cop), 배드캅(bad cop)을 맡아 역할 분담을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는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의 지위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조선노동당에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지위와 역할을 갖고 있다. 3월 3일의 담화는, 배드캅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노동당과 북한의 대남 인식을 정확하게 드러낸 것이다. 남측 당국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만과 불신을 토로한 것이다.
이에 반해 김정은 위원장은 당과 국가 그리고 군대의 최고영도자이고 책임자이다. 당과 국가와 군대의 최고영도자의 발언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집행돼야 하는 무게와 책임이 따른다. 여기서 무게와 책임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김 위원장의 발언 하나로 남북 관계는 파국으로, 나아가 군사적 충돌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반면 김 위원장의 발언 하나로 남북 관계는 급진전할 수도 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또한 조선노동당과 북한에게 있어서 김정은 위원장은 민족대단결의 구심이다. 민족대단결의 구심은 그 어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민족대단결을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갖는다. 2018년의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은 민족대단결을 현실화하기 위한 거족적 행보였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민족대단결 실현을 위한 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남측 파트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여정 제1부부장은 대남 정책의 책임자로서 북쪽의 대남 인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 담화를 발표한 것이고,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민족대단결 행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정책적 판단을 친서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김여정 제1부부장도, 김정은 위원장도 자신의 지위와 책임에 따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도,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도 모두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 조선중앙통신은 2020년 6월 16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모습을 17일 보도했다. [사진 : 뉴시스]](/news/photo/202101/11256_23497_97.jpg)
판문점 연락사무소 폭파, 남북 관계 총파산의 서막이 열리다
모두가 알다시피 6월 16일 판문점 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다음 날 노동신문은 1면에서 3면까지 연락사무소 폭파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1면 헤드라인에서 연락사무소 폭파를 “북남관계 총파산의 불길한 전주곡”이라고 적시했다.
이같은 북한의 행동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6월 4일 김여정 부부장은 자신의 2차 담화에서 “선의와 적의는 융합될 수 없으며 화합과 대결은 량립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북전단 살포를 방치한 남측 당국에 대한 마지막 경고 신호였다. 선의는 화합이고, 적의는 대결이다. 대북전단 살포를 방치하는 행위는 적의(적대적 의사)라는 것이며 이는 대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측 당국은 이 같은 신호를 무시했다.
6월 5일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는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고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쪽 당국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6월 8일 대남사업 부서 사업총화회의를 갖고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했다. 여기서 심의란 ‘심사하고 의결했다’는 뜻이다. 즉 대적사업 계획들을 결정한 것이다. 6월 9일 모든 남북 연락채널을 차단한 것은 그 1단계 조치였다.
6월 13일 김여정 제1부부장은 3차 담화를 발표하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예견했다. 2단계 조치를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대적 행동의 행사권을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겠다고 예고했다. 3단계 조치를 예고한 것이다.
6월 16일 2단계 조치가 시행되었고, 6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군사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발표한 대로 3단계 조치가 실행된다면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하게 된다. 6월 17일 노동신문이 헤드라인에서 밝힌 “북남관계 총파산”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 2020년 6월 19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확대회의 진행 장면 [사진 : 조선중앙통신 캡처]](/news/photo/202101/11256_23498_934.png)
김정은 위원장,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를 열어 총파산을 보류시키다
조선인민군이 총참모부 대변인 담화까지 발표하고 군사행동을 예고한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파국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남북관계는 판문점 선언 이전의 대결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명해 보였다.
만약 당과 군대의 최고영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이 나서지 않으면 이 같은 파국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은 민족대단결의 구심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갖고 있다. 남북관계의 총파산은 2018년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무위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민족대단결의 구심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갖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6월 17일 예정에 없던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회의 예비회의가 개최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5차회의는 7월 중순에 예정되어 있었다. 5월 24일 제7기 4차회의를 개최했기 때문에 정식회의를 한달 만에 개최하는 것도 일정상 무리했다. ‘예비회의’를 긴급소집한 이유는 임박한 남북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비상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예비회의’에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인 김정은 위원장은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회의에 제기한 대남 군사행동 계획들을 보류”시키는 결정을 채택했다. 군사행동 계획의 보류는 남북관계 총파산의 보류를 의미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 관계의 파국을 막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