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4)
본문요지
1차 혁명이 실패한 후 볼셰비키는 스톨리핀 반동정치의 탄압에 맞서 완강한 투쟁을 조직하는 한편, 노동운동 내에서는 ‘청산파’와 ‘소환파’라는 두 기회주의 세력과 맞서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 있어 정치신문은 없어서는 안 될 무기였다.
![▲ 러시아 혁명의 한 장면. [사진 : 위키백과]](/news/photo/202010/10929_22627_295.png)
2. 반동 암흑시기(1907년 6월~1910년 초)의 정치신문
1) 반동 암흑시기의 시작
1907년 6월 3일 차르 정부는 국가두마를 해산시켰다. 이는 제1차 러시아혁명의 종식과 반동 암흑시기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전국이 백색테러의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차르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토벌대와 전시법정은 곳곳에서 폭행을 자행하였으며, 혁명운동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야만적으로 박해하였다. 수천 명이 사형당하고 수 만 명은 강제노역을 선고받았다. 차르 정부는 특히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당원들을 대량 체포하였다.
이런 반동적 상황하에서 노동자들의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경찰에 의해 파괴를 받지 않는 당 지방조직이 없을 정도였다.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당 대열에서 이탈하면서 당 조직의 인원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사회생활의 각 방면, 과학•철학•예술 분야 등에서 차르 정부는 미친 듯이 쇼비니즘(배외주의, 排外主義)을 선동했다. 성직자들이 기고만장하게 활개를 쳤으며, 지식인들 사이에선 반혁명 정서와 변절적인 사상이 유행하였다. 신의(神义)와 종교에 연연하는 풍조도 만연하였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을 발발시켰던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민들은 여전히 무권리 상태였으며, 노동자들은 공장주와 헌병의 이중적 압박 아래 신음하였고, 농민은 지주의 노예인 채였다. 이리하여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반동세력의 일시적 승리와 대중운동이 쇠퇴하는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임무에 직면하였다.
“필히 퇴각을 진행해야 한다. 직접적인 혁명투쟁을 진행하는 방식에서 우회적 투쟁으로 전환하여야 하며, 완강한 사업을 전개함을 통해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1)
이러한 임무를 완수키 위해선 볼셰비키는 무엇보다 노동운동 내의 걸림돌부터 제거해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엔 ‘청산파(淸算派)’와 ‘소환파(召喚派)’라는 두 기회주의 세력과의 싸움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청산파’는 주로 멘셰비키로 구성되었다. 1차 혁명의 실패로 멘셰비키는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타협을 권하고, 스톨로핀의 흑백인조 갱단제도(黑帮制度)2)와 화해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 멘셰비키는 당의 지하조직을 없앰으로써 비합법 혁명 사업을 청산하기를 바랐다. 청산파는 당의 기존의 강령과 전략전술을 내팽개치고, 당의 혁명적 전통을 내버리는 대가로 차르 경찰로부터 일정한 합법적 신분을 얻어내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비해 ‘소환파’는 볼셰비키 가운데서 동요분자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혁명적 문구를 이용해 자신들을 엄폐하였는데, 거리로 뛰쳐나와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는 자만이 혁명가라고 주장하였으며, 스톨로핀의 갱단이 주재하는 두마의회에 남아 있는 자들은 혁명가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당이 합법적 활동을 거부하도록 촉구하였으며, 두마로부터 사회민주당 의원단을 소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소환파’로 불리는 그들은 보그다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을 별도로 조직하여 레닌에 반대하였다.
혁명이 실패하고 대중들이 지쳐 있는 상황에서 사상적 동요는 특별히 유해하였다. 청산파는 차르제도에 투항하고자 하는 사상을 유포하였으며, 소환파는 당을 망동과 모험주의 길로 내몰아 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양자의 경중을 따지자면, 소환파는 볼셰비키 내부의 소수파에 불과해 전체적으로 보면 실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멘셰비키 분자들로 구성된 청산파가 당내 투쟁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2) 이 시기 정치신문의 역할
볼셰비키가 이 무렵 당내 기회주의 세력들과 투쟁하는데 있어 두 개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90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5차 전국대표회의3)였다. “반동의 시대의 당 진로에 있어 일대 전환점”4)으로 불린 이 회의에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에 대해 큰 승리를 거뒀다. 레닌은 이 회의의 주요 보고를 했는데, 이 보고 정신에 입각하여 채택한 회의 결의는 반동시기 전체를 통한 당의 혁명노선과 조직 전략을 확정지었다.
둘째는, 1909년 6월 파리에서 개최된 볼셰비키의 기관지 [프롤레타리아트] 편집부(실제 볼셰비키의 중앙지도부) 확대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소환파들이 주장하는 소환주의와 볼셰비키주의는 상호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전체 볼셰비키에게 이 같은 혁명적 맑스주의를 배신한 행위에 대해 가장 단호하게 투쟁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소환파를 볼셰비키의 대열에서 단호하게 제명하였다.
1908년 2월 복간된 볼셰비키 기관지 [프롤레타리아트]는 상기한 두 회의의 성공적 개최, 그리고 향후 당내 두 기회주의 파벌과의 투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컨대, 이 신문에 실린 레닌의 <직선으로 가다>, <현 시국에 대한 판단>, <자본가계급의 ‘좌향좌’와 노동자계급의 임무> 등의 글은 멘셰비키가 합법화를 추구하기 위해 당의 전통적 강령과 전략전술•조직을 주저하지 않고 포기하려는 청산주의를 비판하였으며,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을 결합시킬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레닌은 또 <두 개의 편지에 관해>, <‘절박한 문제를 논함’에 대해>, <면모가 완전히 뒤바뀐 볼셰비즘> 등의 글에서 볼셰비키 내의 소환파를 겨냥해 그들의 사이비 ‘혁명성’과 ‘좌편향’적 본질을 폭로하였다. 당이 해야 할 어렵고 복잡한 일에는 무능하고, 반동 통치시기에 당이 겪게 되는 어려움 때문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환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레닌의 이러한 원칙적 관점은 상기한 두 회의가 내린 주요 결정과 일치한다. <레닌전집>의 편집부는 이 신문의 공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스톨로핀 반동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지는 볼셰비키 조직을 보존하고 공고히 하는 데 있어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5)
이 시기 정치신문이 발휘했던 역할은 이하 몇 가지 특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첫째, 레닌이 청산파와 소환파와 벌인 투쟁은 당내 투쟁의 성격을 띠었으며, 그 때문에 우선 그것은 당내 파벌 간 사상투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당시 해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조직 내에서의 사상투쟁 분위기에 대해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08~1911년은 단순히 국외에 거주하던 시절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전선, 즉 사상전선에서 긴박한 투쟁이 벌어졌던 시기였다.”6)
이런 형식의 투쟁에 있어 정치신문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각 당내 파벌들은 기관지나 잡지 등 출판물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려 애를 썼다. 그 때문에 이 시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소속된 해외의 각 파벌들은 거의 모두 자체 기관지나 유사한 다른 간행물들을 보유하였다. 예컨대 멘셰비키 ‘청산파’는 자신들의 기관지인 [사회민주당원의 목소리]를 해외에서 발간했다. ‘소환파’의 경우는, 1909년 6월 개최된 [프롤레타리아트] 편집부 확대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 이 파벌은 볼셰비키 내 일부 소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레닌과 소환파의 지도자들은 함께 같은 기관지인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일했는데, 이 회의가 볼셰비키 대열에서 소환파를 공식 제거한 뒤 소환파는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파벌을 만들었다. 그것은 후에 ‘전진파’로 불리었는데, 이는 그들이 발간한 [전진]이란 명칭의 문건 때문에 붙여졌다.
둘째,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의 사상투쟁은 복잡한 국제노동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련공산당 역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의 중간파가 나타나 청산파를 지원하였다. 제2인터내셔널 중간파가 대표한 사상체계와 정책은 바로 당내에서 프롤레타리아 분자가 쁘띠부르주아 분자에게 복종케 만드는 것이었다. 중간파들은 말로는 맑스주의에 충실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맑스주의를 왜곡시켰다.”7)
러시아에서 이런 중간파 입장을 대변한 것은 트로츠키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자신의 개인 신문인 [프라우다]를 발간했다. (이는 이후 1910년에 발간된 당의 공식 일간지 [프라우다]와 명칭이 같으므로 구별에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 같은 형세 하에서 볼셰비키가 자신의 강력한 기관지가 없었다면 당내 기회주의 세력들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밖에도 당의 주요 파벌 지도자들이 대부분 해외에 거주하는 가운데 국내 조직과 긴밀하게 연계해야 할 필요성도 기관지의 역할을 높여 주었다. 크루프스카야는 “이 어려운 반동의 시기에 좀 더 신속하게 중앙기관지를 통한 상시적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 그것이 빨리 출판되어야 한다.”고 썼다.8)
레닌은 1차 혁명이 실패한 후 해외에서의 교민 생활을 재개하면서 당의 기관지를 만드는 일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1907년 10월 4일 크루프스카야가 레닌의 의뢰를 받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우파(乌法)위원회와 바쿠위원회에 보낸 편지에는, “당의 중앙기관지 출판에 관한 문제가 시간만 질질 끌며 해결되지 않아 [프롤레타리아트] 복간을 결정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원고와 위원회 출판물을 보내주시오”라는 요청이 적혀 있다.9) 1908년 1월 25일 레닌은 작가 고리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에는 현재 정상적으로 출판되고, 퇴폐와 의기소침함과 싸우고자 하는 노선을 꾸준히 수행할 수 있는 정치성 기관지――당 기관지, 정치성 신문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고 적고 있다.10)
그해 2월 26일 제네바에서 [프롤레타리아트]지가 마침내 복간되었다. 이후 1910년 1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프롤레타리아트] 폐간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레닌은 이 신문에 100여 편의 글과 짧은 평론을 발표했다. 레닌은 같은 해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각종 파벌들의 신문을 일률적으로 폐간시키고 [사회민주당원]지를 당 전체의 공식 기관지로 결정한 후, 멘셰비키와 함께 [사회민주당원] 편집위원회에 참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비록 ‘고된 작업’이었지만 이 신문 편집부에서 철저한 볼셰비키노선의 확립을 위해 분투했다. 함께 편집부 일을 맡은 멘셰비키주의자인 마르토프와 던은 공동 중앙기관지 내에서 태업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기관지인 [사회민주당원의 목소리]에서는 청산주의를 적극 변호하였다. 레닌이 매우 비타협적으로 청산파에 반대하자, 마르토프와 던은 1911년 6월에 [사회민주당원] 편집부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12월부터 이 신문은 레닌이 편집장이 됨으로써 완전한 볼셰비키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1917년 제2차 러시아혁명이 발발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는 청산파와 투쟁하기 위해 멘셰비키의 또 다른 파벌이지만 청산파에 반대하는 플레하노프 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910년 10월, 러시아의 파리주재 비밀경찰의 한 관리가 상급인 던킨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볼셰비키는 두 파 공동으로 통속적인 [노동자신문]을 출간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비밀보고서는 또 “대부분의 참석자들, 특히 레닌은 당의 역량을 이 신문 주위에 결집시키기를 원했다”고 적고 있다.11) 이 같은 구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볼셰비키당 지도자인 레닌이 정치신문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계속)
[본문 주석]
1)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42, 베이징.
2) 스톨로핀(1862~1911): 제정 러시아 말기의 대정치가. 사라토프 지사로부터 1906년 내무대신, 이어 대신회의 의장(수상)에 발탁되고, 1905년 혁명 후 러시아 내정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1906~19011년에 걸쳐 농촌공동체의 해체에 의한 부르주아 개인농의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농업개혁을 단행하고, 의회 해산, 선거법 개정, 혁명분자 억압 등의 반동정책도 행했다. 차르는 당시 ‘흑백인조’라는 갱단조직을 만들어 테러행위로 전국을 억압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는데, 사람들은 차르의 대신 스톨리핀에게 ‘목베는 대가’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가 만들었던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극우파와 급진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1911년 경찰 스파이로 보이는 사회혁명당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상 황인평 엮음, 1985년, 《볼셰비키와 러시아혁명Ⅱ》, 거름, p13 참조.
3) 1908년 12월 21일~27일에 파리에서 열린 ‘협의회’로 정식 당 대회와는 구분된다. 출석한 사람은 의결권을 가진 16명의 대의원으로, 볼셰비키 5명, 멘셰비키 3명, 폴란드사회민주당 5명, 분트 3명이었다.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대표로서 참석했다. 위의 책, p24.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제4차 통합 당 대회(1906년 4월 10~25일까지 스톡홀름에서 열림)이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한 지붕아래 두 가족’의 동거를 하던 상황이었다. 이 통합은 통일을 요구하는 당원대중이나 선진적 노동자의 아래로부터의 압력, 혁명적 정세 하의 노동자계급의 통일적 행동의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4)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43, 베이징.
5) 《레닌전집》 제16권, 인민출판사 1988년판, p475, 베이징.
6) 크루프스카야,《레닌의 추억》,인민출판사 1960년판, p148.
7)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45, 베이징.
8) 크루프스카야,《레닌의 추억》,인민출판사 1960년판, p150.
9) 《레닌연보(年谱)》제2권, 생활․독서․신지식 삼연서점 1984년판, p466, 상하이.
10) 위의 책,p505。
11) 위의 책, p746.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