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3)

본문요지
제1차 러시아혁명 기간인 1905년 1월부터 1907년 6월까지 [전진], [프롤레타리아트], [신생활]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신문들은 당의 무장투쟁 노선을 당원 및 대중에게 전파하였으며, 1905년 12월 이후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질서 있는 퇴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혁명대오를 보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제2절 1905년 1월~1910년 초의 정치신문

1905년 1월부터 1910년 초까지의 러시아는 제1차 러시아 혁명기와 반동의 암흑기를 거친다. 전자는 1905년 1월부터 1907년 6월까지로 [전진], [프롤레타리아트], [신생활]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신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후자는 1907년 6월부터 1910년 초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볼셰비키 기관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민주당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두 시기 정치신문의 역할은 레닌의 신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제1차 러시아 혁명시기(1905년 1월~1907년 6월)의 정치신문

1) 제1차 러시아혁명의 발발

제1차 러시아혁명은 러일 전쟁과 관련이 있다. 러일 전쟁은 일본과 러시아가 중국 동북부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904년 1월~1905년 9월 중국 동북지역에서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그것은 제정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지만, 러일 전쟁은 러시아의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혁명을 야기했다.

▲ 피의 일요일 사건 [사진 : 위키백과]
▲ 피의 일요일 사건 [사진 : 위키백과]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4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차르 정부가 있는 동궁을 향해 평화 행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는 차르의 명령에 따라 맨주먹인 노동자와 그들의 아내, 아들딸들을 총과 칼, 가죽 채찍으로 맞이하였다. 그 결과 1000여 명이 사살되고 약 5000명이 부상당했다.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여 노동자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용감하게 차르의 사병과 코사크 기병의 습격을 물리쳤다. 
이 혁명은 1907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1905년 1월부터 12월까지 혁명의 고조기, 1906년 1월~1907년 6월 초 혁명의 퇴조기 두 시기를 거쳤으며, 이에 따라 볼셰비키당의 임무도 변화하였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레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민의 주동성이 가장 잘 발휘되고, 주민들 가운데서 모든 계층의 자유롭고 광범위한 조직이 발전하며, 출판은 가장 충분한 자유를 얻는다. 인민은 낡은 정권을 외면하고, 그 기관과 명령을 최대한 무시한다. 일체의 것들이 모두 관료의 승인을 받지 않으며, 공식 규칙이나 조례의 입헌적 근거 없이 그런 일들이 이뤄진다”1)

이런 비상한 시기에 1905년 4월 12일부터 4월 27일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 대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당 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체 농민과 연합하여 부르주아계급을 고립시켜 부르주아민주혁명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며, 차르 전제체제를 전복시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모든 농노제의 잔재를 소멸시킨다는 혁명 1단계 전략이 마련되었다. 

이 전략계획에 따라 당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를 조직해 전제체제와 직접 투쟁하는 것이 현재 혁명시기에 있어 당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 중 하나”2) 라는 전략방침을 수립했다. 이리하여 ‘무장봉기’를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기 당의 정치방침의 핵심이 되었으며, 당의 전체 사업은 이 임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핀란드 망명시절 변장을 한 레닌 [사진 : 위키백과]
▲ 핀란드 망명시절 변장을 한 레닌 [사진 : 위키백과]

2) [전진] 등 정치신문과 제1차 러시아혁명

이 시기 당의 정치방침을 세우고 또 이를 집행하는데 있어 당 기관지 등 정치신문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에 대해 [전진], [프롤레타리아트], [신생활] 등 이 기간 출간되었던 볼셰비키의 기관지들을 중심으로 그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진]을 보면, 그것은 원래 볼셰비키가 제3차 당 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창간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탄생했을 무렵 마침 제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당면한 혁명을 어떻게 지도할 지에 관한 당의 방침 수립을 자신의 우선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레닌은 1905년 2월~4월 기간에 <두 가지 전술>, <우리는 응당 혁명을 조직해야 하는가?>,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역량>, <사회민주당과 임시혁명정부>, <무산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를 잇달아 [전진]에 발표했다. 이 글들은 당시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계된 전략과 전술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들이다. 1905년 4월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3차 당 대회는 이러한 [전진] 활동의 기초위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서 채택된 주요 정치방침과 전술은 대부분 [전진]이 앞서 제기한 것들과 거의 일치하였다. 우리는 이로부터 [전진]이 제1차 혁명의 고조기에 볼셰비키의 정치노선 수립과 볼셰비키 내부의 사상적 통일을 촉진시키는데 있어 공헌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다음 [프롤레타리아트]를 보면, 그것은 제3차 당 대회의 결정에 따라 정식 중앙기관지의 신분으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신문은 당 대회의 결의 내용을 알리고 그와 관련된 선전선동을 수행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우선, 그것은 제3차 당 대회의 정신과 결의를 적극 전파했다. 매호 마다 당면한 혁명의 성격과 그 동력에 관해 제3차 당 대회의 입장을 전달하였으며, 노동자계급의 절박한 정치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신문에 발표된 레닌의 글들은 모두 당 대회 결의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들인데, 예컨대 <제3차 당 대회>, <임시정부를 논함>, <농민운동에 대한 사회민주당의 태도> 등과 같은 글들은 당 대회 결의를 해석하는 것들이다. 이런 글을 통해 레닌은 당원과 선진노동자들의 관심사인 혁명정세 하에서 맑스주의 전술계획의 요점, 혁명승리의 전도와 조건 등에 관해 화답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또한 당의 무장봉기 방침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선전선동 작업을 수행했다. 레닌은 <갱단과 봉기의 조직>, <방어에서 공격으로> 등의 글에서 날로 발전하고 있는 대중적인 무장투쟁 문제에 관해 서술했다. 예컨대, <방어에서 공격으로>의 글에서 70명의 무장한 노동자 소그룹이 야밤을 틈타 시내 중심 교도소를 습격하여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두 명의 정치범을 풀어준 사건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공격 참가자들은 인민혁명군의 최선봉에선 사람들이라고 격찬하며, 노동자계급에게 이들 ‘리가 전투대’의 영웅들에게서 배우라고 호소했다. 그밖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각 지역 및 전쟁터에서 보내온 소식들을 전하였으며, 무능한 장교에 대한 사병과 수병들의 불만을 구체적인 사례로 소개하였다. 레닌은 이 신문에 총 69편의 논문과 단평들을 발표했다.

끝으로, [신생활]은 볼셰비키당이 러시아에서 공개 출판한 최초의 합법 일간지이다. 당시 공식 당 기관지였던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외에서 발행되고 있었고, 또 매주 한 차례씩만 출간되었기에 혁명의 빠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당은 국내에서 출간되는 일간지를 통해 사태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보도할 필요를 절감하였는데, 10월 모스크바 총파업 이후 러시아 국내 정치상황이 바뀌면서 대중적인 합법 일간지의 출간을 포함한 합법신문의 출간이 가능해졌다. 1차 혁명기의 짧은 고조기에 출현했던 언론 출판의 자유를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1905년 11월 초 레닌은 귀국 후 이 신문의 편집업무를 직접 이끌었다. <레닌 연보>는 “레닌은 거의 매일 [신생활] 편집부에서 일하며, 이곳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와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를 주재하였다.”3) 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레닌과 중앙위원회는 이 신문을 통해 1905년 11월~12월 초 당 사업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는 1차 러시아혁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때였다. 

잘 알다시피 정치신문은 ‘집단적 조직가’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노동자 통신원’ 제도는 그 실현 형식의 하나이다. 10월 파업 이후 잠시 언론 출판의 자유가 출현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당의 기관지는 처음으로 ‘통신원’을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다. [신생활]은 바로 이 같은 통신원들을 대대적으로 활용한 신문이다. 이 신문이 출간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자체 통신망이 없었는데, 레닌은 각 지방당 조직에 통신원을 추천하여 [신생활]과 연락하도록 하였다. 많은 지방 조직이 이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으며, 통신은 러시아 전역의 73개 성시(省市)와 농촌에서 편집부로 보내졌다. 신문의 80퍼센트는 노동자 통신원과 아마추어 작가가 쓴 기사로 채워졌다.4)

레닌은 이 신문에 모두 14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당의 개편을 논하다>, <군대와 혁명>,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농민>, <죽어가는 전제제도와 새로운 인민권력기관> 등의 글에서 레닌은 1905년 러시아 전역의 정치파업 이후 혁명정세와 계급역량을 분석하였으며, 정세에 걸 맞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새로운 사업방식을 제시하였다.

상술한 대표적인 3개 당 기관지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정치신문이 이 시기 당의 정확한 정치노선의 확립과 당 대회의 결의를 가지고 당원 및 대중을 교육하는 데 있어 큰 기여를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과 같은 핵심 지도자의 활동 또한 당 기관지 사업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당 기관지와 다른 새로운 사업 형식들과의 관계이다. 혁명적 정세의 도래는 당 활동을 위한 새로운 조건을 창출해 주었다. 예컨대 1905년 여름과 가을 대규모 군중대회가 야외에서 열렸으며, 전국적으로 각종 군중집회와 시위 및 사회단체별 회의가 연일 개최되었다. 심지어는 ‘차르 정부기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결의와 명령, 지시를 직접 하는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같은 대중권력기구도 생겨났다. 볼셰비키도 공개 강연을 통해 당의 강령을 설명하면서 대중에게 투쟁을 직접 호소했다. 볼셰비키당이 이 시기 정치적 임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이 같은 새로운 기회와 투쟁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각종 형식 간의 상호관계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중 집회와 가두시위는 주로 ‘구두 선동’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적합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할 수는 없으며, 전파하는 정보의 양과 속도, 범위 면에서도 한계를 갖는다. 그밖에 혁명적 상황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대중의 정치적 각성 수준에 걸 맞는 높은 수준의 선전이나 이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것들은 신문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혁명의 고조기에 요구되는 선전선동과 관련하여, 1905년 4월 볼셰비키가 단독으로 개최한 제3차 당 대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크루프스카야가 소개한 바 있다.
  

“당 대회에서 또 다른 큰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선전과 선동에 관련된 문제였다. 어느 날 한 아가씨가 오데사에서 제네바로 와서 우리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노동자들이 지방위원회가 만족시킬 수 없는 요구를 했어요. 그들은 우리가 그들 사이에서 선전하기를 원했어요. 그게 가능한가요?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선동만을 할 수 있다구요!’ 오데사 처녀와 관련한 이 얘기는 레닌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선전사업에 관한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선전의 형식이 이미 한물갔으며, 선전은 선동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운동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인해 구두 선전, 심지어 일반적 선동조차도 운동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없게 되었다. ……생활은 이미 100개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는 예전의 그런 비밀 조직의 범위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오직 러시아에서 출간되는 일간지만이, 합법적인 출판물을 대량으로 발행해야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5)

선전과 선동은 모두 대중을 위한 교육 수단이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선전은 ‘많은 의견’들을 논리적 체계를 갖추어서 ‘소수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반해, 선동은 반대로 한두 가지 의견을 풍부한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전은 ‘인쇄물’을 많이 사용하며, 선동은 ‘구두 언어’를 주로 사용한다.6) 위 에피소드는 혁명적 절정기에 인민 대중의 정치적 각성 수준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며, 그들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신문(특히 일간지)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소비에트와 정치신문의 관계를 보자면, 대중 권력기관인 소비에트의 출현은 사실상 당이 인민을 상대로 장기적인 정치교육을 실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민대중의 정치교육은 다시 정치신문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때문에 정치신문은 소비에트의 ‘산파’라고 할 수 있다.(이 점은 이후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의 정치신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룬다.)

1905년 12월 볼셰비키가 주도한 모스크바 무장봉기가 실패한 이후 혁명은 점차 고조기에서 퇴조기로 진입한다. 이 시기 당의 주요한 임무는 반동 통치세력의 혁명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직면하여 계속해서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완강한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당과 혁명대오가 더욱 가혹한 보복과 파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함으로써 질서 있는 퇴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 무렵 다뤄야 할 주요 현안들은 ‘보위전’의 수행, 제2회 두마선거에 대한 유연한 대처, 그리고 멘셰비키와의 통일문제 등이었다.

이 혁명 퇴조기의 레닌과 볼셰비키의 주요 활동은 [당내 소식지](1906년 2월~4월, 총 2호 발행), [파도],[전진](1906년5월 26일~6월 14일), [울림소리](1906년 6월 22일~7월 7일), 그리고 1906년 8월부터 다시 복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정치신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계속)

[본문 주석]

1) 《레닌전집》 제16권,인민출판사 1988년판, pp.12-13, 베이징.

2) 《소련공산당대표대회대표회의와 중앙위원회전체회의 결의 편제》제1권, 인민출판사1964년판, p88,베이징.

3) 《레닌연보(年谱)》제2권, 생활․독서․신지식 삼연서점 1984년판, pp.255-256, 상하이. 

4) 赵水福‧ 傅显明 공저:《레닌과 신문사업》,베이징방송학원출판사 1986년판, p90, 베이징.

5) 크루프스카야,《레닌의 추억》,인민출판사 1960년판, pp.109-110.인용문 중 굵은 글씨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6) 선전과 선동의 차이에 대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컨대 실업 문제를 다룰 경우, 선전가는 공황의 자본주의적 본질, 현대 사회에서 공황이 불가피한 이유, 이 사회의 변혁 필요성 등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는 ‘많은 의견들’, 실로 너무 많아서 (비교적)적은 사람들에 의해 완결적인 전체로서 이해될 수 있는 의견들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선동가는 같은 주제에 관해 말하면서, 해고된 노동자의 가족이 굶어 죽은 사건,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 등등을 예로 들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들을 이용해 ‘단 하나의 의견’을 ‘대중’에게 내놓는 일에 노력을 집중한다. 따라서 선전가는 주로 인쇄된 글을 수단으로 활동하며, 선동가는 말을 통해 활동한다.”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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