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선의 역사(1) - 친일파로 채워진 분단국회
4.15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21번째 치러지는 이번 총선에서 우리 국민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대한민국 총선의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한다.
![▲ 5.10단독선거. [사진 :인터넷 캡처]](https://cdn.minplusnews.com/news/photo/202003/10138_20248_5711.png)
1. 선거개요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임기 2년의 선거. 이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한다.
총인구수 1,900만 명 중 유권자는 780만 명, 투표자는 748만 명, 투표율은 95.5%로 역대 최고였다. 그런데 선관위 기록과는 달리 UN한국임시위원단 미국 연락장교 보고서에 의하면, 980만 명 유권자에 780만 명이 등록하고, 700만 명이 투표하여 투표일이 71.6%라고도 되어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선거이자 헌법을 정초한 선거라고 칭해지는 5.10 선거는 우리 역사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2. 친일파, 친미파로 채워진 국회
1대 국회 의석수는 200석에 입후보자는 942명이었다. 비례는 없었고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가 55명 당선으로 제1당이 되었고,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 29석,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았다.
독촉은 이승만 직계부대였고 235명을 출마시켰다. 한민당은 친일지주 중심 정당으로 91명을 출마시켰다. 당시 무소속이 많았던 것은 정당개념이 확립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한민당이 친일파로 인기가 없어 무소속으로 나온 경우가 많아 실제로는 60-80석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좌익계를 물론이고, 김구 선생계열, 김규식 계열 등 이승만과 한민당을 제외한 대다수 세력이 남한만의 5.10단독선거를 반대하고 선거에 불참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른 바 대한민국 제1대 국회, 제헌국회라는 것이 일부 무소속을 제외하고는 친일, 친미, 분단세력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국회적폐, 분단적폐의 시작이었다.
3.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미국의 선거
해방 당시 우리 민중 어느 누구도 이토록 오랫동안 나라가 분단되어 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미군정 3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의 행보에 대해 우리 민족은 물을 것이 많다.
1)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미국이 요구했다. 일본은 이미 45년 7월에 항복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미국은 기어이 일본에 8월 6일, 8월 9일 원폭을 투하했다.
2) 독일은 전범국가로 동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아시아에서 전범국가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왜 미국은 8월11일 한반도를 38선으로 분단했나?(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 녹취록에서 “38선은 포츠담((1945년 7월)에서 마련됐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 미국은 점령군으로 남한에 들어왔다. 반면 소련은 원조자로 들어왔다고 했다. 미국은 조선민중이 세운 인민위원회와 자주관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민중들을 탄압했으며,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4)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다. 동아일보에 그 정보를 줄 수 있는 곳은 미국밖에 없었고, 미국 신문보도보다 먼저 보도되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때부터 애국자로 행세하기 시작했고, 민족역량은 두 동강이가 났다.
5) 미국은 결국 미소공동위원회(1차 46년 3월 20일, 2차 47년 5월 21일)를 무산시키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47년 11월 14일).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는 것은 미소합의에 어긋나는 불법일 뿐만 아니라 유엔권한으로 다룰 수 있는 전후처리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 조선민중의 어떠한 요구도 무시하고 결국 거수기 유엔을 도구삼아 ‘유엔감시 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강행한다.
5.10 총선, 단독선거는 미군정 3년이 만들어낸 것이다.


4.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매국노인가
분단을 막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전 민족적 노력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중도파들은 46년 1차 미소공위가 결렬 직후 좌우합작운동으로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여운형 선생은 좌우합작을 넘어 남북합작에까지 힘을 기울여 다섯 차례 38선 이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만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된다.
단독총선이 명확해지자 이번에는 김구 선생, 김규식이 나섰다.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을 제안했고, 47년 4월 19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공동성명서 4개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지도자들은 외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다.
4)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김구 선생도 단독선거 이후 49년 6월 26일 암살된다.
민중들은 전평 30만 파업을 포함한 2.7 구국투쟁과 4.3제주항쟁으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이미 이승만 등은 단독정부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제1차 미소공위 결렬 후 1946년 6월 3일 일찌감치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할 것이라고 발언한다.(정읍발언)
1대 총선을 위한 선거법은 1948년 3월 17일 미군정법률 제175호 국회의원선거법으로 공포된다. 이 법안 작성에는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선인 과도입법의원들도 참가했다. 그런데 이들은 선거권·피선거권 나이를 25살과 30살로 높이려 했다. 청년들이 좌익이 많다는 이유로 이들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기표 방식도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자서 방식(후보 이름을 쓰는 방식)을 택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실상 하위 계층을 선거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친일파와 부일 협력자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법안은 우익 세력의 반대로 사문화되고 말았다. 차후 단독선거실시가 기정사실화된 후 미군정이 개입하여 선거권을 21세로, 피선거권을 25세로 일부 조항을 바꾼다.

5. 자유로운 선거?
선거 전후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이하 위키백과 주로 참조)
미군정과 우익은 “총선거가 완전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며 선거에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며 강압적 분위기를 강화했다.
1948년 3월29일부터 4월9일까지가 유권자 등록기간이었다. 4월 말, 당시 신문들은 "약 500명을 인터뷰한 결과 91%가 선거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보도했다.
경찰과 우익세력은 쌀 배급과 선거인등록을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강압적인 유권자등록에 나섰다. 4월28일, 유엔임시위원단은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1) 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한 사실 (2) 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해서 강제 등록 (3) 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건 일종의 강제로 간주됨"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는 "(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김구 선생도 "국민들은 경찰과 향토보위단의 억압적인 태도 하에 등록하고 투표를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선거 당일에는 서울에서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하에 중요 도로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 하 도시 같다"고 했다. 부인들은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야심 머기는 "투표소 둘레나 안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결여됐다"고 지적했다.


6. 1대 국회(제헌의회)시기 발생한 일 – 반민특위 와해
1대 국회는 5월 31일 최연장자 이승만을 임시 의장으로 추대하고 이승만을 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한다. 또한 유진오 등이 주도하여 7월 12일 헌법을 제정하고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국의 정·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다.
제헌국회가 제정, 통과시킨 주요 법안은 정부조직법을 비롯하여, 친일파 처벌을 목적으로 한 반민족행위처벌법, 농가 양곡의 정부 매입을 의무화한 양곡매입법, 사상범 단속을 위한 국가보안법 및 지방행정조직법 등 20여 건이다.
1대 국회 흑역사는 단연 반민특위 해체이다.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함에 따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악질 친일기업가 박흥식, 조국의 젊은이들을 일제전쟁터로 내몰았던 최남선·이광수, 친일경찰 노덕술 등이 특위조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김약수 등을 외국군 철수, 남북정치회의 등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한 혐의를 씌워 1949년 5, 6월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구속시킨다. 이들은 반민특위 핵심의원들이었다. 이후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 최운하를 체포한 것에 반발하여 내무차관 장경근 등이 주도하여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반민특위 특경대를 무장해제함으로써 사실상 반민특위가 와해된다. 결국 반민특위는 1949년 10월 법개정으로 해체되고 만다. 친일매국노 청산은 여기서 무너지고 친일기득권 세력이 장장 70여년의 세월을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