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뉴스]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66주기 제10회 합동추모제

▲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66주기 합동추모제’가 6월 28일 한강대교 노들섬 남쪽 둔치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66주기 제10회 합동추모제’가 지난 28일 오전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 남쪽 둔치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평화재향군인회(평군)와 (사)평화통일화해연구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최사묵 평군 상임대표와 한국전쟁유족회 박용현 부회장,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추모제는 전통제례와 독축, 추모 묵념에 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폭파경위 설명, 추모사와 추모 공연, 음복 등으로 마무리되었다.

▲ 초헌 잔을 올리는 최사묵 평군 회장
▲ “대한민국의 국군이 여러분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지휘라인의 한 명인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성난 민심을 오도하고 자신의 죄를 덮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을 살해하였습니다. 국군은 한국 사람으로 된 미국 군대였습니다. 미국을 위해서 미국의 잉여무기로 우리 남, 북, 우리 민족을 참살하는 행위를 이승만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전시작전권을 이 전쟁 중에 연합사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점령군(국정원)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주정헌 새날희망연대 공동대표의 독축.
▲ 박용현 한국전쟁유족회 부회장이 한강인도교 폭파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한강인도교 폭파 개요](통일뉴스 2013년 7월1일자 기사)

 

○ 6월27일(전쟁 발발 3일째) 전황

-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 위협

-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남(새벽 2시)

-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새벽 4시)

-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가용 전력을 창동 방어선에 집중시켰으나 붕괴

 

○ 6월27일 11시 : 긴급 회의

-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고,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 상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

-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 함

 

○ 6월27일 12시~15시 30분 : 한강 인도교,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 폭파장치 설치 완료

 

○ 6월27일 19시 :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의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이 곧 한국 전선에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육군본부를 서울로 복귀하기로 결정

- 이에 따라 채 총참모장은 육본을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키고 한강교 폭파 연기

-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 사수 결정

- 한강 상의 교량에 설치했던 폭발물 일부 제거, 차량과 열차 통행에 지장 없도록 조치

- 폭파 지휘계통도 총참모장-참모부장(김백일 대령)-공병감-공병학교장으로 확정

 

○ 6월27일 20시 : 이승만 대전에서 6만 명의 일본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한편으로 서울 사수 라디오 녹음방송 시작, 3회 방송

‘동포여러분’으로 시작되어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요지. “국군이 반격 중이니 도망가지 말라.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

 

○ 6월27일 23시 30분(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될 무렵) : 폭파준비 명령 하달

 

○ 6월28일 01시 45분(돈암동에 북한군 전차 진입 보고 접수) : 채 총참모장 공병감에게 폭파 명령 하달

 

○ 6월28일 02시 30분 : 한강교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절단

-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500~800명에 이르는 인원 사망, 차량 50여 대 피해

-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 차단, 국군 주력 4만 4천명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 초래

- 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

- 한강교 조기 파괴로 시민들 피난 기회 상실

 

○ 6월28일 오전 10시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후 인민군 전차 한강대교 북단 출현

- 북한의 경우 10월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백선엽의 1사단이 대동강 입구에 당도한 시점에서 다리를 끊음

- 피난길이 끊겨 강북에 남겨진 많은 시민들은 수복 후 부역 혐의로 학살. 총 부역 혐의자 550,000명.

 

○ 9월21일 : 공병감 최창식 대령 사형

- 한강교 조기 폭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군은 민심 수습을 위해 군관계자 군사재판 회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폭파 책임을 물어 사형 선고

- 1964년(14년 후)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으로 판단, 무죄 선고로 명예회복

▲ 대한시조협회 고금자 선생이 원혼들을 위로하는 창을 부르고 있다.
▲ 사전 경고도 없었던 조기 폭파와 거짓 방송, 피난 기회마저 차단된 시민들을 다시 부역자로 학살한 이승만 정부를 질타하는 최천택 전 한신대 명예교수 등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한강인도교 폭파 증언](통일뉴스 2013년 7월1일자 기사)

 

○ 로이 애플먼 _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책자에서

『한강다리가 폭파되었을 때 피난민과 차량은 생명의 탈출구인 인도교에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폭파를 목격한 미군장교는 500~800명이 폭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4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피아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 다리를 6~8시간 후에 폭파해도 무방했을 것이며, 그랬으면 3개 사단의 병력과 중장비차량을 충분히 후송했을 것이다.』

 

○ 페렌바크 _ <한국전쟁> 책자에서

『다리 북쪽 끝에서 150야드쯤 왔을 때 시간은 오전 2시 14분이었다. 다리는 수많은 자동차와 보행자들로 들끓었다. 장대령은 수천 명의 시민과 군인들을 실제로 다리를 건너면서 보았다. 땀에 젖은 그는 화가 나서 찝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고 시계를 보니 오전 2시 15분이었다. 그때 다리가 폭파되었다. 오렌지빛 불이 캄캄한 하늘에 번쩍이고 땅이 흔들렸다. 귀가 째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 남쪽 두 개의 긴 아치가 출렁대는 시꺼먼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병사와 시민이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짐작으로는 천 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었다.』

 

○ 이원장(16연대 부연대장) _ <한국전쟁>

『중앙청 앞을 지나 용산 한강인도교에 이르는 동안 길 가득히 메운 차량대열(군·민)은 흡사 홍수였다. 다행히 인도교를 지나 선두가 노량진 수원지 정문에 이르렀을 무렵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밤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때야 비로소 연대장은 내 손을 잡으며 “부연대장, 고맙소! 우리 부대는 당신 덕으로 살았소.” 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단 2분이라는 시차… 이리하여 나는 죽을 고비(사선) 하나를 넘기게 됐다.』

 

○ 이창록(국방부 정훈국 소위) _ <한국전쟁>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번째 아치쯤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예요. 그 많던 차량은 온 데 간 데 없고 파란 인의 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고 있고 그 위에 살점 등이 엉겨있어요.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아마 죽을 때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본능인가 보지요.

나는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국민에 대한 이런 폭거가 어디 있느냐고… 이렇게 만든 자는 마땅히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양원진(양심수후원회 장기수, 88세, 당시 신흥대 재학)

『포탄이 떨어져 27일 자정쯤 한강교 북쪽에 있는 육본 연병장 부근의 수로 터널로 피난을 갔죠. 새벽 2시 반경 불이 번쩍하더니 열폭풍과 폭발음이 밀려와 한강이 폭파된 줄 알았습니다. 뒤이어 2차 철교 폭발음이 들려 왔습니다. 아침에 한강변 파출소로 가보니 인민군 전차가 도열해 있었어요.』

▲ “피난길에 재촉하던 발걸음으로 누워/이지러진 눈으로 그대들은/맑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가... 밤하늘을 타고 내려온 수많은 별빛이 비추어/역사가 되고 숲이 되고/장엄한 산령을 이룰 것을 믿나니/이 억울한 주검 앞에 삼각산은 목놓아 우노니.” 이경선 코리아시낭송협회 회장의 추모시 낭송.
▲ 기념사진

[축문]

단기 4349년 5월 24일(양력 6월 28일) 오전 11시, 평화재향군인회와 한국전쟁희생자유족회의 회원들과 여기 모인 여러 서울시민들이 단기 4283년 5월 24일(양력 6월 28일) 새벽 2시 피난 중 이승만 정권의 지시로 자행된 한강인도교 폭파 시 희생되신 영령님들께 고합니다.

영령들이시여!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하십니까?

단기 4283년 5월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 중,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서울 사수 방송을 들으면서도, 계속되는 포화 소리에 전쟁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견하고, 온 가족이 세간 살림 대충 챙겨서 뚜렷이 목적지도 없이 난을 피하고자 살려고 나오신 새벽이 아닙니까?

차, 우마, 사람이 뒤범벅 꽉 차서 건너던 다리가 갑자기 귀청이 터지듯 들리는 굉음과 함께 다리가 폭파되어 모두가 물속으로… 그렇게 살기 위해 떠나던 피난길이 죽음의 길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제 나라 백성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야 하는 대통령이란 자가, 자신은 대전으로 피신하고서 녹음방송으로 서울 사수를 외치며, 한강 이북 국민의 안위와 국군의 주력부대와 장비를 남긴 채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평화로운 피난민을 학살하는 한강 인도교 폭파 결정을 할 것이라고 어찌 꿈엔들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영령들이시여!

영문도 모른 채 원혼이 되신 영령들이시여!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이 여러분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지휘라인의 한 명인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성난 민심을 오도하고 자신의 죄를 덮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을 살해하였습니다.

국군은 한국 사람으로 된 미국 군대였습니다. 미국을 위해서 미국의 잉여무기로 우리 남, 북, 우리 민족을 참살하는 행위를 이승만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전시작전권을 이 전쟁 중에 연합사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점령군(국정원)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영령들이시여!

일찍부터 위로 드려야 함에도 위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항시 감시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영령님들께서 아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생명이 붙어있는 한 계속 위로 드리겠습니다.

 

영령들이시여!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추모객을 일깨워 주소서!

우리가 식민 지배를 받고 있음을. 그리고 꼭 자주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 자유로이 추모할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과일 음식 올렸습니다. 부디 흠향하시고 서러움과 원통함을 달래시고 저희에게 힘과 용기를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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