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혁명가과 레닌과 마오의 차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두 사람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무척 다른 것 같아요. 흔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아시아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

1) 목표와 수단의 딜레마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의 지역적이며 경제적인 투쟁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전국적인 정당을 통한 정치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정치투쟁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적 성격을 띤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대중정당을 통한 합법적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장악하면, 이를 통해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을 지녔습니다.

혁명적인 정치투쟁을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즉 목표는 혁명에 두고 수단은 합법에 둔다니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하지만 마르크스는 서구 민주주의를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사회주의 탄압법이라는 시련을 견디고 성장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목표와 수단 사이의 괴리는 곧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괴리는 자본주의의 취약한 고리, 봉건적 차르의 지배가 유지되는 나라, 러시아에서는 곧바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레닌은 1893년부터 1898년 유형에 처하기까지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을 넘어서 정치투쟁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적인 대중정당을 통한 합법적 투쟁의 가능성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898년 체포된 이후 3년의 유형생활을 통해 그는 러시아라는 현실에서는 더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수단, 즉 합법노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는 참담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고, 유형생활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스위스로 망명합니다. 당시 레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1902년 발간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제 레닌의 구상을 이 책을 통해 간단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2) 레닌의 수치심

그는 그동안 자신의 활동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면서 시작합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 전개되던 활동은 주로 지역 학습서클을 모태로 출발했습니다. 곧 이어 공장에 침투하여 노동자를 조직하고 파업을 지도하죠. 그런 다음 이웃하는 서클과 합동을 통해 지역적 조직을 만들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경찰이 어느새 탐지하여 일망타진합니다. 레닌은 이런 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운동 자체가 아마추어적이었기 때문에 경찰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경찰의 공격이 빈번해져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고 지역 학습서클들이 너무나 철저하게 일소된다.… 운동은 놀랄 만큼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며 활동의 지속성과 응집력을 확보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당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내가 느꼈던 수치심을 생각하면 할수록 혁명가라는 직업에 먹칠하는 설교나 해대는 사이비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내 심정은 더욱 비통해진다.”

이런 글 속에서 레닌은 운동의 아마추어적 성격을 비판합니다. 이런 성격은 혁명적 목표를 대중정당이라는 수단으로 수행하려는데 존재합니다. 이런 아마추어적 성격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는 혁명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는 곧 위에서 본 것처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갔던 길, 즉 일망타진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운동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죠. 혁명적 성격을 상실하고, 체제 내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경제주의자 스트루베가 갔던 길입니다.

마르크스가 기대해 마지않았던 독일 사회민주당도 결국은 후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마침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 최종 결과는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을 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딜레마를 빠져나가는 길은 없을까? 레닌의 고민은 거기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레닌의 결론을 살펴보기로 하죠.

▲ 1917년 11월8일 소비에트총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사진출처 : Wikimedia Commons]

3) 정치투쟁이란?

이 책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여러 주제를 포함하지만 대체로 3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핵심은 새로운 정당의 형태입니다. 이 정당은 어떤 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이 정당은 어떤 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그리고 이런 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지렛대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첫째 문제를 다루어 보죠. 첫째 문제에서 그는 정치투쟁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정당의 정치투쟁이 어떻게 다른가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자가 지역적(공장 수준의) 문제를 다룬다면 후자는 전국적 문제를 다룹니다. 전자가 노동계급의 처지에 한정된 문제(예를 들어 참정권)라면 후자는 사회 전반에 걸친 지배계급의 탄압을 다룹니다. 전자가 자본주의 체제의 개선에 한정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전복을 향해 나가려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후자, 즉 정치투쟁은 혁명적 성격을 지닌 투쟁입니다. 레닌은 이를 ‘민중의 호민관’이라는 말로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의 이상은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민중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레닌 시대에 합법적 마르크스주의는 스트루베라는 경제주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레닌은 스트루베의 활동이 경제투쟁에 머물렀다고 비판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레닌이 이렇게 정치투쟁을 강조한 것은 이런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미 마르크스도 정치투쟁의 중요성에 관해 충분히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정치투쟁이라는 개념 자체는 레닌의 새로운 구상은 아니었지요.

문제는 항상 실천입니다. 경제투쟁을 비판하면서 정치투쟁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투쟁을 실천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4) 직업혁명가

러시아와 같은 탄압의 조건 아래서, 혁명적 성격의 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레닌의 답은 간단합니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혁명가로 이루어진 비밀스럽게 활동하면서,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체계입니다. 이 효율적 체계는 임무가 분업화되고, 고도로 조직된 중앙집권적인 조직체라고 말합니다.

레닌의 이런 조직 개념은 후일 많은 오해를 낳았습니다. 우선 전문적인 직업적 혁명가라는 개념은 노동자를 대신하여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엘리트주의적이 아닌가 하는 비판입니다. 나로서는 여기서 레닌이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니, 지식인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하든 직업화되면 전문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반면 직업화되지 않는다면, 아마추어적 성격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직업화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레닌이 어떻게 노동자든 지식인이든 이런 직업적 혁명가의 생활을 보장하려 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너무 상세한 논의는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죠.

중앙집권적 체제는 효율적이지만 비민주적입니다. 레닌은 민주집중제라 해서 당내 민주주의를 간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비밀조직인 만큼 민주성은 아무래도 실현하기 어렵지요. 결국 집중을 강조하게 되니, 마치 군대와 같은 상명하복의 체제가 될 우려가 다분합니다. 그 때문에 이런 조직은 여러 문제가 출현합니다. 관료주의나 분파주의가 그것입니다.

레닌은 이런 문제를 알았지만 효율성을 위한 대가로 일종의 필요악이라 파악했습니다. 이런 관료주의나 분파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이 문제는 후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풀어야 할 결정적인 문제였어요.

5) ‘이스크라’의 역할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차르의 비밀경찰 체제 아래 어떻게 직업혁명가의 중앙집권적인 정당, 즉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의 해결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해외에 당 본부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외와 국내를 연결하기 위해 신문을 발간한다는 것이죠. 먼저 신문을 레닌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기로 하죠.

“신문의 구실은 단지 사상의 유포, 정치교육, 정치적 동맹자의 모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문은… 집단적 조직자이다. 신문은… 건축 중인 건물 주위의 비계에 비유할 수 있다. 비계는 건물의 윤곽을 드러내고 건설노동자들의 의사소통을 쉽게 하며 노동자들의 작업을 분배하고 집단노동의 공통성과를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비계라는 비유는 신문이 하는 조직상의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목적으로 레닌은 스위스로 망명한 다음 그 유명한 신문 ‘이스크라(불꽃)’을 창간하죠.

6) 해외 본부

나는 여기서 또 하나의 방법, 즉 해외 본부라는 개념을 아울러 강조하고 싶습니다. 혁명정당은 전국적이며 일관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일시 세워졌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경우 그런 정당은 결코 혁명정당의 지위에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지역적으로, 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양한 분파가 출현하기 마련이며 이들은 내분을 거듭하니 혁명은 결국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지요. 우리는 이런 내분의 모습을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의 모습에서 신물이 나도록 발견하게 됩니다.

레닌은 혁명정당의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당의 중앙이 해외에 그것도 가장 안정된 자유로운 곳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유럽에서는 그 장소가 바로 스위스였습니다.

레닌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접한 이웃 나라에 자유로운 나라가 있다는 것은 당시 유럽에 한정된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나중에 식민지의 현실에서 투쟁했던 사회주의자에게는 그런 행복한 여건이 없었으니, 그들은 이 문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했을 겁니다.

우리는 레닌의 문제의식을 이해해야지 그 방법을 단순히 답습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후일 마오는 레닌의 방법을 벗어던지고 군벌이 지배하는 봉건국가인 중국에 적합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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