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이야기 한일관계, 독도문제 첫 번째
| 이번 칼럼부터 한일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첫 번째는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독도문제에 관해 2∼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필자] |
1. 일본의 첫 번째 조선침략 독도 편입, 첫 번째 희생물 독도 강치
문제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착용한 주황색 넥타이가 화제가 되었다. 이날은 문희상 특사가 일본에서 재작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우리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분위기”임을 전달하며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이 넥타이는 한 의류브랜드가 ‘독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112주년 독도주권 선포의 날을 기념해 만든 제품으로, 한 때 독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강치 떼 문양을 새겼다. 독도에 강치가 있었다고? 독도에 살던 강치와 독도주권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 사연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독도 강치는 독도를 중심으로, 동해 섬들과 일본의 환동해권 연안에 무수히 서식했던 바다사자다. 일본은 1905년, 독도에 서식하던 강치 잡이에 혈안이 된 수산업자의 요청을 빌미로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며 일본 영토에 편입시켜 버렸다. 일본이 독도를 꿀꺽 한 것은 단지 수산업자들의 요청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의 해전 대비의 일환으로 독도에 망루를 건설하고 전신망을 구축하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처럼 독도는 일본의 침략정책과 한국 강제병합의 신호탄이었지만 막상 첫 희생자는 독도에 서식하던 강치 떼였다. 독도가 일본 각의의 결정으로 ‘시마네 현 다케시마’가 되어버리자, 가죽과 지방과 뼈를 노리고 달려든 일본 수산업자들의 무참한 포획으로 강치 수만 마리가 멸종되었다. 이처럼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신호탄이었고, 독도 강치의 무참한 포획과 멸종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과도 같은 의미이다.
주강현 교수는 그의 저서 <독도강치 멸종사>에서 이 책이 “독도의 본디 주인 강치”에게 헌정하는 “멸종의 연대기이며, 인간이 배제하고 있는 본디 주인에 대한 뒤늦은 예의이자 ‘기억투쟁’”이라고 기록했다. 내게는 이 표현이 우리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환기하는 말로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하고 나온 강치 넥타이도 그런 아픔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일까? ‘위안부’ 재합의를 포함하여 왜곡 굴절된 한일관계를 어디까지 바로 잡을 수 있을까?

2. 해방 이후 독도의 주인을 뒤바꾸려 한 일본과 미국의 음모
독도와 강치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침략의 첫 시작이었다면, 해방 후의 독도문제는 미일 군사동맹을 구축해가는 굴절의 상징이다.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실제로는 미국 주도로, ‘일본 편들어주기 세계질서 구축의 첫 단추’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최종안이 만들어지기까지 20여 차례의 수정을 거쳤는데 처음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 국무성 고문 시볼트가 ‘안보적 측면에서 리앙쿠르앙(독도)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해 미국의 국가 이익 측면에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며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하자고 주장, 미국은 6차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등 다른 연합국들은 거세게 반발, 제7차 초안에서는 독도는 한국영토로 표시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다시 입장을 바꿔 8, 9차 초안에 일본에 포함시켰고, 10, 11차에 또 다시 한국영토로, 12차 초안에서는 일본영토로 뒤바꾸는 일이 반복되었다. 결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연합국들의 불만이 폭발, 이런 갈등을 중재하고자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를 초안에서 제외시킨 결정’이 이루어졌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a)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되었는데 이의 해석을 둘러싸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이견이 팽팽한 것이다. 일본은 독도가 빠졌으니 일본 영토로 인정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한국은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라 당연히 한국 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미일군사동맹의 입장에서 사실상 독도에 관한 일본의 편을 더 노골적으로 들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54년 7월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폭격훈련구역의 하나로 독도를 지정하였고 일본 외무성은 이를 즉각 관보에 게시하였다. 이 어이없는 사태는 한국의 항의를 받고 즉각 독도를 폭력훈련구역에서 해제하였으며 그 사실을 한국 측에 공식적으로 통보하긴 했지만 미국의 속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독도문제는 1952년 1월 한국정부가 해양주권선언을 하자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된다. 일본은 ‘한국정부가 다케시마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항의 외교문서를 보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논쟁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는데 일본은 1953년 7월 ‘다케시마에 관한 일본 정부의 견해’라는 공식문서를 통해 ‘다케시마가 일본영토인 것은 국제법상에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까지의 우리 정부 입장은 54년 9월 발표된 외무부장관 성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도는 우리의 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우리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다만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독립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려는 것은 곧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 같은 당당한 기세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한일수교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 칼럼으로 미루기로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