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개 선거평가라는 것은 십중팔구 결과에 끼워 맞추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이번 대선에서 잠시 화젯거리가 되었던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의 벽보와 공보물은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안철수 후보가 만약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면 이 홍보물들은 ‘후보의 슬로건과 이미지를 잘 표현한 참신하고 신선한 파격’으로 승리의 일등공신 대접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대통령 후보로서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든 광고쟁이의 치기어린 만용’으로 패배의 주범이 되어 모진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이런 결과에 따른 자화자찬이나 사후약방문 격인 선거평가는 말하기 좋아하는 정치평론가들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선거는 어디까지나 시대와 대중의 손에 달려있으므로 평가는 모름지기 민중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는 평가서를 미리 써본다.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데 무슨 얄팍한 수작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격동기의 투표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 넘기 마련이니 땅 짚고 헤엄치기만은 아니다.
1. 추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번 대선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간 후보로는 단연 안철수 후보가 꼽힐 것이다. 그는 하야운동 기간 내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론조사 수치에 시달리다가 본선이 시작되자 어떤 조사에서는 1위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날개 없는 추락’이라고 불린 그의 지지도 하락은 2위 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까지 내몰렸다.
많은 사람들은 가장 큰 이유가 안철수 후보 자신의 자질과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정치인에게는 한번쯤은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인데 그것을 움켜쥐는가, 놓치는가는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문제라는 것이다.
TV토론을 거듭할수록 안철수의 지지도가 하락한 것을 보면 이런 평가에는 일리가 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내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의 기이한 자해성 토론, ‘그건 오햅니다’로 시작하는 일방통행식 어조 등은 대통령감으로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안철수의 지지도 추락을 불러온 다른 큰 이유는 딴 데 있다. 그는 현실진단과 해결책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그것들은 삶에서 체득한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습득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민중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주었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안철수가 추락한 근원적인 이유는 그가 시대와 대중의 지향과 요구에 엇섰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박근혜 하야투쟁의 성과물이며 이를 일단락하는 과정이다. 민중은 ‘적폐청산’을 대선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그런데 안철수는 1위 문재인을 이기기 위해 적폐청산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홍준표, 유승민과 단일화는 거부했지만 수구보수들의 주장은 대부분 수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본선에 들어서자마자 ‘사드배치 반대’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그는 미국이 대선 한가운데 사드를 롯데골프장에 반입하는 뻔뻔스런 일을 저질렀음에도 ‘사드는 이제 한미동맹의 한부분이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를 절대화하고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부정하는 속내를 여러 번 드러내는가 하면, 민중운동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입장을 내포한 그의 태도는 수구보수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안철수 캠프는 선거전 내내 상대후보들에 대한 비방전에 매달렸고 후보도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새 정치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과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안철수 후보는 선거후반 패권정치 청산을 주 구호로 내세웠지만 이는 적폐청산을 추구하는 대중의 요구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1위를 따라잡아야 하고 3위 후보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딱한 처지는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안철수는 대중의 선택을 받으려면 보다 강력한 적폐청산 방도를 제시하는 데서 길을 찾아야 했다.
물론 당사자에게 그럴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때문이라면 그의 추락과 국민의당의 곤궁해진 처지에 대해 달리 위로할 말이 없다.
2.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소멸
이번 대선결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비박적폐잔당들이 만든 바른정당이다. 후보 유승민은 ‘건전한 보수’를 표방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지만 4당의 지위조차 지키지 못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물론 바른정당에 몸을 담았던 국회의원들이 박근혜 정권과는 유다른 정치를 추구하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침몰하는 새누리당에서 익사하지 않으려고 뛰쳐나왔을 뿐이다.
바른정당은 그들의 바람과 달리 큰 규모를 형성하지 못했고, 선거전에서는 새누리당 골수지지층의 모진 비난을 받아야 했다. 바른정당에 몸담고 있다가는 앞날이 보장되지 못한다고 타산한 십여 명의 의원이 친박적폐본당인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간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인 보수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사회의 보수집단은 시대착오적인 분단이념과 맹목적인 계급적 적대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망국적인 사대매국정치를 자기 사명으로 하는 한국의 보수집단은 야만성과 저열함이 태생적 특성이며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여기에는 어떤 합리성도 없다.
따라서 유승민 후보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론들에서는 TV토론회를 가장 잘한 후보로 꼽혔지만 토론회를 거듭할수록 대선경쟁에서 뒤쳐졌다.
홍준표와 달리 수구보수집단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른정당 내부의 분란이 큰 요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런 이유의 결과일 뿐이다.
물론 유승민의 가치관과 사상은 따져보면 수구보수집단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더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내용 있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한국의 수구보수집단은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자에게 좋은 정책을 내놓기보다 더 극악한 정치선동을 하기를 요구한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기존 새누리당 지지자들에게서 버림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소멸, 이것은 이번 대선이 만든 결과 중의 하나다.
3. 초라한 기사회생
자유한국당 후보 홍준표는 이번 대선에서 또 한사람의 승자로 평가받을 것이다. 이른바 보수집단의 표를 결집시키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탄핵당하고 구속 수감된 전직 대통령의 폭망한 당, 대선에 후보를 내기조차 어려울 것이고, 선거비용 보전을 받지 못해 망하고 말 것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는데 이 정도했으니 성공이라면 성공이다.
하지만 이 성공은 너무나 초라하다. 40%의 지지를 받던 옛 영화는 간 곳없고 15%를 넘기는데 생사를 걸어야 하는 처지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허위와 과장으로 얼룩진 막말 선동으로 얻어낸 것이다. 이런 정치로는 수구보수이념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의 확장성은 없다. 실제로 자유한국당은 이번 대선을 거치며 대구경북의 지역당으로 추락하였다.
홍준표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수구보수집단의 대표자로서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홍준표는 그들의 기대대로 새누리당을 자유한국당으로 기사회생시키기는 하였다. 하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기사회생이다.
4. 영광은 짧고 시련은 길다
이번 대선은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다’는 ‘어대문’ 공식대로 진행되었다. 각종 여론조사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가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줄곧 1위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중들이 조기 대선을 통해 박근혜 정권을 지워버릴 작정을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재인이 실수를 해도, 자질부족을 드러내는 사건이 일어나도 지지층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러한 문재인에 대한 지지를 친노집단의 광기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한쪽 면만 본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정치집단의 선동에 휘둘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문재인 후보는 선거전 내내 적폐청산을 추구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나름대로 충실하려고 애를 썼다. 선거전에서는 다른 지지층을 넘보기 쉬운데 문재인은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선본 구성에서 적폐인사로 지목될 수 있는 사람들이 끼어들기도 했지만 그건 부분적인 일이었다.
문재인이 이번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적폐청산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에게 ‘당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당선의 기쁨은 잠시이고 그의 앞에는 넘어야 할 험난한 고개들이 줄을 지어있다.
대중들은 당분간 문재인에게 관대하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적폐세력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선에서 실패한 국민의당이 자유한국당 등과 손을 잡고 개헌을 통해 차기정권을 무력하게 만들려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수구보수집단이 지배하고 있는 구조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이런 사회구조와 지배이념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저항과 도전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당한 경륜과 자질을 가졌던 김대중 대통령과 자기 지향이 확고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문재인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을 추구하는 정권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는 순간 정권의 관심은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쏠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움켜쥐고 있는 수구보수집단은 결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얻는 것은 없고 정권의 지향과 국민의 지지를 잃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문재인은 오직 ‘무엇을 이룰 것인가’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 정부’가 될 수 있다.
시대는 적폐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수구보수집단이 사회를 지배하는 오욕에 찬 역사를 끝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굴욕적인 한미동맹을 초기화하고 국가주권을 확립해야 하며,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전환하여 한반도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족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등의 더 큰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민중은 박근혜 하야투쟁을 통해 이 길로 갈 것을 각오하였다. 더 큰 격동의 시대, 더욱 격렬한 투쟁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주인은 민중이다. 정권은 그 요구를 집행하는 담당자일 뿐이다. 이것은 범국민적인 하야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천명한 것이다.
문재인은 자신이 이 흐름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대중의 요구를 실현하는데 더 많은 애를 써야 한다.
수구보수집단의 저항은 거칠겠지만 이들은 최대의 위기에 처해있으며 몰락의 길로 가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수십 년 동안 생각과 행동을 옥죄어온 망국적인 사대매국사상, 적대적 분단이념, 반민중적 계급의식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선거가 마감됨으로써 역사적인 투쟁의 2막이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