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이야기, '강제징용' 일곱번째
1. 강제노동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 65년 한일회담이 막고 있다는데…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하여 일본이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는 이유가 박정희의 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 때문이라고 알고들 있다. 사실이다. 한일회담의 결과 피징용자, 사망자, 부상자, 생존자들에 대하 피해보상으로 3억달러를, 그것도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의 명목으로 받은 결과이다. 게다가 피해보상 문제가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못 박음으로써 징용자의 체불임금, 연금 강제저축원금 등에 대하여 일본과 다툴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강제징용’ 자체를 부인하며 ‘약간의 문제야 65년 한일협정 때 합의하지 않았냐.’고 큰소리를 친다.
박정희는 왜 그랬을까? 굴욕적 한일협상반대를 외치는 6.3 항쟁을 계엄령으로 누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나 김종필은 경제개발 자금이 절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이 겨우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도 <무상 6억 달러>의 정식 배상금을 받고 국교를 재개한 것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필리핀의 10배가 넘는 36년 동안 온갖 살육, 투옥, 착취를 당하고서도 <무상 3억 달러>를 그것도 ‘배상’이라는 이름도 못 부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것이니 아무리 경제개발 자금이 절실했다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필리핀은 ‘배상금’으로 대한민국은 ‘독립축하금’으로 받게 된 경위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2012년 <1966년에 작성된 CIA 보고서 ‘박정희 한일협정 비밀해제’>가 드러나자 박정희 굴욕외교의 전말이 알려졌다. <비밀해제> 문건에 의하면 박정희는 한일협정 체결 당시 6개의 일본 기업들로부터 6,6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단다. 그러나 박정희의 비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박정희도 문제려니와 더 큰 문제는 미국이다. 한일관계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그 당시 한일관계를 규정했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란 무엇이었을까?
2. 한일관계를 근본부터 왜곡시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것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즉 <대일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지역에 불과했던 일본이 공식적으로 다시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51년이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다. 미국은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권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을 급부상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 결과 45년 패전 직후의 대일본 정책을 버리고 대단히 관대한 조건으로 일본을 부흥시키기 위한 새로운 정책을 마련하게 된다. 일본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 각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사죄와 배상 등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동맹 파트너로서의 일본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였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강화 회의 참여조차 거부당했지만 강화조약 결과로 조성된 부당한 국제질서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러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한일관계에 작동하던 조항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기로 하자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조항부터 생각해보자. 얼핏 아무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조항은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말고, 일본 제국주의로 되어 있던 한 개의 나라를 두 개로 분리한다는 뜻이다.
이 조항은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착취의 문제에 대한 해법도 완전히 변질시켜 버렸다. 즉 재산 및 청구권의 처리를 ‘일본국과 당사국간의 특별협정의 주제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전후 한일관계의 시작을 두 개의 나라가 분리되면서 비롯되는 국가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로 묶어놓게 되었다. 실제 한일회담은 이 조항에 언급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특별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열렸고, 그 결정판이 바로 1965년 한일협정이다.
한일협정은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이 말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었으므로 당연히 무효를 선언한 것 이라고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생각도 그런 것일까? 절대로 아니다. 식민지배가 불법이었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의 나라가 두 개로 분리되었으니 옛 조약은 당연히 효력을 상실하고, 분리된 국가에 맞게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일협정은 이 두개의 전혀 다른 생각을 대충 얼버무린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감정을 고려해 병합조약과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어떤 형태로든 조약에 명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배의 위법성을 따짐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추궁과 피해보상까지 인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왜? 미국의 도움으로 과거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지 않아도 당당한 국제질서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니까!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책임을 묻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평양 전쟁에 대한 부분이었지 그전에 이루어진 식민지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지도, 사과할 의사도 없는 일본과 수교하여 미일관계의 하위의 한일관계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박정희 정권의 처지는 51년이 지난 2015년 딸 박근혜에게 고스란히 되물림 되고 있다. 미국의 압력으로 한일군사보호협정을 맺기 위하여 위안부 문제를 얼렁뚱땅 10억엔에 팔아치우고도 자국민의 원성이 두려워, 아베가 ‘사죄를 했니, 마니’ 하는 거짓말을 앞세우는 박근혜의 행태와 완전 똑같다!!
한일협정을 규정지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좀 더 차분히 공부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더 중요한 문제를 짚어 보자. 미국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뿌리부터 청산하지 않고 얼렁뚱땅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시킨 이유가 중국의 등장으로 이어진 냉전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이 말은 어패가 있다. ‘미국이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까? 거짓도 아니지만, 내 생각엔 더 본질적 측면을 은폐하는 교묘한 말로 들린다.
그 본질적 측면이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독단적이고 집요한 외교정책이다. 미국은 정의와 평화의 사도처럼 행세했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그 숱한 폭거와 착취로 인하여 죽어간 아시아 식민 지배 국가의 민중들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결국 2차 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려야 하는 그 순간에 해방자의 모습으로 등장해 오히려 일제를 대신하는 지배자가 되어버린 체제이다. 그리고 일본의 위정자나 이승만 박정희나 모두들 그런 체제에 부역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받는 체제이다.
3. 포츠담 선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재편에 대한 의도가 노골화되는 것은 포츠담 회담부터였다. 회담 직후 포츠담 선언이 나왔기 때문에 그 회의가, ‘마치 일본에 대한 항복 선언을 요구하기 위한 회담’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1945년 2월 열렸던 얄타회담의 후속조치를 위한 회의였다.
얄타회담은 소련 크림반도 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처칠이 모여 나치독일 패전 이후 독일 관리에 대한 일반적인 방향을 논의한 회담인데,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등 4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해 5월 나치독일이 항복하자,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여 얄타회담에서 논의되었던 패전 독일의 영토 재분할과 각국 국경획정, 배상 등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얄타회담 5개월 후, 포츠담 회담이 열리기 전에 두가지 특기할 상황이 발생했다. 하나는 4월12일, 미국의 4선 대통령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포츠담 회담 개최 바로 전달(7월16일) 미국이 원폭실험 성공이다.
얄타회담에서 ‘전쟁의 조기 종결’과 ‘미국민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루즈벨트의 요청에 따라 스탈린은 사할린 남부의 치시마 열도의 할양과 만주에서의 소련 권익 획득을 댓가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한다고 밀약했다. 실제 독일항복이 임박한 4월5일 소련은 일본에게 1946년 만료되는 <일소 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였고, 독일이 항복하자, 대일전 참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소련은 포츠담 회담에서 얄타밀약을 구체화하기 위해 미국의 확실한 동의를 원했다.
이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대표는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이었으며 트루먼은 루즈벨트에 비해 훨씬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루즈벨트가 소련과 힘을 합하여 전쟁의 조기종결을 서둘렀다고 한다면 트루먼은 소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단독으로 종전을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런데 마침 포츠담 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날, 미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트루먼에게 보고되었다. 트루먼은 이제 소련의 도움없이 미국 단독의 힘으로 대일전을 마감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포츠담 회담 도중 당연히 소련의 대일참전의 요청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에게는 내용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포츠담 선언은 트루먼 혼자서 작성하여 영국과 중국 장제스의 서명만 받은 선언이었다. (소련은 대일 참전 후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일본은 이 선언에 소련의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 오히려 안심하여 항복 결단을 늦추며 소련의 중개에 의한 연합국과의 화평교섭에 더 기대를 걸게 된다. 트루먼의 배신적 행동에 스탈린이 독자적 대일참전을 더 앞당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일 트루먼이 원폭개발의 성공과 소련의 공동성명 참가를 명백히 밝혔다면 일본은 항복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트루먼이 홀로 작성한 포츠담 선언은 강력하게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내려하기 보다는 ‘원폭 투하 명분 마련용’이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츠담 선언이 일본에게 전달된 것은 7월27일이었다. 일본이 소련의 서명이 빠진 포츠담 선언의 진의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서방세계에는 언론을 통해 일본이 연합국의 제안을 ‘묵살’한 것으로 발표되었고, 마침내 8월6일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서둘러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게 된다. 미국이 두려워한 것은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육로로 연결된 소련이 동북아를 소련 영향권 하에 놓는 일이었다. 소련보다 빨리 극동에 입성하기 위해 핵을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이 얼마나 비정한 일일까! 우리는 적어도 미국이 일본 항복을 절절히 원해 피해를 감수하고 원폭을 투하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원폭이 투하되어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 역시 소련의 참전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8월9일 소련은 마침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조선이나 만주국은 공습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돌연 소련군이 진격으로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제국의 전역이 전화에 휩싸여 붕괴되기 시작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고 이를 한차례 ‘묵살’한 일본은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포츠담 선언 수락은 잠시도 유예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일본은 소련 참전을 전기로 패전을 향한 절차를 밟아나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하기 까지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소련은 만주를 넘어 한반도에까지 진출했으며 소련의 한반도 진출을 용인할 수 없었던 미국과의 충돌을 예견하게 된다. 우리가 배운 냉전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의 본모습의 시작이다!!
4. 강제징용노동자의 사죄와 배상운동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투쟁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박근혜 구속의 일등공신은 물대포를 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백남기 농민을 떠올렸다.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팠는데 그 분 덕에 물대포 문제가 공론화 되었고, 박원순 서울 시장도 경찰이 물대포를 쏘지 못하게 하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그래! 보람 없는 투쟁은 없는 거다. 투쟁을 시작했다는 것! 투쟁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끝을 예감할 수 있게 된다. 둑이 무너지는 것은 작은 구멍으로부터라고 한다. 이 그릇된 국제질서를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이 숭배하고 떠받들어도 그 참담함을 꿰뚫어보는 노동자의 투쟁으로부터 희망은 만들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