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이야기, 강제징용. 여섯번째

1. 용어상의 문제에 대하여

최근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이 확산되고 한일 간 뜨거운 쟁점으로 급부상되면서, ‘강제징용 노동자’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징용’이라는 말만으로도 국가적 강제성이 충분한데, 앞에 ‘강제’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대일역사청산과정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다. ‘강제징용’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는 데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니 이 운동을 해나가는 노동자들은 당황스러울 것 같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문제부터 생각해보려고 한다. 단지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이 논점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의 구체적인 상을 이해하는 계기로 좋을 듯해서 이다.

먼저 이러한 문제제기를 한 정혜경씨의 주장을 살펴보자.

<징용>이라는 용어만으로도 강제성과 일본 국가권력의 관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징용>에 <강제>를 덧붙이는 것은 당시 강제동원의 실태를 과도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용어는 역사적 사실(事實) 자체를 표현하는 방식이므로, 당시 상황을 과다하게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강제징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당시 역사성을 얻은 용어도 아니다. 과도한 용어 사용은 오히려 시민들이 올바른 역사상을 갖는데 저해요인이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나 과도한 역사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 것은 시민역사교육은 물론, 대일역사청산 과정에서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인력동원 관련 용어 사용에 대한 의견』 정혜경. 2017. 3. 22.’ 〛

원래 징용은 전시에 국민징용령에 따라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국민징용령의 대상은 일본국민이며,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국민징용령의 대상으로 될 수 없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징용이라는 이름하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끌고 갔다. 징용이라는 말의 뜻은 전시라는 비상한 시기에 정당한 법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합법적 강제동원이다. 징용이라는 말속에 불법성, 부당성, 부도덕성을 담아낼 수 없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당한 온갖 불법성, 부당성, 부도덕성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강제징용이라고 써야 한다. 일본정부가 징용이라는 말은 인정하되 강제징용을 부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인력동원 관련 용어 사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 정혜경씨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중시하는 일본의 원칙론 때문… 일본학계의 반응은 당연한 문제제기이므로 학술적 연구에서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일본학계의 반응이 당연한 문제제기라니…. 일제 강점 시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 문제를 열심히 파헤친 전문가로서는 다소 뜻밖의 발언이다. 내친 김에 ‘국민징용령’에 의한 동원만이 아닌 그전부터 강제로 일본에 연행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린 조선인 노동자들의 갖가지 동원방식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강제 동원’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가 ‘할당모집’이었다. 기업체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모집 허가를 취득한 다음 우리나라 지정받은 지역에서 노동자를 모집, 일본으로 동원하는 것으로 1938년 5월부터 일본의 국가시책으로 실시되었다. 둘째는 ‘국민징용’이었다. 국민징용은 1939년 7월 ‘국민징용령’과 ‘국민 직업 능력 신고령’ 이후부터 실시되어, 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일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이 징용은 법적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여 국가차원의 강제성이 한층 노골화 되는 경우였다. 세 번째는 ‘관알선’으로 정부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조직 동원 방식이다. 즉 사업자가 조선총독부에 조선인 노동자를 신청하면 조선 총독부가 모집지역과 인원을 허가하여 행정기관과 경찰 등을 동원하여 노동자를 보내는 방식인데, 1942년 조선총독부가 작성 결정한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요강’에 의해 집행되었다.

강제징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다.’고 정리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한 풀이를 읽어보면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총동원법>(1938) 시행 이후의 인적 자원의 동원 중 징병을 제외한 나머지를 <징용>으로 총칭한다. 징용의 제도로는 모집, 관알선, 징용 등이 있는데, 좁은 의미로는 ‘국민징용령(1939)’에 의한 징용만을 징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어떠한 형태의 징용이든 노동자 확보와 배치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깊숙이 개입했으며, 납치나 인신매매 같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정부 운영 『한국사 컨덴츠』>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운동’은 당연히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전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지, ‘국민징용령’ 발표 후 끌려간 노동자만을 추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은 위에서 말한 세가지 중 ‘국민징용령’에 의한 징용만을 국가가 개입한 강제성으로 인정한다. ‘할당모집’이나 ‘관알선’은 개별기업의 모집활동이었으며 또 개별 노동자의 자발적 취업행위이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대응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일본이 징용은 인정하지만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불법성, 부도덕성을 도저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일본의 언어의 적합성과 디테일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이 아니다!!

2, 강제노동 그것은 노예사냥과 노예적 착취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연행된 조선인은 실로 5백만에 이르며,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진 1939년부터 1945년에만 115만 여명이 강제연행 되었다. 조선의 노동자들을 탄광, 광산, 토목공사, 건설현장 등 가장 힘든 부문에 배치하고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씩, 소나 말처럼 혹사 시키면서 고혈을 짜냈다. 최소한의 인권과 임금은 물론 최저생활비마저 보장해주지 않았다.

나는 전에 이런 기록을 보면서 ‘강제징용’을 그저 강제적인 저임금 노동정책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하신 고 전태일 열사를 떠 올리며 대략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나 역시 80년대 후반 전자 회사 현장에서 하루 12시간 노동에 월 평균 10만원 남짓을 받으며 일한 적이 있는지라 ‘노동현실이야 지금이나 그때나 엄청 열악한 거지 뭐…….’ 이런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제징용 문제를 공부해보니, 강제징용은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노동착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잔인한 ‘노예적 수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제징용에 대한 책들을 보면서 도저히 책장을 넘길 수 없을 만큼 아픈 대목이 많았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이렇게 당한거구나. 가두어 놓고 사육하는 가축인들 이렇게 했을까? 해방이 된지도 70년이 넘어가는데, 나는 하나도 몰랐네… 또 이런 문제에 대한 국가적 진실규명은 하나도 되지 않았구나….

▲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강제징용, 징병 사진

(1) 일본 정부의 주도로 계획된 조선인 노동자 강제연행, 그들의 치열성

처음부터 무리였던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이 점점 격렬해지자, 일제는 턱없이 부족한 군수물자와 노동력을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1938년 4월)을 공포했다. 39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대대적인 동원을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에서는 ‘징용령’이 아닌 ‘모집’형식을 취했다. 일제는 이 ‘모집’의 형식을 두고 ‘강제연행’이 아닌 ‘자발적 취업’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대장성 관리국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 (조선편 제 9분책)를 보면 ‘징용령의 발동이 자칫 필요 없는 오해를 일으킬 염려가 있어서...’ 라고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징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며 더 세련된 방식으로 반드시 국민징용에 동원시키겠다는 말이다. 그들은 강제연행을 하면서도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자발적 취업’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연행이었다는 증거를 조선인의 동원목표를 구체화 하는데서 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1939년의 수요 노동력은 110만으로 정리했으며 그 공급원의 하나로 조선인 노무자를 중요산업에 연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1925년 이래 ‘조선인 노동자 이입 제한 방침’을 폐지하고 탄광, 및 토건업에 집중적인 집단연행이 강행되었다. 같은 해 7월 28일부의 내무, 후생, 양 차관 명의의 ‘조선인 노무자 본토이주에 관한 건’이 발표되고 각 사업자에게 조선인 8만5천명의 집단연행이 인가되었다. 이것은 사업자의 집단적 연행을 인정하는 국가적 강제력이 작동되었음을 의미한다.(1939년 한해의 사례)

또 1938년 9월부터, ‘조선인 노동자 모집 요강’ 등, 고용조건, 모집지역, 모집기간, 수송방법 등에 국가권력이 개입, 통제를 가했다. 조선인노동자가 알아 두어야할 사항으로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다. 첫째, 시국산업에 종사하여 국가에 공헌한다는 것을 자각할 것. 둘째, 일본 도항 후에는 소정의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받을 것. 셋째, 직장 이동을 하지 말 것. 넷째, <협화 사업 단체>에 가입하여 그 회원증을 소지할 것. 다섯째, 주소 변경 시에는 5일 이내에 <협화 사업 단체>에 신고할 것. 여섯째, 일본 생활풍습에 순응하고 일본인이 혐오할 행위는 하지 말 것. 일곱째, 국어(일본어)를 사용할 것. 여덟째, <협화 사업 단체> 간부, 경찰관 및 직업 소개소원의 지시에 복종할 것.〚마에다 하지메 『특수 노무자의 노무관리』(1943)〛

(2) 노예사냥과 강제연행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짐에 따라 .....노무 징용자 할당이 상당히 혹독해졌다. 납득해서 응모하기를 기다려서는 그 예정수를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군이나 면(촌)의 노무 담당이 한반중이나 새벽에 남자가 있는 집으로 가 깊이 잠든 때를 노려 갑자기 습격하거나 논밭에서 한참 일하는 곳에 트럭을 대고 아무 일도 아닌 듯이 태우고 데려가서는 집단을 편성하여 홋카이도나 규슈에 있는 탄광에 보냈다.〚가마타 사와이치로『조선신화』(1950년)〛

어느 날 갑자기 서울거리에서 이유도 없이 경찰에 잡혀 그대로 홋카이도 아사노 탄광의 하청회사 가와쿠치구미로 연행된 한 조선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고 한다.‘얼마 안 있어 우리는 한곳에 모여 경찰담당주임에게서 훈시를 들었다. “제군은 이 비상시에 황국신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홋카이도에서 새로운 철도를 놓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야한다. 급료도 좋고 물론 대우도 좋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 우리들은 웅성거렸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일행 67명이 홈에서 기다리자 특별히 배정된 열차가 들어왔다, 징용노동자를 싣고 갈 열차였다. 온갖 노력을 다해 집에 연락하려고 했지만 일절 허락되지 않았고, 그대로 죄수 같이 부산으로 호송되고 말았다. 동행자들은 나막신을 신은 자, 작업복 차림의 농부, 외출복을 입은 자 등 가지각색이었으나 모두 나처럼 이유도 없이 강제 연행된 자들로 모두 길거리에서 연행되었다. 내 유일한 소지품은 아침에 회사에 싸 간 빈 도시락뿐이었다.’〚산이치쇼에서 출간한 『탈출』 수록 「잃어버린 청춘」(1956년)〛

전시 중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했던 한 일본인은 경찰 특고계와 함께 지정부락을 집집마다 방문해 일할 만한 남자를 찾아내어 노예사냥 하듯이 연행했다고 회상했다.「당선수기 나의 8월 15일」(주간 아사이 1963년 8월23일)

물론 좋은 일자리와 임금을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본에 온 노동자도 있다. 일본은 이를 ‘자발적 취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취업의 자유에 의한 자발적인 행위였을까? 1938년 이전 그러니까 1912년부터 1918년까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하루아침에 땅을 잃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또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일제에 의한 쌀의 강제 공출로 인해 날이 갈수록 식량사정이 험악해져, 어디에라도 취직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처지에 내몰리게 된다. 당시 조선에 일자리는 없었다. 자발적으로 도항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의에 의한 취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일제강점기 미곡생산량과 대일반출량1차 대전 이후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한 일본은 부족한 쌀을 한국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하였다. 농지와 수리시설을 확충했고 종자 등의 개량을 통해 식량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많은 쌀을 가져가고 한국농민의 생활도 안정화시킨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늘어난 생산량보다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한국 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한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농사개량 수시시설 설치비용, 등을 떠맡게 된 농민들의 경제는 더욱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 독립기념관 자료>

(3)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활과 탄압정책

일본인 노동자의 말이다. ‘갱내 인부들은 원래 토목공사 인부들이었다. 전쟁말기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인부들은 돌관 작업을 위한 갱도 뚫기, 암석 굴진, 물이 있는 현장 등 어려운 곳을 맡았다, 현장에는 늘 우두머리가 지키고 있었고 도망을 감시하는 파수꾼을 갱도 요소에 배치했다. 기숙사에는 높은 울타리를 쳐 봉건적 노예노동의 철칙에 묶여 있는 것과 같았다. 장소를 불문하고 린치를 가했다, 탄차가 탈선했는데 혼자서 바로 하지 못하면 허리가 빠질 정도로 때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노조편 『탄광에 산다』 >

▲ 바닷물이 들이친 지하 갱도: 독립기념관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90%는 일본인이 기피하는 갱내에서 광부로 일했다. 제강소에서는 가장 힘든 용광로 작업이나 프레스 작업에 종사했다. 제공되는 식사는 조선에서 먹던 양의 1/3에도 비치지 못했다. 그것도 기름을 짜고 찌꺼기만 남은 콩깻묵에 극소량의 쌀을 섞은 것을 멀건 된장국과 단무지 정도의 반찬과 먹어야 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는 일본어로 <타코베야> 라고 불렀는데 문어를 잡는데 사용하는 항아리처럼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창문에는 창살이 설치되었고, 탈출을 막기 위해 밤새 경비원이 감시견을 데리고 순찰하였다. 수용인원을 초과해 화장실 욕실에서는 늘 악취가 진동했으며 작업복을 한 벌도 받지 못한 노동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 애초에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선전한 월급은 50∼70엔 전후였지만 실제로 작업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미숙련자로 분류되어 약속한 월급의 70%인 35∼50엔으로 책정되었다. 이 돈조차 실제로 지불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일본 각 지역의 작업장까지 이동할 때 들어간 교통비, 식비 등의 모든 비용과 작업복, 신발값 등 선대금이라는 명목으로 청구되다 보니 처음부터 빚더미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삽과 곡괭이 등 작업도구마저 유료로 빌려야 했으며 숙식비 용품 대여비, 각종 명목의 강제저축 등을 공제하고 나면 매월 손에 쥐는 돈은 고작해 3∼5엔으로 최소한의 용돈수준이었다. 그나마 1엔도 주지 않는 곳마저 있었다. 현금을 갖고 있으면 도망간다고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연행이 강권적이고 민족적 억압을 수반하는 한, 도망자가 속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일본 관청통계에 의하면 1939∼1945년 3월까지 연행된 조선인 중 대략 22만명이 도주했다고 한다. 조선인의 도주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었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히타치광산에서도 1940∼1943년 까지 3,650명을 연행 했는데 1943년말 현재 1,550명으로 40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입조선인 노무자 이동조사 (1942.10) 단위 %본 조사는 1930년 10월∼1942년 말 석탄광업의 이입총수에 대한 동향을 파악한 것

당시의 훗카이도 탄광기선주식회사 노무과장 마에다 하지메는 “3년간 약 반 이상을 잃었다, 이 사이에 만기 귀항한 자는 겨우 7.3 퍼센트로 35.6퍼센트가 도주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라고 했다.〚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박경식 1978년〛

일본은 패전 후 강제연행해서 죽도록 혹사시켰던 조선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내용을 전하는 것만 해도 방대한 내용이므로 다음으로 미루어야 겠다. 본고에서는 나의 견해보다는 생생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여, 가급적이면 여러 책에서 인용되었던 기록들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끝으로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고즈윈〛, 김호경, 권기석, 유성규님의 공저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돌베게〛 등의 기록을 참고, 인용했음을 다시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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