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이야기, 강제징용. 다섯번째
소녀상에 이어 <일제 강제징용노동자상>문제가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용산역에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불허하자, 인천, 경남, 부산 등지에서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움직임이 연일 부산하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지도 벌써 1년이 넘은 듯하다. 2016년에 일본 단바 망간 기념관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웠고, 2017년 서울에, 2018년 평양에 세운다고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만 해도, 사실 의미가 잘 공감되지는 않았다. <소녀상>이 반일운동의 초점이 되어 있는 조건에서,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굳이 <강제징용노동자상>건립운동으로 제기하는 것은 조금 진부한 방식이 아닐지... 강제징용 문제는 치열한 투쟁이 필요한데, 노동자상을 건립하자는 것이 그에 부합되는지도 잘 와 닿지 않고... 생뚱맞은 느낌? 아무튼 처음 인상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 큐슈 군함도 답사를 함께 갔던 민주노총 일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 일꾼은 답사 기간 동안 자신들이 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운동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첫 시작은 2014년 8월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재무장>에 분노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대표들이 일제 강점기,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찾아 일본을 방문했었다. 이때, 일제 강점기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을 접하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도쿄와 교토 일대를 방문하면서 양대노총 대표들은 슬픔과 분노에 앞서, 깊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고대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우키시마루호 희생자 위령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곳에서 만나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에서 느낀 아픔을, 훗날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 발족식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분노였다. 끝없이 억압하고, 착취하고, 역사의 굽이굽이 민중들에 대한 가혹한 학살에 치가 떨렸다. 그래서... 노동자 권리와 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이 땅 평화와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해본 적도 없었고, 근본적으로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2014년 이국땅 멀리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꼈다. 너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울었던 기억,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기억, 그렇게 나의 기억투쟁은 시작됐다. 오늘 그날 그 심정으로 다시 결심한다.... ( 2월 14일 민주노총 통일국장 엄미경 페이스북 )”

그 일꾼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기억투쟁’이라고 부른다. ‘기억투쟁’이란 ‘민족사에 대한 통한을 처음 절절하게 가슴으로 느꼈던 그 순간을 기억하기위한 투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에게 ‘기억투쟁’이라는 단어는 수 십 년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노동자들이 ‘민족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자각한 순간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들렸다. 또 단지 자신 만의 투쟁이 아닌 ‘양대 노총, 전 조합원이 앞장서고 전 민족이 함께 하는 친일청산 투쟁으로, 반전평화투쟁으로, 민족대단결 투쟁으로 발전시켜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의 시작으로 보이기도 했다.
노예처럼 잔인하게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본 군함도 등 미쓰비시 탄광에서, 미쓰이 군수공장에서, 스미토모 광업소에서 당해야 했던 강제노동과 수탈... 해방 후 기쁨에 들떠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조선인들이 오미나토항 우키시마호에 올랐다가 마이즈루 항에서 배가 폭침됨으로써 거의 몰살되는 전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 같다.


마치 자신의 아버지의 일처럼, 뼈아픈 통증과 분노가 가슴으로 밀려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하나로 얽히고설키어서 노동해방의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닐까?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원래 결합되어 있는 인간해방의 양 축이다. 서구에서 들어온 일면적인 민족이론, 계급해방이론으로 마치 이 둘이 조화로울 수 없는 문제인양 오해받고 있지만, 계급해방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민족의 문제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노동자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과 투쟁이 절대적 힘이 되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36년 동안 식민 지배의 엄청난 수모를 당한 것도 부족해, 해방이 되고 7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소 강제노동의 억울함만이라도 해소하기는커녕 한일관계의 쟁점으로 부각시키지도 못했다. 아마도 노동자의 대표조차 엄청난 제국주의의 폭력을 자신의 문제로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회한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을 듯하다. 그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분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억억 목놓아 통곡하면서 ‘이 아픔을 잊지 말자’는 결심을 굳혔던 것 같다. 그것이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작이자, 기억투쟁의 참 뜻인 듯이라고 한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자각(自覺)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은 이론이나, 말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깨달음이 없으면 사상도 없다. 사상없는 투쟁은 당위적이고 실무화된 투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노동자 대표 분들의 자각은 너무 귀한 것이다. 앞으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이 할아버지 아버지 노동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넘어, 굴절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할 계기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이런 종자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사람들의 결심이 시작한지 2년여 만에 <일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으로 조금 더 발전된 틀을 갖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자각과 결심을 전 노동자의 것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을 하자는 운동은 일본, 서울, 평양에 이어, 경남, 부산, 울산, 인천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주변에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투쟁을 해야 하지 않나요?” 내가 처음에 가졌던 의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스스로 이렇게 답을 내렸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대중적으로 건립하는 운동은 결국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는 노동자 대중투쟁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 말을 강제징용 노동자 상을 세우고 나서 그 후에 투쟁하자는 말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오히려 투쟁 없이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울 수도 없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것 자체가 바로 투쟁의 과정이다.!! 과거 역사 따윈 잊고 편히 살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 주위 노동자들에게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의 사연을 전하고, 함께 노동자상 건립운동에 나서자고 호소하는 활동. 이런 일상적 투쟁과 활동이 모여 결국 더 큰 투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눈치 보느라, 용산역 강제노동자 상 건립을 허가조차 해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투쟁으로, 또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저지하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물론,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