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민족이야기 - 강제징용, 네 번째
모든 현장 답사가 그러하듯이 일본 강제징용 답사에서도 현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강제징용은 없었다’는 것이고 군국주의화가 우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강제징용 문제를 해설해 줄 일본인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준비한 정영희씨의 노력 덕분에 일본에서 평화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안내와 해설을 들으며 키타규슈를 돌아볼 수 있었다. 조중(朝中)접경 지역 답사를 다닐 때는 조선족 안내원들이 있었는데, 아무리 양심적 지식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사람이라니... 소화가 어려운 문제였다.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우리를 반겨주신 분은 기무라(72세) 선생님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나가사키와 하시마(군함도), 수미요시 터널을 안내해 주실 분이다.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정년퇴직하신 분이며 한국어를 독학하셨다고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5번이나 읽었고(<아리랑>, <한강>은 물론), 박경리의 <토지>는 2권까지는 읽으셨다는 것을 인터넷 기사로 본 일이 있다. 주로 책으로 공부하신 탓인지 한국어 발음은 다소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한국의 역사, 정치 상황, 한국인의 정서는 아주 잘 알고 계시는 듯 우리와 친해지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렇지만 애초의 문제의식, 그러니까 ‘저분들은 왜 재일조선인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 ‘아무리 양심적인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의 난감함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을 다녀오자 바로 해소되었다.
1995년 10월 1일 문을 연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을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이다. 그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시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대표를 맡으면서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지금도 ‘강제징용’이라는 말은 일본 내에서 쓰기 어렵지만 패전 후 <일본의 전쟁책임론>은 완전 금기어였다. 오카목사님은 만년에 ‘일본의 가해 책임을 밝히고, 현재도 남아있는 차별철폐와 정부의 보상 실현을 촉구하기 위한 자료관 건립’을 구상했으나 94년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그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시민의 도움으로 토지 매입과 건축비를 마련했다. 부족한 설립기금 4,500만 엔은 대출금과 기부금 등으로 해결했으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정부의 재정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교육시설에 주는 세금 감면 혜택은 물론 도로 안내표지판 설치조차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니 일본의 우경화와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영비는 회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입장료로 충당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일본 NG0에도 유급 상근자가 없다고 하며,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며 일을 한다고 한다.
오카 목사님은 왜 조선인의 인권문제에 몰두하셨을까? 또 그건 왜 자료관의 형태였을까? 나가사키의 피폭은 일본의 군국주의로 인한 것이며 일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다.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전쟁책임론을 한사코 부인하는 일본으로서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문제를 인정할 수 없다. 당연히 재일조선인의 강제징용, 피폭 피해의 실상 등은 제대로 자료 조사조차 제대로 못한 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의 인권문제를 제대로 조사하고 자료화하는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실현하려는 일본 내 양심적인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가 활동의 첫머리에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지금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문제, 사할린 동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싶어도 처음부터 벽에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1차 자료부터 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당연히 어딘가는 정리되어 있으려니 하지만, 사실 지난 70년간 일본도, 한국도, 또 한일관계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서로 외면하고 은폐해 온 결과 그 어디에도 객관적인 자료는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오카 목사님도 이런 것을 고민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민간차원에서도 하나하나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파악된 내용만큼 자료화하여 교육하고...


처음에는 나가사키 평화박물관이라고 부르기에 좀 더 번듯한 건물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민간모금으로 근근이 세운 자료관이 여유 있을 리 없었다. 장소가 좁고 협소한 탓에 수집한 자료들 대부분을 제대로 전시 못 하고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래도 정부가 세웠다는 거창한 허울뿐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과 평화공원에는 없던 귀한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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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의 세부 내용> 1 .조선인 피폭자 코너,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일본의 침략/조선편, 일본의 침략/중국편 |


오카마사하루 목사는 "일본의 침략전쟁 희생자가 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도록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아왔다. 가해의 역사를 숨겨왔기 때문이다. ... 중략...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는 없다"며 일본 정부의 행위를 비판했다. 이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일본의 평화문제와 조선인 강제징용문제가 왜 깊이 연대할 수밖에 없는 사안인지 이해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저지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문제와 조선인 중국인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사죄하는 문제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 하나의 문제였다. 사실 이분들의 활동이 아니었으면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기초 자료는 지금의 절반도 조사, 구축되지 않았을 것이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과 그 후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을 뒷받침하는 기본 조사는 거의 일본 분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관계가 과거사를 제대로 풀고, 정상화되기 위해서 앞으로도 이분들과 굳게 연대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제징용의 실체적 진실을 조사하는 것도, 또 일본의 정책을 바꾸게 하는 일본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분들과 전 과정을 손잡고 나가야할 길이다. 나가사키에 있는 양심적 지식인의 계보(?) 오카 마사하루 – 다카자네 야스노리 – 시바타 토시아키 – 기무라. 이분들이야말로 강제징용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해야할 우리가 가장 깊이 연대해야할 소중한 분들이라는 의식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무라 선생님은 만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을 다녀온 후 그분의 지향과 뜻이 우리와 같다는 일체감이 주요한 원인이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기무라 선생님이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 워낙 잘 알고 있는 덕분이다. 또 일본 특유의 배려 문화 탓도 있는 듯하다. 기무라 선생님은 “일본사람들은 남을 배려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심한 말을 함부로 못하는데 한국인은 속마음까지 다 표현하는 게 신선하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칭찬인지, 욕인지? 하여튼 일본인들에게는 한국인이 그렇게 보인다는 뜻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기무라 선생님은 평화란 거리낌 없이 상대방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라며 “일본, 미국도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말씀하셔서 정말 좋았다. 활동이 아닌 취미로 일 하신다면서도 어찌나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해주시고 적시에 필요한 안내를 해주시는지... 이틀 만에 헤어질 때, 마치 백년지기와 헤어지는 듯 한 분위기였다.


이분들 이외에도 이번 답사에서 참 좋은 일본 분들을 많이 만났다. 후쿠오카 오무타시에서 지역 활동을 하고 계시는 학교 선생님들도 멋진 분들이었다. 1898년부터 미야하라 탄광에서 이루어진 온갖 탄광노동의 실태에 대해 증언해주셨으며 강제동원 노동자 2세인 배동록 선생님과 함께 조선인 강제노동을 알리고 진상규명하는 일들을 하고 계셨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그동안 우리의 현대사의 고통의 절반도 몰랐다. 분단문제, 미군문제, 이런 것에도 정신이 없었다고 핑계 대며 넘어가기엔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은 너무나 참혹한 현재진행형 고통인데... 너무 뒤늦게 깨닫는 느낌이다.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데, 기본적인 인권 문제, 평화 문제 역시, 투쟁 없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이, 일본에서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강제징용 등,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갖고 저토록 열심히 투쟁하고 있었는데, 정작 한국인인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저토록 조선인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있는데, 정작 우리는? 그리고 나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들의 억울함을 규명하여 평화를 실현하고,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이룩하는 디딤들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제부터 해야 할 우리의 몫이 아닐까! 이런 자각이야 말로 이번 나가사키 답사가 내게 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