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초, 미국 조지아주의 현대-LG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300명 넘는 한국인 노동자가 대규모로 구금됐다. ‘부적절한 비자’ 사용이라는 이유였다. ESTA(전자여행허가)·B-1/B-2(단기 방문 비자)를 이용한 파견 인력이 현장에서 직접 노동에 투입된 것을 미국 당국이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트럼프 행정부는 신규 H-1B(전문 기술직종 취업 비자) 신청에 10만 달러(약 1억 3천만 원)의 수수료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노동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동맹국의 투자와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는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투자는 환영, 노동자는 거부’라는 모순
한국 기업들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이후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산업 공급망 재편의 핵심 동반자로 대규모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한국 인력을 들여보내는 과정에서는 가혹할 만큼의 장벽을 세우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의 기술자와 숙련 인력을 파견할 때, 비자 수수료만으로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한다. 이는 단순히 행정 절차상의 불편을 넘어 투자 자체의 수익성을 흔드는 구조적 불공정이다.
H-1B 수수료, 혼선이 드러낸 미국의 태도
H-1B 비자 수수료 폭탄의 적용시점과 방식을 두고 혼란이 일었다. 행정명령이 발표되자 MS, JP모건, 아마존 등은 H-1B 비자 직원들에게 미국에 머물거나 해외 직원은 기한 내 복귀하라고 긴급 권고하기도 했다. 공식 적용 시점은 2025년 9월 21일(현지시간)이다. 이 날짜 이후 접수되는 신규 H-1B 청원부터 고액 수수료가 부과되며, 이미 승인된 비자나 단순 연장 신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100배나 인상된 수수료 부과가 ‘매년 납부’인지, ‘일회성 납부’인지 혼란을 일으켰다. 초기 발표에서 러트릭 상무장관이 ‘매년 납부’라고 언급하면서 혼란이 확대됐다. 이는 단순 행정 착오가 아니라, 외국 인력에 대한 미국 당국자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혼선은 미국이 어떤 의도로 정책을 설계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결론은 신규 신청시 1회만 부과된다.
H-1B 표적은 인도, 그러나 한국도 직격탄
이번 수수료 폭탄은 분명히 인도 외주 기업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H-1B 승인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인도 IT 인력이 주요 대상이다. 이는 러시아 원유 도입 중단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인도를 향한 징벌적 성격이 짙다. 그러나 비자 수수료 폭탄은 한국도 직격한다.
공장 설립 초기부터 본사의 설계 및 기술인력을 파견해야 하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L-1(다국적 기업 주재원 비자), H-2B(비농업 단기 노동 비자), E-2(투자자 및 투자기업 직원 비자) 등 여러 경로가 존재하더라도 미국 당국의 심사 강화와 수수료 인상 기조 속에 예외 없는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한다.
E-2 비자의 허와 실
많은 이들이 “한국 기업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했으니, 그냥 E-2(투자자 및 투자기업 직원 비자)만 받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상 제한: E-2는 투자기업 본사 소속 직원에게 주로 발급된다. 협력업체나 하청업체 직원은 적용이 어렵다.
업무 범위 한계: 관리자·전문기술자 중심 비자라서, 현장 설치·시공 같은 직접 노동은 포함되지 않는다.
정치적 불확실성: 쿼터는 없지만, 최근 미국은 E-2 심사도 강화하는 추세다. 투자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거절될 수 있다.
즉, E-2는 대기업 핵심 기술인력에겐 해법이 될 수 있으나, 조지아주 사태처럼 협력업체 노동자 수백 명을 파견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동맹 속 불평등, “봉”이 된 한국?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이민 행정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우리가 미국에 투자와 기술을 제공하면서, 왜 일하러 가려면 1억 넘는 비자 비용을 내야 하느냐”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투자는 압박하면서, 노동자와 기업에게는 불합리한 규제를 강요하는 미국의 태도는 불공정·불평등을 넘어 종속적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에 맞설 카드가 많지 않다’라며 △투자 다변화(유럽·동남아 분산) △국내 산업 생태계 강화 △한미 간 특별 비자 협상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맹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미 한국사회는 ‘한미동맹,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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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A(전자여행허가): 단기 관광·출장 목적으로 입국할 때 사용하는 간소화 절차. 노동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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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B-2(단기 방문 비자): 회의(B-1), 관광(B-2) 목적으로 발급. 노동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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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B(전문 기술직종 취업 비자): 학사 이상 학위를 요구하는 전문직 외국인을 위한 대표적인 취업 비자. IT·기술자, 회계사, 연구원 등이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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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1(다국적 기업 주재원 비자): 다국적 기업이 해외 본사 직원(관리자·전문인력)을 미국 지사·프로젝트로 파견할 때 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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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B(비농업 단기 노동 비자): 계절적·단기적 비농업 분야(건설, 서비스업 등)에서 필요할 때 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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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투자자 및 투자기업 직원 비자): 미국과 투자 조약을 맺은 국가(한국 포함)의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할 경우, 그 기업 직원에게 발급.
